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몰카’가 지배하는 사회
  • 남인숙 작가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7.08.11 16:00
  • 호수 1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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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 필자가 거의 유일하게 좋아했던 액션 영화는 스파이 영화였다. ‘꼭 살아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며 가족의 사진을 보여주던 전우는 반드시 죽는 전쟁 영화, 조직폭력배를 다루면서 한없이 비장한 느와르 영화, 유치하게 느껴지던 히어로 영화 등과는 달랐다.

 

최첨단 장비를 이용하는 지적인 스파이는 피로 칠갑을 하지 않고도 우아하게 악의 세력을 물리쳤다. 그들이 영화에서 첩보활동을 위해 사용하던 장비들은 우리 상상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이었다. 첩보원의 시야를 그대로 촬영하고 전송하는 안경, 아무도 눈치 챌 수 없는 만년필형 초소형 카메라, 범죄자의 위치를 추적하는 비행 스파이 카메라 등은 스파이들이 시원시원하게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게 해 주는 영리한 도구였다.

 

그런데 이제 그 시절 영화에서나 볼 수 있던 스파이 장비들이 일상에서 흔하게 언급되고 쉽게 구할 수 있는 것이 되었다. 특히 영화가 아닌, 뉴스에서 너무 자주 봐서 친근하게 느껴질 정도다. 또 한 가지 달라진 점은 그 장비들이 이야기될 때 거의 함께 언급되는 단어가 생겼다는 것이다. 바로 ‘몰카’다.

 

시계, 안경, 라이터 등으로 위장한 다양한 몰카장비들 © 사진=연합뉴스

 

며칠 전부터는 드론을 이용한 신종 몰카범의 출현으로 SNS가 시끌시끌하더니, 급기야 공중파 방송 뉴스에까지 등장하게 되었다. 카메라를 단 드론이 해수욕장에 설치된 지붕 없는 탈의실 위를 비행하며 촬영하는 것이 목격되었지만, 경찰 신고는 묵살되었고 당연히 범인도 잡히지 않았다. 불과 3년 전만 해도 드론은 연구개발과 상용화의 경계에서 무궁무진한 꿈과 환상의 대상이었다. 하늘길이 열리면서 새롭게 시도할 수 있는 일들이 많은 이들을 꿈꾸게 했다. 그 많고 많은 활용방법 중 가장 빨리 도입된 용도 중 하나가 하필 몰카라니, 그 방면 범죄자들의 열정과 응용력에 감탄이 나올 뿐이다.

 

드론 이전에도 몰카 범죄자들은 초소형 메모리나 초소형 렌즈 등 첨단기술 발달의 덕을 톡톡히 봤다. 안경, 물병, 볼펜, USB메모리, 그림, 화재경보기, 열쇠구멍 등 어디에도 카메라를 숨길 수 있다. 필자는 이 글을 쓰기 전, 인터넷 검색창에 관련 검색어를 넣어 봤다가 보통의 사람이 얼마나 쉽고, 심지어 값싸게 이런 기상천외한 물건들을 구할 수 있는지 확인하고 깜짝 놀랐다.

 

그러나 이 최신예 장비들을 손에 든 21세기의 호모 파베르(도구의 인간)들은 아직 이게 어떤 의미인지 잘 모르는 것 같다. 몰카 혐의로 고발된 사람들의 변(辯)을 들어보면 예외 없이 ‘장난’ ‘호기심’ ‘억울’이라는 단어들이 등장한다. 자신의 치부가 어느 사이버 공간에서 언제까지 떠돌아다닐지 몰라 평생 불안 속에서 살아야 하는 피해자들에 비해 한없이 가벼운 단어들이다.

 

법은 도덕률에 근거하지만 도덕이 법에 의해 규정되기도 한다. 인터넷에서 아무런 법적 문제 없이 스파이 카메라 장치가 팔리고, 몰래 찍은 영상이나 사진이 무사히 유통되는 것을 본 사람들에게 몰카는 그저 비밀스러운 유희일 수 있는 것이다. 하루빨리 기술에 걸맞은 법이 마련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스파이 도구의 타락 때문인지 이제는 스파이 영화가 재미가 없다. 인간의 상상이 모두 현실로 이루어지고 있는 요즘의 씁쓸한 단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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