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인원 통해 ‘인간의 조건’을 말하다
  • 이은선 영화 저널리스트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7.08.10 14:35
  • 호수 1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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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과 유인원의 경계가 그 어느 때보다 모호하게 그려진 《혹성탈출: 종의 전쟁》

 

“No!” 인간에게 저항하는 유인원(類人猿) 시저(앤디 서키스)의 한마디는 강렬했다. 인간만의 것이라 여겨졌던 사고(思考)와 언어, 그리고 위엄이 하나로 강하게 응축돼 나온 외마디였다. 《혹성탈출: 진화의 시작》(2011, 이하 《진화의 시작》)을 시작으로 이 프리퀄 시리즈는 시저와 유인원이 그랬듯 계속해서 진화를 거듭했다. 그리고 마침내 프리퀄 3편 《혹성탈출: 종의 전쟁》(이하 《종의 전쟁》)은 인간과 유인원 사이의 끝나지 않은 전투, 그 봉합되지 않는 갈등 사이에서 어떤 결론을 내리며 대단원을 마무리한다. 《혹성탈출》 프리퀄 시리즈는 그 어떤 영화보다 깊이 있게 ‘인간의 조건’을 이야기했다는 점에서 블록버스터 시장 안에서도 단연 두드러지는 콘텐츠였다. 또 하나, 배우의 영역 확대 및 스토리를 둘러싼 상상력에는 한계가 없다는 것에 대한 유의미한 실험이기도 했다. 그 분야에 있어서 우리는 오래도록 이 3부작을 거론해야 할 것이다.

 

© 사진= (주)이십세기폭스코리아 제공​

 

유인원의 진화, 그리고 인간의 퇴화

 

프랭클린 J 샤프너 감독의 《혹성탈출》(1968)은 영화 역사상 가장 충격적인 반전으로 손꼽히는 결말을 내놨다. 새로운 행성을 찾아 떠났던 우주비행사들이 어느 이름 모를 행성에 추락하고, 이들은 곧 이 행성이 문명을 이룬 유인원들이 지배하고 있는 곳임을 깨닫는다. 이곳에서 비문명적이고 수동적인 인간은 유인원의 가축에 불과하다. 유인원들에게 붙잡혔던 비행사 테일러(찰턴 헤스턴)는 갖은 고생 끝에 탈출하지만, 이내 이 행성이 핵전쟁 이후 황폐해진 미래의 지구라는 것을 깨닫고 충격에 빠진다.

 

이 영화의 흥행 성공 이후, 4개의 속편과 반전까지 똑같이 재연한 팀 버튼 감독의 리메이크작까지 나왔으나, 모두 원작의 아성(牙城)을 따라잡긴 무리였다. 이에 이십세기폭스는 《진화의 시작》(2011)을 필두로 한 프리퀄 시리즈를 새롭게 계획했다. 《혹성탈출》 시리즈가 쌓아온 거대한 이야기의 시작인만큼 프리퀄이 가져가야 할 질문 역시 명확했다. 유인원은 어떻게 인간을 지배하게 됐는가. 《진화의 시작》에서부터 이 과정은 충실하게 풀이된다. 치매 치료를 위해 신약을 개발 중인 인간들은 침팬지들을 대상으로 생체 실험을 진행하고, 이 과정에서 약의 성분이 침팬지의 지능을 높일 수 있음이 드러난다. 실험실에 갇힌 침팬지가 낳은 시저는 어릴 때부터 지능이 남다르다. 반면 인간에게는 이 성분이 치명적. 이내 시미안 플루라는 바이러스가 창궐해 인류를 위협하고, 시저는 유인원들과 무리를 형성한다.

 

중요한 건 이 프리퀄 시리즈가 애초에 원작으로의 단순 수렴이 아닌 새로운 오리지널을 표방했다는 점이다. 3편 《제3의 인류》(1971)와 4편 《노예들의 반란》(1972)은 미래에서 과거의 지구로 시간여행을 떠난 유인원 박사 부부의 아들(시저)로부터 진화가 시작된 것으로 풀이한다. 그러니까 프리퀄 3부작은 단순히 과거로 돌아간 것이 아니라 고전 시리즈의 타임라인과는 별개로 이야기를 쌓아가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시간 배치로 보면 프리퀄이지만, 엄밀히는 리부트에 가까운 방식이다.

 

《종의 전쟁》에 이르면 시미안 플루로 인해 인류의 상당수가 사라진 상황이다. 프리퀄 2편 《혹성탈출: 반격의 서막》(2014)에서 유인원과 인간은 공존을 모색하려 했지만 평화는 깨졌다. 시저는 종족을 지키기 위해 전쟁을 불사해야 한다. 시저는 참호 기습 공격을 받고 아내와 큰아들을 잃었다. 그가 인간 사령관을 향해 복수심을 불태우며 무리를 이탈한 사이, 새로운 터전을 향해 이동하던 유인원들은 군인들에게 모조리 잡혀 노예처럼 이용당하고 있다. 종족의 리더로서, 동시에 사적 복수심에 불타는 존재로서 시저의 고뇌는 깊어만 간다.

 

유인원의 진화, 그리고 이에 반비례하는 인간의 퇴화. 이번 편의 핵심이다. 시저는 이제 인간의 언어로 의사소통하는 데 무리가 없는 수준이 됐다. 반면 시저가 복수를 향해 가는 길에 우연히 만나 동행자가 된 인간 소녀는 언어를 잃었다. 고전 시리즈가 급속도로 발전하는 과학 문명의 그늘을 경고했다면, 이번 프리퀄 시리즈는 그와는 다른 질문을 던진다. 특히 《종의 전쟁》에 이르면 좀 더 명확해진다. 인간의 자격은 무엇인가. 발달의 정도에 차이가 있을 뿐 종(種)의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문화, 지능과 사고는 인간만의 고유한 것이 아니다. 언어 또한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인간다움은 무엇에서 비롯되나. 인간이 인간일 수 있는 자격은 무엇인가. 인간과 유인원의 경계가 그 어느 때보다 모호하게 그려진 《종의 전쟁》은 이 모든 철학적 질문에 기초해 단단하게 세워진 드라마다.

 

 

앤디 서키스를 아카데미 후보로 인정할 것인가

 

1968년부터 이어진 고전 시리즈가 제작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특수분장계의 전설 릭 베이커 덕분이었다. 이 시리즈의 도전은 예전부터 지금까지 ‘인간의 지능을 지닌 유인원을 어떻게 진짜처럼 만들어 낼까’에 첫 방점이 찍혀 있다. 2001년 팀 버튼의 리메이크까지만 해도 배우들이 릭 베이커의 손을 빌려 탄생한 인형 탈을 뒤집어쓴 채 연기해야 했지만, 이후 CG 기술은 비약적으로 발전을 거듭했다. 피터 잭슨 감독과 디지털 시각 효과 스튜디오 웨타 디지털이 선보인 《반지의 제왕》(2001~2003)과 《호빗》(2012~2014) 시리즈를 필두로 디지털 캐릭터와 실사 캐릭터의 경계는 점차 흐릿해졌다. 《혹성탈출》이 새롭게 시리즈를 시작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됐던 셈이다.

 

그리고 앤디 서키스가 있다. 《혹성탈출》 시리즈에서 시저를 연기한 영국 배우다. 잘 알려졌듯 그는 《반지의 제왕》과 《호빗》 시리즈에서 골룸을, 《킹콩》(2005)에서 콩을 연기했다. 배우의 얼굴과 움직임을 그대로 따 디지털 캐릭터에 입히는 퍼포먼스 캡처 연기 기술에서 그는 선구자의 반열에 올라 있다. 서키스는 다시 한 번 그의 경력에 날개를 달았다. 아기 침팬지부터 리더가 되어 종족을 이끄는 모습까지 한 존재의 성장을 연기하며 서키스는 캐릭터에 남다른 깊이를 부여했다. 그리고 우리는 그를 통해 일반 영화 의상을 입든, 캡처를 위한 수트를 입든 배우의 핵심은 캐릭터를 어떻게 해석하고 표현하는지에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존재를 창조하는 일 역시 배우의 영역에 있다는 것 역시.

 

《혹성탈출》 시리즈는 퍼포먼스 캡처 연기를 펼치는 배우들이 세트장의 블루 스크린을 벗어나 야외에서도 촬영이 가능한 수준까지 기술을 끌어올렸다. 배우들이 착용하는 헤드기어에 달린 초소형 카메라는 배우들의 눈동자와 얼굴 근육까지 미세한 움직임을 포착한다. 영화는 날로 진화하고 기술은 준비가 끝났다. 이제 이 기술에 맞도록 어떤 이야기를 만들어 입힐 수 있느냐의 문제만이 남아 있다. 《혹성탈출》 프리퀄 시리즈가 남긴 과제다. 그리고 요 몇 년 아카데미 시상식을 둘러싸고 불거진, 앤디 서키스와 같은 사례를 연기상 후보로 인정할 것인가 아니냐의 문제도 남아 있다. 지금으로선 인정하지 않을 이유를 찾기가 더 어려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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