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 빛낸 악성 '우륵' 출신지 부각시키는 의령군
  • 김도형 기자 (sisa517@sisajournal.com)
  • 승인 2017.08.16 1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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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령 부림설' 학계 정설 앞세워 우륵 브랜드화 작업도 '한창'

 

가야사 연구와 복원이 국정과제로 부각되고 있는 가운데, 경남 의령군에서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전통 현악기인 가야금을 만든 인물로 일컬어지고 있는 우륵(于​勒)에 대한 재조명 작업이 한창이다.

 

의령군이 운영하는 의령박물관은 여러 학설이 대립하고 있는 우륵의 출신지에 대한 사료 정리에 나서는 한편 우륵을 앞세운 지역 브랜드화 작업에도 나서고 있다.

 

가야사를 포함한 삼국시대 기록은 고려시대에 김부식에 의해 편찬된 삼국사기에서 처음으로 나타난다. 삼국사기는 통일전쟁에서 승리한 신라중심의 기록으로 통일전쟁에서 밀려난 고구려나 백제는 신라에 비해 기록의 대상이나 내용이 매우 제한적이다. 특히 삼국에 밀려 있던 가야의 경우는 말할 나위 없다.   

 

때문에 우륵의 출신지를 둘러싼 모호함도 이러한 시대적 상황과 무관치 않다는 게 의령박물관의 설명이다. 

 

우리나라의 3대 악성(樂聖)중 한 분인 우륵의 영정. Ⓒ 의령군청 제공

 

우륵은 6세기 중엽께 신라로 건너가 가야금과 우륵 12곡을 전한 것으로 전해져 온다. 12곡의 제작과 신라로 망명한 시기, 동기에 대해서는 학자들 사이에서 논쟁거리다.

 

  

'우륵 출신지=의령 부림면' 학계 정설로 자리잡아 

 

출생지에 대해서는 국내외 학계에서 의령 부림설(說)이 가장 많은 지지를 얻고 있으며, 학계의 정설로서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충북 제천 청풍지역이라는 일부 학설이 존재하지만 제천 지역은 가야 영역 내에 포함된 적이 없어 설득력을 크게 얻지 못하고 있다는 게 의령박물관의 얘기다. 
 
현재 의령 부림면 지역이 옛 지명인 신이현과 기록에 나오는 성열현(省熱縣) 사이에 음상사(音相似·글은 다르나 음이 비슷)할 뿐 아니라 644년 삼국사기 전쟁기사의 전투 범위의 위치 등에서도 맞아 떨어진다.
 
의령박물관 김상철 학예연구사는 "562년 대가야가 신라에 멸망되기 이전에 의령의 부림일대가 신라에 복속됐을 것"이라며 "그 시기는 우륵이 신라로 투항한 551년경으로 추정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현재 정설로서 국내외에 인정을 받고 있는 부림설이 가장 개연성이 높다고 할 수 있다"며 "나머지 설들은 대부분 기본적인 가야사 및 신라사의 전개과정에서 벗어나거나 사료의 잘못된 해석으로 그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다는 게 전문가들의 주장"이라고 말했다.​ 

 

폭포 수가 떨어지는 숲속의 바위에 가야금을 들고 올라서 우륵의 위대함을 느끼고 있다. Ⓒ 김도형 기자

 

 

'음악의 성인' 우륵, 생사 연대 확인 안돼 

 

가야의 우륵과 고구려의 왕산악 그리고 조선시대의 박연, 이 세 사람은 우리나라의 3대 악성(樂聖)이라고 일컬어진다.

 

우륵은 생몰(生沒) 연대를 알 수가 없고  대가야의 악사가 되기까지의 과정도 전혀 알려지지 않고 있다. 신라 망명 이후의 행적도 국원(國原·충북 충주의 신라시대 지명)에 안치된 것 말고는 전하는 바가 없다.

 

다만 그간의 연구 성과를 토대로 기록된 사료에 살을 더 붙여 우륵의 삶을 더듬어 보면 우륵은 경남 의령 지역의 가야출신으로 5세기 말엽에 태어나서 6세기 초엽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후기가야의 맹주국 대가야 가실왕의 부름을 받고 우륵 12곡을 제작한 것으로 전해져 온다. 

 

이후 우륵은 후기가야의 맹주국인 대가야가 신라와 결혼동맹을 맺은지 7년 만인 529년에 동맹을 깨고 친 백제, 반 신라 정책을 취하자 자신의 입지와 역할에 한계를 느끼고 제자 이문과 함께 신라로 망명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김상철 학예연구사는 "당시 우륵이 정치적 혼란과 당시 시대적 상황에 맞물러 의령에서 태어나 전 일생을 보낸 것이 아니기 때문에 꼭 의령만의 인물이라고 고집할 필요는 없다​"며 "하지만 의령이 우륵을 배출한 지역임엔 틀림없는 사실"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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