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색조 매력, 구속 싫은 ‘기부천사’ 김인경
  • 안성찬 골프칼럼니스트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7.08.14 10:33
  • 호수 1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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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PGA 최다승자 ‘자유로운 영혼’ 김인경

 

“우리는 때로 실수할 수 있다. 그러나 실수를 저지른 과거에 멈춰서는 안 된다. 실수를 통해 더 좋은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다고 생각하고 싶다.”

 

10년이 걸렸다. 김인경(29·한화)이 메이저대회에서 우승하기까지. 골프 마니아들이 그에 대해 기억하는 것은 무엇일까. 29cm의 퍼팅 실패가 뇌리에 깊숙이 남아 있다. 2012년 미국여자프로골프(LPGA)투어 시즌 첫 메이저 대회 크래프트 나비스코 챔피언십 최종일 경기다. 18번홀에서 비록 버디는 놓쳤지만 파만 해도 이기는 게임이었다. 

 

그런데 야속하게도 볼은 홀을 휘돌아 나왔다. 아마추어 골퍼들이 흔히 컨시드(OK)를 주는 거리다. 그냥 툭 대면 들어갈 퍼트가 들어가지 않은 것이다. 결국 유선영(31·JDX멀티스포츠)과 동타를 이뤄 연장전에서 졌다. 김인경은 말도 안 되는 이 사건(?)으로 오랜 시간 침체의 늪에 빠져야 했다.

 

김인경이 8월6일(현지 시각) 브리티시 여자오픈 골프대회에서 우승한 후 트로피를 들고 활짝 웃고 있다. ©사진=AP 연합

 

슬럼프 기간 동안 그는 마음을 다잡기 위해 불교에 귀의했다. 인도네시아 단식원까지 찾아 수양했다. 그런 뒤 5년이 지났다. 김인경은 8월7일 스코틀랜드 세인트앤드루스 인근 킹스반스 골프클럽(파72·6697야드)에서 열린 LPGA투어 리코 위민스 브리티시오픈에서 합계 18언더파 270타로 정상에 올랐다. 그런데 기쁨이든 슬픔이든 우승한 뒤 김인경은 눈물을 보이지 않았다. 2012년 일에 대해서도 마치 남의 일처럼 담담하게 얘기했다.

 

 

LPGA투어 Q스쿨 수석 합격

 

“길에서 처음 만난 사람도 그 얘기를 묻고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 그러나 짧은 퍼트를 놓치는 건 인생 최악의 사건이 아니다. 대신 그 일 때문에 1m짜리 퍼트도 당연한 게 아니라고, 오히려 넣으면 행복하게 생각한다. 그게 오늘 내가 1위로 끝낸 이유라고 생각한다.”

 

묘하게도 그는 루키 시절에 2012년과 같은 일을 겪었다. 상황은 조금 다르지만 다 이긴 경기를 막판에 놓쳤다. 2007년 웨그먼스 LPGA 대회에서 마지막 17, 18번홀을 남기고 2위를 3타나 앞서 선두를 달렸다. 우승을 코앞에 뒀다. 그런데 당시 세계여자골프랭킹 1위인 로레나 오초아(멕시코)에게 역전패를 당했다. 

 

그날 그는 “지금 울 수도 있지만 울지 않겠다. 나는 랭킹 1위 선수와 잘 싸웠다. 그리고 값진 경험을 얻었다. 앞으로 나의 많은 우승을 보게 될 것이다”며 스스로 마음을 달랬다. 그는 2010년 로레나 오초아 인비테이셔널에서 우승한 뒤 상금 전액을 오초아 재단에 기부했다. 이 기부금은 학교를 짓는 데 사용돼 멕시코에 김인경의 이니셜 ‘IKK’ 이름으로 학교가 설립돼 있다. 아름다운 기부였다.

 

김인경은 주니어 시절부터 잘나가던 선수였다. 2005년 홀로 미국으로 건너가 미국 주니어대회에서 우승을 하기도 했다. 그리고는 2006년 LPGA투어 Q스쿨에 수석 합격했다. 이듬해 롱스 드럭스 챌린지에서 첫 우승을 거둔 데 이어 2009년 LPGA 스테이트 팜 클래식, 2010년 로레나 오초아 인비테이셔널에서 우승했다. 2012년 크래프트 나비스코 최종일 연장전에서 진 뒤로 장기간 슬럼프에 빠졌다가 지난해 9월 유럽여자프로골프(LET)투어 ISPS 한다 레이디스 유러피언 마스터스에서 44개월 만에 우승하며 부활의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이것으로 반전의 분위기를 만든 김인경은 10월 중국에서 열린 LPGA 레인우드 클래식에서 정상에 오르며 제2의 전성기에 오를 발판을 마련했다. 올 시즌 숍라이트 클래식, 마라톤 클래식에서 우승한 데 이어 이번 대회에서 시즌 최고의 기량을 발휘하며 승수를 추가했다. 김인경은 시즌 3승으로 2승을 거둔 유소연(27·메디힐)을 제치고 최다승자에 올랐다.

 

 

‘비틀스 볼 마커’가 행운의 부적

 

기록만 보면 그다지 특별한 점이 없다. 그럼에도 우승한다. 나이가 들면서 거리도 더 늘었다. 드라이브 평균거리는 249.37야드로 106위, 페어웨이 안착률은 75.68%로 48위, 그린적중률 73.90%로 20위, 평균퍼팅수는 29.44개로 32위, 샌드세이브는 60%로 6위, 평균타수는 69.79타로 8위다. 이런 기록으로 세계여자골프랭킹 9위에 올라 있다. 올 시즌 벌어들인 상금은 108만5893달러로 4위, 2007년부터 획득한 누적상금은 865만3477달러다.

 

김인경이 숍라이트 클래식 2라운드 8번홀에서 티샷을 하고 있다. ©사진=AP 연합

 

그는 LPGA에서 활약하는 선수들과 조금 다른 구석이 있다. 구속을 싫어한다. 최대한 자유롭게 살려고 한다. 이 때문에 스폰서도 딱 한 군데만 고집한다. 한화그룹이다. 그 어디에도 서브스폰서 로고가 없다. 주렁주렁 서브스폰서 광고판을 달고 다니는 일부 선수들과는 다르다. 톱스타이면서도 옷 지원도 받지 않는다. 좋아하는 브랜드가 있으면서도 절대로 옷 회사와 계약을 하지 않는다. 자신이 입고 싶은 옷을 사서 입기 위해서다. 옷 지원을 받으면 원하는 옷을 입을 수 없기 때문이란다. 특히 스폰서가 많으면 많을수록 돈은 좀 더 챙길지 몰라도 스폰서 기업의 행사 등에 얼굴을 비쳐야 하는 등 ‘돈값’을 해야 한다는 것이 부담스럽다는 얘기다.

 

그는 책과 음악을 좋아한다. 그리고 다른 나라의 언어를 배우길 즐긴다. 원어로 책을 보고 싶기 때문이다. 4살 때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지만 중간에 그만뒀다. 클래식도 좋지만 재즈가 더 마음에 끌렸기 때문이다. 유독 그는 비틀스를 사랑한다. 영국에서 우승한 것도 큰 의미를 갖는다. 비틀스의 나라이므로. 그린에서 볼을 마크할 때 쓰는 볼 마커에도 비틀스 사진이 들어 있다. ‘비틀스 볼 마커’는 그에게 행운의 상징이다. 모자에 달려 있는 이 마커는 그에게 큰 힘을 주고 있다. 지난 7월 미국 오하이오주에서 열린 LPGA투어 마라톤 클래식 때부터 비틀스 볼 마커를 달고 플레이를 하고 있다. 그는 “친구가 선물로 줬는데 행운의 부적 같은 역할을 하고 있는 것 같다. 그때부터 퍼트가 홀로 잘 떨어지기 시작했다”고 밝혔다.

 

그는 마음이 따듯한 선수다. 주변에서 ‘기부천사’로 부른다. 우승상금 전액 기부는 물론 2012년부터 지적발달 장애인을 위한 스페셜 올림픽의 홍보대사를 맡았고, 10만 달러를 쾌척하기도 했다.

 

“우승은 절대로 혼자 만들어낼 수 없다. 체력과 정신적인 면 같은 모든 부분에서 도움을 받아야 한다. 이번 우승으로 힘든 과정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북돋아주고 싶다.”

 

브리티시 오픈에서 우승한 뒤 2주간 대회가 없는 틈을 타 매니저와 유럽 여행을 떠난 김인경이 앞으로 팬들에게 어떤 모습으로 다가올는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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