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소설 《광개토태왕》 낸 ‘전직 기자’ 손정미 작가 인터뷰
  • 김경민 기자 (kkim@sisajournal.com)
  • 승인 2017.07.06 13:41
  • 호수 1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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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3년 간 수백권의 자료조사와 한중 현지조사 끝에 내놓은 장편소설…‘정복군주’ 이름에 가린 광개토태왕 면면 그려내

 

“광개토대왕 말고 ‘광개토태왕’이라고 말해주세요.”

 

질문을 던지던 중 무심결에 “광개토대왕”이라고 말을 했나보다. 맞은 편 자리에 앉아 묵묵히 질문 내용을 듣고 있던 손정미 작가가 불쑥 말을 뱉었다. 지난달 말 역사소설 《광개토태왕》(마음서재)을 내놓은 그였다. 2014년 첫 장편소설 《왕경》 이후 3년 만에 나온 두 번째 소설이다. 

 

손 작가는 40대 중후반이란 비교적 늦은 나이에 첫 소설을 썼다. 1990년 조선일보에 취재기자로 입사해 22년 간 ‘손 기자’로 불려왔다. 조선일보 첫 정치부 여기자였던 그는 문화부 소속이었던 1994년 고 박경리 선생과 인연을 맺었다. 기자가 ‘새내기 기자’ 시절 까마득한 ‘선배’였던 그를, 기자 대(對) 작가로, 인터뷰어 대 인터뷰이로 마주했다. 7월5일 서울 광화문 일대에서 만난 그는 기자시절에 비해 한층 여유로워보였다. 

 

“광개토왕릉비에 ‘태왕’이라 적혀 있다. 태왕 생전에도 ‘영락태왕’이라 불렸다는 기록이 있다. 《국역 삼국사기》를 출간한 고 이병도 선생께서도 주석에서 "영락태왕이라 불렸다"고 명시했다. 심지어 중국에서도 비석 속 명칭 그대로 ‘호태왕’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런데 우리가 굳이 그를 ‘대왕’이라고 격하해 부를 이유가 있나.”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하고 일간지 기자 생활을 이어가던 그가 갑자기 역사소설을 쓰게 된 이유가 궁금해졌다. 

 

역사소설 《광개토태왕》을 낸 손정미 작가 ⓒ 사진=한영희

 

전작은 삼국통일 직전의 경주를 무대로 삼았고 이번엔 고구려다. 역사소설만 썼다.

 

소설을 써야겠다는 결심을 한 이후 내게 가장 큰 화두는 ‘정체성’이었다. 뭔가를 쓰기에 앞서 나와 우리의 정체성이 무엇인지 먼저 알야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래서 일단 역사 공부를 시작했다. 공부를 하다보니 지금까지 내가 역사를 너무 모르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됐다. 나의 역사적 지식이 대한민국 평균 수준일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나 혼자 알고 있기 보단 소설로서 더 많은 사람들에게 이 재밌는 역사를 알리고 싶다고 생각했다. 처음은 그렇게 시작했다. 

 

상고사로 시대가 거슬러 올라가면 참고할만한 자료가 적다는 게 가장 큰 어려움이었다. 소설로 써내긴 어렵지만 국내외 문헌과 유적, 유물 속에 보물찾기 하듯 사료를 캐내는 재미가 있었다. 

 

 

왜 《광개토태왕》인가.

 

현재 우리사회가 목도하는 문제들 가운데  개개인의 자긍심, 자존감이 낮은데서 기인하는 경우들이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 집안이, 우리 조상이 뼈대있는 집안이라는 것을 알면 누구라도 살아가는데 자신감을 얻지 않겠나. 소설을 통해 위대한 영웅의 모습을 보여주면 자긍심과 자존감을 느낄 수 있을 것 같았다. 실제로 작품을 쓰면서 나 스스로도 자긍심이 높아졌다.

 

광개토태왕은 고구려의 부흥기를 이끌어낸 우리 역사 속의 영웅이다. 그런데 그가 ‘정복 군주’였다는 점 말고는 딱히 알려진 바가 없다. 그는 어떤 인물이며 어떤 점이 뛰어났는지, 그 시기에 그가 왜 그런 결정을 낼 수 있었는지, 조명해보고 싶었다. 

 

 

소설을 읽어보면 인물이나 배경 묘사가 상당히 구체적이다. 글을 읽으면서 시각화에 어려움이 없다. 공부를 상당히 많이 하신듯한데.

 

고대사의 경우 사료가 참고할만한 자료가 많지 않았다. 죽기 살기로 달려들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기본으로 했다. 흩어져있는 문헌에서, 중국 고대사 사료에서, 고분의 벽화에서, 마치 별처럼 군데군데 조금씩 흩어져 있는 걸 모아 모아 퍼즐을 맞춰갔다. 참고한 역사서, 지리서, 그림 자료만 수백점이 넘을 것이다. 

 

아무리 소설이래도 근거 없이 아주 허황되게 쓸 순 없었다. 내가 기자 출신이어서 그렇기도 하지만, 평소 책을 읽다가도 뭔가 사실과 다른 내용이 딱 나오면 작품 전체에 대한 신뢰감이 무너지는 경험을 종종했다. 완결성에 많이 신경 썼다. 이를테면 ‘말갈족’이란 용어도 당시 그들을 지칭했던 ‘숙신’이란 명칭으로 사용했다. 

 

 

소설 속에 광개토태왕이 수수한 베옷을 즐겨입었다거나 사냥대회를 직접 관장해 활을 잘 쏘는 서민들을 파격 임용하기도 했다는 내용이 인상적이다.

 

다 사실에 근거한 내용이다. 고구려는 생각보다 열린 사회였다. 우리가 잘 아는 ‘바보 온달’ 이야기도 그런 것 아니냐. 평민이었던 온달이 사냥대회에서 발탁됐다. 

 

우리는 역사를 단편적으로 배워왔다. 때문에 큰 그림 속에서 역사를 바라보는 시각이 부족하다. 그런 점에서 역사소설을 쓰면서 책임감도 많이 느꼈다. 

 

 

어떤 책임감을 말하는 건가.

 

누가 들으면 비웃을지 모르겠지만. ‘내가 수집한 자료들을 기반으로 구성한 소설적 상상력이 미래의 어느 시점에선가 역사적 사실로 입증될 수도 있으리라는’는 마음이었다. 그러니까 내 책이 소설이지만 철저한 고증을 기반으로 해야 한다는 책임감이다. 

 

예를 들면 소설 속에서 ‘철’의 생산과 가공에 관한 에피소드가 있다. 고구려의 상단(商團)이 철기병의 호위를 받으며 우즈베키스탄까지 철을 수출하는 과정을 그려냈다. 실제로 고구려는 우수한 철 수출국가였다. 이 장면을 위한 자료조사를 하면서 앞으로 우리나라가 녹슬지 않는 철을 만들 것이란 확신이 들었다. 

 

ⓒ 사진=한영희


 

고 박경리 선생님과 인연이 깊다. 처음 소설을 써보란 권유를 한 것도 그였다고.

 

1994년 문학담당 기자로서 고 박경리 선생님을 처음 인터뷰했다. 사실 일방적으로 내가 그를 흠모하는 관계다. 아마 지금 내 작품활동에 있어 선생님의 영향이 음으로 양으로 있을 것이다. 

 

제가 닮고 싶었던 분이었다. 당신은 아마도 나를 좀 애처롭게 본 게 아닐까 싶다. 여성이고, 당신처럼 기자로 사회생활을 출발했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었으니까. 원주에 있는 선생님 댁에서도 세 번 정도 잤다. 

 

선생님께 “옛날부터 소설을 쓰고 싶었고 지금도 그렇다”는 말씀을 드렸었다. 그때 작가의 태도, 철학에 대해 많은 말씀을 해주셨다. 이를테면 돈과 명예만을 추구한 글쓰기라면 당신이 결코 용납하지 않겠다, 철저히 준비해야 한다, 이런 말씀이었다.

 

하지만 안정적인 직업을 두고 소설가의 길을 선택하기란 결코 쉽지 않았다. 늘 고민만 하다가, 처음 선생님을 만난지 18년 뒤인 2012년에 회사를 그만 뒀다. 

 

작품을 쓸 땐 주변의 모든 것을 끊고 오롯이 작품에만 집중한다. 퇴사 이후 전화번호를 두 번이나 바꿨다. 돌아갈 다리를 불태우는 심정이었다. 작가로서 산다는 것은 여러모로 힘들지만, 잘 한 선택이었다고 본다. 

 

 

다음 작품도 역사물인가.

 

그렇다. ‘고조선’을 배경으로 하게 될 것 같다. 오늘날 고조선에 대한 역사는 그게 역사인지, 신화인지, 전설인지 알 수 없는 형태로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보다 객관적인 입장에서 공부해서 고조선 역시 엄연한 역사임을 설득력 있게 보여주려는게 내 욕심이다. 

 

우리 선조들이 오래전부터 높은 이상을 가지고 살았다는 게 대단한 것 같다. ‘홍익인간’‘단군’의 개념이 우리가 그 의미를 제대로 모르는 상태에서 너무 과소비됐다고 생각한다. 그러다보니 현실에서 오히려 멀어진 느낌도있다. 알지도 못하면서 벌써 식상해져버린 셈이다. 

 

아마 현지조사를 위해 이전 작품보다 더 많은 지역을 가게 될 것 같다. 현지조사다. 지금은 너무 시간이 오래 흐르고 앙상한 잔해만 남아 있지만, 다시 살을 붙이고나면 장대하고 찬란한 모습으로 살아날 것이라 확신한다. 

 

새로운 대통령 뽑혔고 새로운 정부가 들어선지 얼마 되지 않았다. 새로운 리더십을 온 국민이 같이 만들어가야할 시점이다. 이라고 생각한다. 지난해 말부터 탄핵정국을 지나며 봤지만, 지금까지 우리에게 그런 리더십이 있었는지 같이 고민해볼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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