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현, 윤희순, 오광심…여성독립운동가를 아시나요
  • 김예린 인턴기자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7.08.11 1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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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독립운동가 발굴하는 ‘초상화 프로젝트’ 기획한 김희선 전 의원

 

1932년 9월 만주 하얼빈. 국제연맹조사단이 일본 침략의 진상을 파악하기 위해 만주에 도착했다. 단장 리틀경이 이끄는 국제연맹조사단은 조선독립운동가로부터 무언가를 전해 받았다. 잘린 손가락 마디와 혈서였다. 혈서에는 ‘조선은 독립을 원한다’(朝鮮獨立願)는 짧은 문장이 적혀 있었다. 혈서를 쓴 독립운동가는 우리에게 생소한 이름일지도 모를 남자현 여사였다. 

 

 

서훈된 독립운동가 중 여성은 2%

 

“만일 너의 생전에 독립을 보지 못하면 너의 자손에게 똑같은 유언을 하며 내가 남긴 돈을 독립축하금으로 바치도록 해라.”

죽기 직전 이런 말을 남긴 남자현 여사는 ‘독립군의 어머니’라는 별명을 갖고 있었다. 영화 ‘암살’에서 배우 전지현이 연기한 독립운동가 ‘안윤옥’의 실제 모델로 알려졌다. 1919년 만 46세에 만주로 망명한 뒤 서로군정서에 가입해 항일무장투쟁을 지원했고, 북만주 일대에 10개의 여자교육회를 세워 여권신장과 자질향상에 주력했다. 1925년 일본의 사이토 마코토 총독 암살 계획에 동참했고 투옥 중인 안창호 선생 등 여러 애국지사들의 옥바라지를 했다. 1932년에는 손가락 두 마디를 잘라 혈서를 쓴 뒤 국제연맹조사단에 보내 조선의 독립 의사를 밝혔다. 1933년 남 여사는 만주국에 주재한 일본 전권대사를 암살하려 하다가 체포됐고 단식 투쟁 끝에 순국했다. 

 

독립운동에는 남녀가 없다. 남자현 여사처럼 목숨 바쳐 저항한 여성도 적지 않다. 반면 국가보훈처에 등록한 독립유공자는 1만4651명에 달하지만 이중 여성은 292명에 불과하다. 비율로 따지면 2%다.

 

매년 8월이 오면 ‘독립’이란 단어가 가슴 시리게 다가온다. 독립운동가들의 재조명도 단골 소재다. 그런데 올해는 새로운 얘기가 전해온다. 단지 잘 알려지지 않았던 여성 독립운동가를 재조명하는 노력이 진행되고 있다. 2014년 출범한 ‘여성독립운동사업회’는 여성독립운동가를 소개하고 발굴해 왔다. 알려지지 않은 이들을 대중에게 전하기 위해 지금은 ‘항일여성독립운동가 초상화 프로젝트’를 준비하고 있다. 김희선 여성독립운동기념사업회 회장은 여성 독립운동가의 역할이 ‘뒷바라지’로 인식돼 온 점을 안타까워했다. 

 

“집에서 가족을 보살피고 돌보는 여성들이 없었다면 독립운동가들이 제대로 항일투쟁을 할 수 있었을까? 태극기를 다 품에 숨겨서 날랐던 사람들도 애기 업은 것처럼 위장해 무기를 옮긴 사람들도 다 여성들이다.”

김희선 여성독립운동기념사업회 회장 © 시사저널 임준선

 

‘외면 받은’ 여성독립운동가 강의를 가득 채운 청중들

 

“윤희순 선생님은 최초의 여성 의병 대장이다. 이미 그때 여성 의병 30명을 조직해서 여성의병가도 작사했다. 최초로 외국에 나가서 독립운동을 했던 김마리아 선생님도 있다. 오광심 선생님은 독립운동과 관련해 회의록을 전부 외워서 다른 지역에다 그대로 옮겼다.” 남성 못지않게 헌신한 여성들의 독립운동은 연성화된 활동이 많다. 그 탓에 모두 뒷바라지로 인식됐다는 점을 그는 안타까워했다. 

 

김 회장은 16·17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그는 광복군 제3지대장을 지낸 김학규 장군의 손녀다. 그의 집안 내력은 의원시절 친일진상규명특별법 개정에 앞장서며 친일파 청산을 위해 노력했던 이유 중 하나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여성이자 독립운동가의 후손인 김 회장도 당시에는 여성독립운동가에 대해서 잘 알지 못했다고 했다. 

 

여성독립운동가에게 관심을 갖게 된 건 4년 전 책을 건네받으면서 부터다.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이 건네 준 관련 서적 6권이 시작이었다. 김 회장은 “책을 읽고 30분 동안 통곡했다. 부끄럽고 억울해서... 역사 속에 묻힌 이분들의 삶을 발굴해 알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일단은 알리는 것부터 시작했다. 알려지지 않은 분들을 소개하는 강의를 준비했다. 5월과 6월,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에서는 여성독립운동가 8인을 소개하는 강의가 매주 열렸다. 사회주의 독립운동가 주세죽과 김알렉산드라, 의열단을 거쳐 조선의용대 활동을 한 박차정, 1932년 상하이 홍커우 의거의 숨은 기획자 이화림 등 역사에서 외면당한 여성독립운동가가 등장했다. “50명 정도를 예상했는데 매 강의마다 130~150명이 꽉 찼다. 작가와 교사, 다큐멘터리 감독, 영화인 등이 찾아왔다.” 놀랄 만한 반응이었다. 

 

“독립운동가와 당시 현장을 연구하는 작업은 중요한데 이를 다루는 사람들은 많이 없다. 특히 독립운동에서 여성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자료가 매우 부족해 강의가 짧을 수밖에 없다”

자료가 부족해 강의가 짧게 끝난 건 매번 아쉬웠다. 김 회장은 “독립운동가와 당시 현장을 연구하는 작업은 중요하지만 이를 다루는 사람들은 많이 없다”고 말했다. 그래서 현장을 직접 답사해 독립운동가들의 흔적을 찾고 발굴해 강의 자료를 만들 계획이다. 조만간 독립군이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던 중국 태항산을 직접 찾아 조사할 계획을 갖고 있다.

 

‘초상화 프로젝트’를 위해 그린 여성독립운동가 초상화. 왼쪽부터 김알렉산드라(신혜원 작가), 주세죽(황선미 작가), 오광심(정삼선 작가), 김마리아(신대협 작가). © 시사저널 임준선

 

자료가 부족해 그리는데 애 먹은 그들의 초상화

 

사업회는 작년 가을께부터 흥미로운 행사를 준비했다. ‘항일여성독립운동가 초상화 프로젝트’다. 서훈된 여성독립운동가 292명, 그리고 서훈되지 못한 무명 여성독립운동가의 초상화를 들고 8월14일 광화문광장에서 서대문형무소 역사관까지 행진한다. 행진이 끝난 뒤에는 역사관에 초상화를 전시하고 독립선언문을 낭독한다. 

 

이번 초상화 프로젝트에는 54명의 작가가 함께했다. “황재형 화백은 강주룡의 을밀대 고공농성 장면을 머리카락으로 그렸다. 박재동 화백 등 여러 선생님들이 참가해줘 감사한 마음에 눈물이 났다.” 초상화의 바탕은 사진이지만 자료가 너무 부족해 애를 먹었다고 했다. 사진이 없으면 문헌 자료와 유가족 유품, 구술 등을 통해서 얼굴을 복원해 갔다. 김 회장은 “사진이 없는 대신 모습이라도 보여드릴 수 있도록 이미지를 깃발과 액자에 새겼다. 서훈되지 못하신 분들이지만 우리가 기억해야 한다는 취지다”고 설명했다. 

 

초상화 프로젝트가 끝나도 여성 독립운동가를 발견하는 건 계속된다. 다음 번에는 우리 주변에서 찾는다. 김 회장은 “독립운동을 했다고 하면 괜히 빨갱이 취급을 받을까 말을 안 할 뿐이다. 내 어머니나 할머니 중에도 독립운동을 했던 분들이 많다”고 말했다. 역사 속에 묻혀 있는 그들의 삶을 수면 위로 끌어 올려 후대에 전하는 활동은 앞으로도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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