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로에서] 환경호르몬 亂世를 살아가는 법
  • 박영철 편집국장 (everwin@sisajournal.com)
  • 승인 2017.08.02 17:34
  • 호수 1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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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저널은 지난해 8월 1399호에 환경호르몬 특집기사를 커버스토리로 올렸습니다. ‘환경호르몬 대물림된다’는 제목으로 환경호르몬의 위험을 알렸습니다.

 

약 1년 만인 이번에도 환경호르몬 기사를 커버스토리로 실었습니다. 이번에는 더 진전된 단독기사로 업그레이드시켰습니다. 환경호르몬이 체내에 들어오면 내 손자의 손자인 고손자까지 대물림된다는 내용입니다. 현재 실험이 5대째까지만 진행 중이어서 그렇지 흐름으로 봐서 6대, 7대도 넘어서 영원히 후손들의 몸에서 안 빠져나갈 가능성도 큽니다. 상상만 해도 끔찍하지 않습니까.

 

문제는 우리가 환경호르몬에 노출되지 않은 채 살기가 엄청 어렵다는 겁니다. 우리가 너나 할 것 없이 날마다 만지는 생수병, 영수증, 순번대기표, 종이컵, 비닐랩 등이 환경호르몬 범벅이라니 기가 막혀 입이 다물어지지 않네요. 이것들 없이 일상생활을 영위하는 게 거의 불가능한데 한숨이 절로 나오는군요.

 

기사에서 소개한 일련의 해외 연구는 ‘환경호르몬은 유전자가 아님에도 사람의 생식세포에 붙어 5대까지 유전된다’는 동일한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이쯤 되면 당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재앙덩어리 유전자나 다름없습니다.

 


그럼 우리 정부는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려고 할까요. 유감스럽게도 문재인 정부의 100대 국정과제에 환경호르몬은 들어가 있지 않고, 식품의약품안전처는 체내로 들어오는 환경호르몬은 미량(微量)이고 그나마 소변으로 배출되므로 안전하다는 입장입니다. 이처럼 환경호르몬에 관한 한, 역대 정권이 정도 차는 있지만 대동소이합니다.

 

이렇게 된 데는 이슈가 되기 어려운 환경호르몬의 특성 탓이 큽니다. 환경호르몬이 오랜 세월에 걸쳐 서서히 사람을 죽이는 데다 사망원인도 환경호르몬 때문이라고 못 박기 어려운 탓에 5년짜리 정권이 이 문제를 다룰 의욕이 생기기 어렵습니다. 다뤄봤자 돈만 들어가고 표로 연결이 안 된다고 생각했던 거죠. 언론도 관심이 없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기사도 안 나오니 더더욱 관련 정책이 나올 리가 없었습니다.

 

정부가 제 구실을 못하는 이런 나라에서는 개인이 똑똑해야 살아남습니다. 환경호르몬은 특히 그러한 것 같습니다. 문제는 환경호르몬이 굉장히 복잡하고 어렵다는 데 있습니다. WHO(세계보건기구)가 2012년 환경호르몬으로 꼽은 화학물질만 176개나 됩니다. 물질 종류만 해도 이렇게 많은데 이 물질이 들어간 상품은 얼마나 더 많을까요. 결국 개인 차원에선 아무리 똑똑해도 다 알 길이 없고 막을 길도 없습니다.

 

결국 정부, 언론, 시민단체 등 공공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해야 환경호르몬 문제에 대처할 수 있습니다. 저희 시사저널이 기여하는 것은 역시 설득력 있는 기사를 많이 쓰고 크게 보도하는 것이겠죠. 저희는 양식 있는 국내외 개인·집단과 손잡고 환경호르몬 기사를 꾸준히 다룰 것을 약속합니다.

 

환경호르몬 원고를 읽으면서 느낀 건데 인류 문명이란 게 오히려 퇴보한 게 많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특히 먹거리 분야에서는 더 그렇습니다. 19세기에 방부제를 필두로 각종 첨가제가 발명된 이후로 식품의 장기 보존과 가공이 가능해졌습니다. 20세기에는 항생제도 개발됐습니다. 항생제는 당장에는 인류 수명 연장에 크게 기여했으나 인체에 축적되면서 오·남용이 문제가 됐습니다.

 

유력한 인류 멸망 가설 중의 하나로 항생제 남용으로 인한 인류 체질의 저하가 거론됐는데, 이제는 환경호르몬도 만만찮은 비중을 차지하게 될 것 같습니다. 앞으로 미혼남녀들은 결혼 상대방을 구할 때 상대방의 식습관을 유의 깊게 살펴보는 게 바람직합니다. 나를 위해서도 중요하지만 미래에 태어날 나의 몇 대손들을 위해서는 더 그렇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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