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악인 허영호 “정상서 내려오며 다음 정상을 준비”
  • 임수택 편집위원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7.07.21 11:14
  • 호수 1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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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최초 7대륙 3극점 정복한 산악인 허영호 대장의 또 다른 꿈

 

‘최고’를 위해, ‘최초’를 위해 최선을 다한다. 이루고 기록으로 남는다. 세월이 지나면 그 기록은 명성으로, 때로는 전설이 된다. 모든 분야의 위대한 업적을 남긴 사람들이 그랬다. 세계 최초 7대륙 3극점(남극·북극·에베레스트) 정상 정복의 위업을 이룬 산악인이자 탐험가인 허영호 대장도 그런 기록적인 인물이다. ‘최고’와 ‘최초’가 그를 도전으로 이끈 열정의 원동력이었지만, 생사를 무릅쓰면서까지 도전할 가치는 아니었다. 그가 말하는 진정한 가치는 그저 살아 숨 쉬는 자의 도전의 의무와 권리의 실천이었다. 그에게 주어진 삶의 명제는 머물지 않고 남이 가지 않은 길을 개척하는 일이었다. 그 일이 그에게는 일상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도전 없는 안이한 길 위에 서 있기에 그의 도전이 기록적으로 보이지만, 멈추지 않고 살아 있음을 증명하는 그에게는 지금까지 걸어온 길은 지극히 일상적인 일이었다.

 

산악인 허영호 대장 © 시사저널 임준선


 

“단지 기록 위해서라면 한 번 오르고 끝냈을 것”

 

허영호는 엄홍길 대장과 더불어 자타가 공인하는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산악인이다. 1974년 한국산악회 히말라야 원정대 회원으로 선정된 인연으로 그는 쉼 없이 최고의 험난한 산들을 등정했다. 1982년 5월 히말라야 산맥 마칼루(8481m), 1983년 10월에 죽음의 산으로 알려진 마나슬루(8156m)를 무산소 단독 등정으로 성공했다. 1987년 12월22일 고(故) 고상돈 산악인에 이어 두 번째로 에베레스트(8864m) 정상에 올랐다. 그는 정상에 서면 또 다른 정상이 보인다고 했다. 정상에서 내려오면서 다음의 정상을 꿈꾸고 준비한다. 

 

“안주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끊임없이 새로운 도전의 길이 보인다. 살아 숨 쉬는 동안 끊임없이 도전할 것이다. 호기심은 나를 지탱해 주는 영양분이다.”

그에게 ‘최고’와 ‘최초’라는 수식어를 너무 의식하는 것은 아닌지 물었다. “그런 면이 없지는 않지만, 그보다도 남이 가지 않은 길을 가는 마음, 도전하는 그 자체가 좋다. 에베레스트 정상을 등정한 등산가의 대부분은 봄이나 가을에 하지만, 나는 일부러 최악의 조건인 겨울 등정을 선택했다. 전 세계적으로도 겨울 등반으로 에베레스트를 오른 사람은 몇 되지 않는다.” 문제는 ‘높이’가 아니었다. 미개척지라는 정상이었다. 남극과 북극을 밟고 대륙의 최고봉들 등정을 거듭해 왔다. 남아메리카 아콩카구아산(6960m), 북아메리카의 매킨리산(6194m), 아프리카의 킬리만자로(5895m), 오세아니아의 칼스텐즈산(4884m), 유럽의 엘브루즈산(5642m), 그리고 1995년 12월12일 남극 대륙의 최고봉인 빈슨 매시프산(5140m)을 등정함으로써 최초로 7대륙 3극점 정상에 오르는 위업을 달성했다.

 

나이도 있고 위험하니 이제 그만 오르라는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지난 5월21일 6번째 에베레스트산을 등정한 이유는 살아 숨 쉬는 자, 꿈이 있고 도전하는 자의 일상의 일이었다. 그는 “단지 기록만을 위해서라면 한 번 오르고 만족했을 것이다”라고 했다. 하지만 산악인으로서의 그의 삶은 산을 오르는 게 일상이다. 기록을 위한 등정이라면 그는 이미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졌을지도 모른다. 그에게 8864m는 단지 높이일 뿐이었다.

 

최근 경비행기를 배워서 한반도 상공을 일주한 일도 그에게 있어선 도전이라는 삶의 소중한 가치를 실천하는 일이었다. 허영호는 그런 사람이었다. 도전을 위한 도전이 아닌, 기록을 위한 도전이 아닌, 그저 살아 숨 쉬는 자의 의무의 이행이었다. 그를 한마디로 표현하면 ‘꿈 덩어리’다. 최근에 그는 ‘허영호와 함께하는 좋은 사람들’이라는 산악회 창립 기념으로 경기도 하남시에 있는 검단산에 올랐다. 필자는 인터뷰를 위해 그 산행에 동행했다. ‘산’ 사나이처럼 그는 묵직하고 고요하고 진중했다. 필자에겐 마치 인간 허영호와 대화를 나누었다기보다, 허영호라는 산을 등산하는 느낌이었다.

 

 

“다음 목표는 경비행기 타고 세계일주”

 

허영호는 “매번 등정을 준비하는 과정 자체가 설레고 기쁘다”고 했다. “한마디로 새로운 길을 가는 일을 사랑한다”고도 했다. 최고봉인 에베레스트를 6회 등정하고, 북극과 남극 탐험을 하는 등 생명이 위험할 수 있음에도 포기하지 않고 도전하는 이유가 궁금했다. 그의 대답은 의외였다. “살기 위해 간다.” 그는 “위험하고 죽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기에 더욱더 안전한 등정을 위해 사전에 피나는 노력으로 치밀하게 준비하고 또 준비한다”고 했다. 그도 실제 몇 차례 죽을 고비를 넘겼다.

 

“한 4번 정도 경험했다. 1982년 마칼루(히말라야의 5번째 봉우리) 정상에서 사진 찍고 내려오다 200m 미끄러졌는데 다행히 눈 있는 곳에 떨어져 살았다. 또 마나슬루(세계에서 7번째 높은 봉우리) 45m 크레바스에 빠졌는데 셰르파의 도움으로 구조되었다.”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필자는 영국 시인 알프레드 테니슨(1809~1892)의 명시 《율리시스(Ulysses)》의 ‘세월과 운명에 의해 쇠약해지지만 의지는 강하도다. 분투하고 추구하고 발견하고 결코 굽히지 않으리라’라는 시구가 떠올랐다. 꿈과 이상을 품고, 익숙한 것과 이별하고, 익숙하지 않은 것을 찾아가는 그의 길에 ‘멈춤’이란 단어는 없어 보인다.

 

허영호는 1954년생으로 64세다. 체력적으로 의지적으로 약해질 수 있는 나이다. 그래서 이제 정리하는 단계에 들어가리라 생각하며 그의 다음 도전 계획을 물었다. “경비행기를 타고 전 세계를 일주하는 것이다.” 그의 대답은 필자의 예상을 여지없이 무너뜨렸다. 그는 경비행기 세계일주 계획을 실천하기 위해 요즈음 체력훈련을 비롯해 비행 관련 공부, 자료 수집, 전 세계 국가들의 기상 조건과 날씨 등에 대해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 그와 대화를 나누는 동안, 과연 이 사람의 도전의 끝은 어디일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야말로 호기심 덩어리이고, 열정·충만 그 자체였다. 우주왕복선의 조종사가 되고 싶었는데 “돈이 없어 꿈을 이루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래서 “미국의 스미스소니언 박물관에 가서 달나라에 갔다온 우주선을 타 보았다”라며 아쉬움을 토로했다.

 

보통사람들에게 엄청난 꿈의 이야기도 그는 아주 담담하게 말했다. 도전을 멈추지 않아야 한다는 인생의 명제가 확고한 그에게, 커다란 꿈 자체도 일상화되어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 눈이 평소에는 조용하지만, 등반 일정이 결정되고 훈련에 돌입하면 눈이 찢어질 정도로 대원들이 아주 무서워한다”라며 “성취의 99%는 자기 노력”이라는 말을 강조했다. 등정 전에 날씨 체크, 통신 및 식량운반 훈련, 각 대원들의 체력 상태 등 각 역할별로 반복된 훈련과 점검을 통해 사고의 위험을 줄이고, 그 결과 같이한 대원들 모두가 안전하게 등정을 마칠 수 있었다.

 

생사를 넘나들어야 하는 험준한 산을 등정하는 데 제일 중요한 요소는 리더의 역할이다. 아무리 훈련된 대원들이라 할지라도 리더가 순간적으로 판단을 잘못하면 등정은 실패하고, 심하면 대원들의 목숨을 앗아갈 수 있기에 리더의 역할은 절대적이다. 그가 말하는 리더의 조건은 아주 간명했다. “배우고, 먼저 경험하고, 체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무조건 ‘하면 된다’고 소리만 쳐서 될 일이 아니다. 리더는 경험이 풍부하고 박식해야 한다. 산에 대해서는 물론 기상·식량·무전기·셰르파 활용 등 많은 영역에 대해 공부하고 경험을 많이 축적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한마디로 디테일하지 않으면 안 된다. 성공의 필요조건은 디테일에 있다”고 강조했다.

 

허영호 대장이 2010년 5월17일 세계 최고봉 에베레스트(8864m) 네 번째 등정에 성공했다. © 사진=뉴시스


 

“젊은이들에게 일단 ‘부딪쳐라’고 말하고 싶어”

 

그러기 위해서 그는 끊임없이 강도 높은 훈련을 해 오고 있다. 등산은 기본이며 심폐 기능 향상을 위해 마라톤을 하고, 빙벽훈련, 암벽훈련과 기상 관련 공부 등 등산과 탐험에 관련된 정보 수집과 공부를 지속적으로 해 오고 있다. 무엇을 하든 등산과 관련된 일에 집중한다. 마트에 가서도 물건을 보면 늘 등산이나 탐험에 사용할 수 있는 것들을 구입해 먼저 사용해 본다. 일상 자체가 등산과 탐험이라고 하는 자신의 ‘업(業)’에 올인하고 있었다.

 

‘허영호와 함께하는 좋은 사람들’이란 산악회는 재능기부 성격이라고 그는 말했다. “(사단법인) 한국어린이난치병협회 운영위원장을 맡고 있는 윤완채씨(법무법인 효성 고문)를 비롯해 평소 좋아하는 사람들 몇몇이 모여 산을 사랑하고 산을 통해서 좋은 일을 해 보자는 취지에 공감해 동참했다”. 허영호에겐 산악계의 ‘이단아’라는 달갑지 않은 꼬리표도 여전히 붙어 다닌다. 실제 그는 엄홍길 대장과는 달리 한국산악회나 대한산악연맹에서 활동하지 않고 있다. 무슨 이유 때문일까.

 

“특별한 이유는 아니고, 1999년 한국산악회 이름으로 에베레스트를 등정한 이후 내부적인 문제로 이견이 좀 있었으나 그 이후 풀었다. 과거의 일이다. 지금도 동료 산악인들과는 가끔 만나고 있다. 지난 5월21일 6번째 에베레스트를 등정하고 나서도 엄홍길 대장과 만나 소주 한잔했다.”

그에게 나이는 단지 숫자에 불과했다. ‘경비행기로 세계일주를 한다면, 그게 모험의 종착지가 되느냐’는 물음에 그는 한마디로 “노”라고 일축했다.

 

“한평생을 자연과 함께해 왔다. 그 자연에는 늘 동료가 있었다. 궁극적인 꿈은 사람을 위한 것이다. 특히 미래 대한민국을 이끌고 갈 젊은이들을 위해 뭔가 기여하고자 한다. 그들에게 도전하고 좌절에서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꿈을 심어주는 일을 생각하고 있다.”

요즘 힘든 사회 환경에서 고뇌하는 젊은이들을 향한 당부의 말도 빠트리지 않았다.

 

“주변에서도 제대로 된 직장을 구하지 못해 고민하는 젊은이들을 많이 만난다. 일단 궂은일이더라도 먼저 부딪쳐 보라고 말하고 싶다. 그게 젊음이다. 내 나이 64세인데도, 나는 새로운 도전을 준비하고 있다. 젊은 사람들은 무한한 가능성이 있지 않나. ‘부딪쳐라’는 말을 꼭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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