LPGA투어에서 한국 선수들이 강한 이유
  • 안성찬 골프 칼럼니스트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7.09.04 10:39
  • 호수 1455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선수 기량이 먼저일까, 기업 지원이 우선일까

 

“선수의 기량이 먼저라고 생각합니다.”

 

“정말 그럴까요. 기업의 골프에 대한 열정과 적극적인 지원이 없었다면 한국 선수들이 LPGA투어에서 놀랄 만한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있었을지 의문입니다.”

 

한국 여자선수들은 미국여자프로골프(LPGA)투어에서 왜 강한가. 외국 언론이 가장 궁금해하고, 한국 선수들에게 습관처럼 묻는 질문 중 하나다.

 

선수의 기량이 먼저일까, 아니면 기업의 전폭적인 지원이 우선일까. 선뜻 답하기가 쉽지 않은 물음이다. 마치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묻는 것과 비슷하다.

 

한국 선수들이 LPGA투어에서 여전히 강세를 보이고 있다. 1988년 구옥희가 우승한 이래 8월31일 현재까지 LPGA투어에서 무려 161승을 올렸다. 한국은 올 시즌 34개 대회 중 이미 끝난 23개 대회에서 13승을 올려 승률 56.52%를 달성 중이다.

 

LPGA투어 ‘특급신인’ 박성현 © 사진=KLPGA 제공

 

23개 대회에서 13승 올려 승률 56.52%

 

세계여자골프랭킹을 보면 더욱 실감 난다. 500위 내에 159명, 100위 내에 39명, 10위 내에 5명이나 들어 있다. 유소연(27·메디힐)이 10주째 랭킹 1위를 달리고 있는 가운데 ‘특급신인’ 박성현(24·KEB하나금융그룹)이 랭킹 3위에 올라 있다.

 

또 29살 동갑내기 이보미(혼마), 김하늘(하이트진로), 신지애(스리본드)가 일본 그린을 평정하고 있다. 특히 이보미는 2015·2016년 일본여자프로골프(JLPGA)투어 상금왕에 올라 골프 강국 일본 관계자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한때 골프 관련 전 매체의 표지를 장식할 정도로 폭발적인 인기몰이를 했다.

 

한국 선수가 강한 이유에 대해 외국 언론들은 다양한 분석을 내놓고 있다. LPGA투어에서 활약하는 베테랑 크리스티 커(미국)는 “한국에서는 골프 아니면 공부, 하루에 10시간씩 훈련하는 기계들”이라고 말했다. 아주 틀린 말은 아니지만 다소 지엽적이다. 영국 공영방송 BBC는 ‘K팝’ 현상에 비유했다. BBC는 ‘한국은 K팝의 나라일 뿐만 아니라 K골프의 나라’라고 설명했다. 그럴듯하지만 이것도 정답은 아니다.

 

국내 선수들은 무엇을 하건 ‘죽기 살기로’ 덤벼든다. 공부든, 운동이든. 가족이 ‘올인’하는 것이다. 비단 박세리(40)나 김미현(40)뿐만이 아니다. 온 가족이 매달려 운전을 비롯해 식사, 캐디 등 뒷바라지에 최선을 다한다. 또한 조기교육을 통해 선수들이 뼈를 깎는 훈련과 열정, 성실함, 정신력으로 중무장하고 있다. 여기에 국가대표 훈련 시스템도 한몫을 한다. 1986년 서울아시안게임을 앞두고 대한골프협회가 만든 이 시스템은 한국 여자골프를 세계 최강으로 끌어올리는 데 지대한 역할을 했다.

 

반면 그동안 선수들이 마음껏 훈련하고 기량을 쌓는 데 있어 기업의 지원이 너무 과소평가된 것 아닌가 싶다. 한국은 사실 골프를 하기에 열악한 조건을 갖고 있다. 여전히 골프장은 중과세에 시달리고 있고, 비싼 그린피로 인해 선수들은 미국처럼 마음 놓고 운동할 수 있는 공간이 부족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주니어 시절부터 부모의 엄청난 희생과 선수의 노력으로 ‘높은 벽’을 넘는다. 여기에 기업이 물심양면으로 돕는다. 기업은 자사 홍보 효과를 바라고 선수들을 지원하고 대회를 창설해 운영하겠지만, 골프에 대한 기업의 보이지 않는 열정이 한국 선수들을 세계적인 스타로 키워가고 있는 것이다.

 

 

골프단 창단해 팀 운영하는 기업 많아져

 

물꼬를 튼 것은 삼성과 박세리다. 삼성은 수백억원을 쏟아부으며 박세리를 후원했다. 박세리의 가능성을 보고 투자한 것이다. 삼성은 미국과 한국에서 대회를 만들었다. 이것이 도화선이 됐다. 박세리는 든든한 삼성을 믿고 경기에만 전념해 한국여자프로골프(KLPGA)투어 8승, LPGA투어 25승을 거두며 ‘세리키즈’를 양산했다.

 

삼성의 노력으로 프로골프계가 발전하면서 기업들은 앞다퉈 대회를 열고, 선수들을 후원하기 시작했다. 선수들의 기량이 늘 수밖에 없는 구조로 변화한 것이다. 기량은 선수 몫이다. 이와 함께 중요한 것이 개인의 ‘멘털’이다. 기업들이 대회를 만들고, 선수들을 후원하면서 돈 걱정을 안 하고 운동에만 전념할 수 있게 된 것은 엄청난 혜택이 아닐 수 없다. 주머니가 두둑하면 그만큼 마음이 편해진다는 얘기다. 마음이 안정돼야 골프가 잘된다. LPGA투어에서 1년간 투어를 뛰려면 1억원 이상은 족히 들어간다. 만일 스폰서가 없다고 생각하면 미국으로 건너가는 일은 공염불에 그칠 수밖에 없다.

 

국내 기업은 묘하게도 골프장을 운영하면서 대회를 만들고, 선수들을 후원하는 기업이 적지 않다. LPGA투어가 34개로 월드투어 형태지만 한국은 일본 다음으로 대회가 많다. KLPGA 정규투어가 30개나 된다. 여기에 2·3부 투어도 매주 열린다. 선수는 대회가 많아야 연습량이 늘고 기량이 향상된다.

 

국내에서 대회와 선수를 지원하는 기업은 다양하다. 현대차, 한화, 롯데, 기아차 등 대기업부터 삼천리, 삼일제약, 호반건설 등 중견기업까지 수십 개 기업이 선수들을 후원한다. 특히 수혜자는 리우올림픽 금메달리스트 박인비(29)다. KB금융그룹을 만나면서 날개를 달아 LPGA투어에서 18승을 거뒀다. ‘인비천하’를 만들면서 ‘인비키즈’가 쑥쏙 자라고 있다.

 

기업들은 개인보다는 아예 골프단을 창단해 팀으로 움직이는 곳이 많다. 개인 운동임에도 불구하고 팀으로 운영해 시너지 효과를 보고 있는 것이다. 한화를 비롯해 롯데, 비씨카드, 문영그룹, 동아회원권그룹, KB금융그룹, 호반건설, NBNK금융그룹, 삼천리, 볼빅, 교촌F&B, 골든블루 등이 골프단을 운영하고 있다.

 

세계여자골프랭킹 1위 유소연이 LPGA투어 2승을 거둔 후 트로피를 들고 기뻐하고 있다. © 사진=AP연합

한화와 롯데, 그리고 KEB·하나금융그룹이 대회뿐 아니라 아낌없이 선수 지원을 하고 있다. 롯데는 LPGA투어 1개, 국내에서 2개 대회를 치르며 김효주(22), 최혜진(18) 등 7명의 선수들을 지원하고 있다. 한화도 국내에서 최고의 상금액인 14억원의 대회를 치르는 한편, 김인경(29) 등 7명의 선수들을 지원한다. KEB·하나금융그룹은 이전에 CJ그룹에서 하던 LPGA투어를 국내에서 개최하며 국내 선수들이 미국으로 직행하는 ‘브리지 역할’을 하고 있다. 하나금융그룹에서 후원을 받다가 메디힐로 갈아탄 유소연은 LPGA투어 5승, KLPGA투어 9승을 올리면서 10주째 세계랭킹 1위를 달리고 있다. 넵스의 후원을 받다가 하이트진로로 옮긴 고진영(22)은 KLPGA투어 8승을 올리고 있다. 하이트진로는 일본으로 진출한 전미정(35), 김하늘(29), 이지희(38) 등을 후원했다.

 

LPGA투어에서 기업들의 후원을 받는 선수들은 대부분 이미 기량이 검증된 선수들이다. 하지만 우리 기업들은 미래를 보고 선수를 후원하는 곳이 적지 않다. 외국에 진출해 ‘아메리카 드림’을 이루고, ‘코리아 브랜드’를 알리며, ‘외화벌이’에도 한몫하고 있는 한국 여자프로들. 보다 많은 기업들이 선수 지원에 나선다면 한국 골프의 미래는 밝을 수밖에 없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