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혜경의 시시한 페미니즘] 축구하는 남자아이와 청소하는 여자아이
  • 노혜경 시인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7.08.16 10:57
  • 호수 1452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그리고 정치적 중립의무 위반

 

서울시 송파구에 위례별초등학교라고 있단다. 서울시교육청은 성평등 교육을 위한 교사들의 페미니즘 공부모임을 지원하고 있는데, 이 학교에서도 이에 부응해 21명의 교사가 ‘방과 후 페미니즘 동아리’를 결성해 공부를 하고 있단다. 이들 중 한 명인 최현희 교사가 온라인 매체 ‘닷페이스’의 ‘우리 선생님은 페미니스트’라는 코너에 출연해 아래와 같은 이야기를 했다.

 

“왜 학교 운동장엔 여자아이들이 별로 없고 남자아이들이 주로 뛰놀까? 이상하지 않아요?”란 질문에서 시작해 페미니즘은 인권문제이고, 또 아이들에게 페미니즘적으로 질문하다 보면 공교육의 중요한 목표인 비판적 사고능력이 길러진다는 이야기, 아이들은 가정이나 사회나 미디어에서 여성혐오를 체화하는데 그게 어떤 의미라고 가르쳐주는 사람이 없다는 이야기, 그대로 사회에 나가면 차별을 하거나 당하는 사람으로 자랄 거라는 이야기였다.

 

 

‘페미니즘 교육’ 교사에게 쏟아진 비난

 

나무랄 데 없는 얘기였지만, ‘운동장에서 뛰노는 남자아이’는 충격이었다. 내게는 딸이 하나 있는데, 그 딸이 초등학교를 다닌 무렵은 지금으로부터 거의 이십여 년 전이다. 하루는 학교에서 돌아온 아이가 잔뜩 화가 나서 담임교사를 비난하기 시작했다.

 

“선생님 나빠. 청소시간인데, 남자아이들에게 나가서 축구하라고 하고는 여자아이들에게만 청소시켰어.” “번갈아 당번 하는 거 아니야. 맨날 그래.” “남자애들은 뛰놀아야 하고 여자애들은 얌전해야 하는 게 세상에 어디 있어?” 딸아이가 쏟아낸 분노의 목록은 아주 길었다.

 

이십여 년 전의 여자아이들이라고 성차별에 결코 둔감하지 않다는 것을 나는 내 딸의 경우를 통해 잘 알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성차별을 예민하게 느끼게끔 해 주던 교사들 중엔 여성들도 많았다는 것도 잘 기억하고 있다. 세상은 그래도 전진해서, 그때의 성차별에 분노하던 소녀들이 자라 최현희 선생님 같은 교사가 됐지만, 아직도 학교 교육현장에서는 ‘축구하는 남자아이와 청소하는 여자아이’가 당연시되나 보다. 그렇다고 이 분노가 설마 남자아이가 청소를 하고 여자아이가 축구를 하면 해소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라 믿는다.

 

여성이 피해자인 사건을 바라보는 시선은 여전히 남성중심적이다. © 사진=연합뉴스

그런데 저 이야기를 실제로 그렇게 알아들은 사람도 많았던가 보다. 짧은 동안이지만 최 교사에 대한 온갖 공격이 난무하고 신상털기까지 시도됐단다. 이 동영상을 소개한 기사들에 달린 반대댓글을 살펴보니 댓글 다는 사람들의 페미니스트에 대한 반감의 수위가 아주 높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가장 놀랍게 느껴지는 공격은, 교사가 페미니즘 이야기를 하는 것은 정치적 중립의무 위반이라는 주장이다.

 

정치적 중립의무란, 각축하는 정치세력 간의 다툼에서 어느 한쪽을 편드는 것이고 실제로는 특정 정당을 지지하는 행위다. 페미니즘을 가르치는 것은 특정 정당을 편드는 일과 아무 상관없고, 따라서 정치적 중립의무에 해당되지 않는다. 심지어 정치적이라는 말의 일반적 용법에 비춰보면 결코 정치적이지 않다. 오죽하면 페미니스트들이, 여성이 일상에서 겪는 온갖 사소한 개인사들이 알고 보면 가장 정치적이라는 주장까지 할까.

 

페미니즘적 이슈를 담고 있는 어떤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이런 터무니없는 언어 사용을 몹시 자주 보게 된다. 강남역 살인 사건에 등장한 조현병, 왁스숍 살인 사건에는 심지어 ‘생활고’라는 고전적 어휘까지 등장한다.

 

 

‘여성 사건’에 대한 본질 벗어난 시선

 

이 언어들에는 일정한 패턴이 있다. 일종의 ‘묻지마 살인’에 해당하는 강남역 사건의 경우, 피해자가 왜 여성일 수밖에 없었던가라는 이야기를 하면 남성중심사회에 대한 비판을 하지 않을 수가 없으므로 가해자를 이상심리의 소유자로 만들어서 축소한다. 일명 조현병. 왁싱숍 사건의 경우도 왜 하필 여성이 일하는 곳을 노렸으며 성폭력을 시도했나를 말하면 이 또한 남성중심주의적 범죄구조에 메스를 들이대야 하므로 가해자 개인의 사정 중 특수한 사정으로 원인을 축소한다. 일명 생활고. 조현병 환자면 모두 잠재적 살인자이고 생활고에 시달리면 모두가 강도살인을 할까. 개별화되고 파편화된 이런 사건들을 관통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인 여혐범죄라는 본질을 외면하고자 또 다른 약자집단을 공격하는 것이다. 아픈 사람과 가난한 사람.

 

그렇다면 위례별초등학교 선생님을 공격하는 언어로 왜 정치적 중립의무가 등장할까. 이 또한, 해당 선생님이 전교조 교사 또는 그에 준하는 ‘삐딱한’ 교사일 것이란 암시다. 감히 기득권의 남성중심적 사고방식에 이의를 제기했다는 말 대신 전교조에 가해지는 정치적 중립의무 위반이라는 위협을 끌어다 사용한 것일 뿐이다. 이 경우 여성인 최 교사가 가해자로 간주된다는 것만 다를 뿐, 사건을 발생시킨 그 사람 개인의 또는 소수집단의 문제라고 주장한다는 점에서는 똑같은 패턴이다. 이런 태도와 방식을 가리켜 나는 ‘분할통치’라는 말을 자주 사용한다. 당사자를 고립시키면 억압하기가 아주 쉽다. 시위를 진압하는 경찰들도 이런 방법을 쓰곤 한다. 일명 토끼몰이.

 

이런 일이 발생하는 이유는, 아이들에게 성평등 교육, 다른 말로 하면 페미니즘 교육을 어렸을 때부터 함으로써 인권의식 있고 당당한 어른으로 길러내자는 말을 남성기득권에 대한 공격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페미니즘을 왜 남자에 대한 공격으로 받아들이는지는 모르겠지만, 남성기득권적 태도에 이의를 제기하면 무조건 싫다는 말이나 다름없다. 이것이 얼마나 말이 안 되는가 하면, 어릴 적엔 여자아이들이 힘이 더 세서 남자아이들이 맞을 수도 있는데, 이때 얻어맞는 남자아이들은 그럼 어떻게 자아존중감을 지닐 수 있을까. 사람은 서로 때리면 안 된다는 것이 페미니즘 교육이라면, 남자가 여자를 때리면 안 된다는 건 기존의 교육일 것이다. 이 말은 곧 힘센 남자아이는 힘 약한 여자아이에게 맞아서는 안 된다는 말을 품고 있으니 말이다.

 

드라마 《공항 가는 길》에서 “왜 여자는 축구부가 될 수 없다는 거야”라며 울부짖던 효은이를 떠올리며, 이런 것을 지적하는 일이 정치적 중립의무 위반이라는 주장에 짐짓 눙치며 대답해 본다. 그러게, 모든 일상적인 일이 알고 보면 정치적이야. 페미니즘에 대해 일부가 느끼는 두려움, 바로 그것이 정치적이야. 페미니스트로 간주되는 사람을 향한 적대적이고 공격적인 언행, 바로 그것이 정치가 해결해야 할 사회적 문제야. 이 일에 아무런 반응도 안 한다면, 그건 정치적 행동의무 불이행이야. 학교에서의 성평등(젠더) 교육이 이 모든 것을 해결할 열쇠는 아니지만, 해결을 시작할 첫단계라는 것을 이번 사건은 보여주고 있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