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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저널

수메르의 최고의 영웅? 최악의 환경파괴범?

[이진아의 지구 위에서 보는 인류사(유럽사 편)] ‘비옥한 초승달’ 지역 초토화시킨 ‘우루크’의 왕 길가메시의 이야기

이진아 환경․생명 저술가 ㅣ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7.06.16(Fri) 16:3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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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발상 패러다임에서 입각해서 우리 민족의 과거를 다시 보기로 하자. 과연 박창범 교수의 지도가 제시했듯이, 또 최근 속속 새로운 주장으로 제기되듯이, 우리 민족이 과거에 상상을 초월하는 큰 판에서 놀았던 사람들일까?

 

이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지금까지 익숙해졌던 ‘역사 보기’의 방법, 심지어 민족이나 국가를 규정하는 방식까지 버려야 할지 모른다. 이미 주류 역사학에서 인정할만한 근거는 다 사라졌거나 왜곡됐을 게 뻔한 상황이다. 새롭게 역사를 구성하려면 상상력이 필요하다. 그리고 사실적인 가치가 있는 상상을 하려면, 역시 사실에서 출발해야 한다. 

 

역사학적 근거가 충분히 남아 있는 다른 지역의 역사는 기후변화와 맞물려 어떤 변화를 보였을까? 흔적이 거의 지워져버린 우리 역사를 복원하기 위해, 먼저 세계사, 그 중에서도 비교적 고증이 잘 되어 있는 유럽 지역의 역사를 참고하는 게 도움이 될 것 같다. 유명한 몇 장면들이 기후변화와 어떻게 연동되어 나타났고 흘러갔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길가메시. 요즘 젊은 사람들에게는 게임 캐릭터로 친숙한 이름일 수 있다. 그는 현재 이라크에 해당되는 수메르 지역에 있었던 ‘우루크(Uruk)’라는 왕국의 왕이었다고 전해지는데, 만일 그가 실존인물이라면 기원전 2500년 무렵에 살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길가메시라는 이름이 지금 이렇게 유명해질 정도로 전해지는 것은 그의 행적을 그린 서사시 『길가메시 에픽』이 비교적 소상히 전해지기 때문이다. 인류 최초의 문자인 메소포타미아 쐐기 문자로 쓰인 이 서사시는 인류 역사에서 가장 오래 된 문학작품으로 꼽힌다. 이 서사시에서 (그리고 거기서 영감을 받아 구성된 게임 플롯에서도) 그는 엄청난 영웅으로 그려진다. 

 

 

비옥했던 수메르 지역, 무분별한 삼림벌채로 사막이 되다

 

하지만 환경담론 공간에서 그는 ‘인류 최초의 환경파괴범’으로 유명하다. 길가메시 에픽을 통해 전해지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 때문이다.

 

4~5천 년 전 우루크 왕국이 있었던 수메르 지역은 지금은 대체로 사막이지만, 당시에는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 강이 합쳐져 이루는 ‘비옥한 초승달’이라는 별명이 있을 정도로 기름진 평야였다. 일대에서 가장 세력이 컸던 길가메시는 으리으리한 도시를 건설하여 후세에 이름을 길이 남기고 싶은 야망을 갖게 되었다. 그러려면 재목도 있어야 하고 벽돌도 있어야 한다. 벽돌은 흙을 구워 만들어야 하니까, 역시 연료로 많은 나무가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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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일대에는 길고 넓게 펼쳐져 있는 자그로스 산맥이 강과 평행으로 달리고 있다. 지금은 거의 헐벗은 산이지만 길가메시 시대엔 그 긴 산맥의 줄기를 따라 하늘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커다란 삼나무가 빽빽이 자라는 숲이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로 펼쳐져 있었다. 당시엔 사람들이 삼나무 숲은 신들이 사는 신성한 곳이었고, 숲에 들어가는 것은 불경스러운 짓이라고 생각해서 함부로 범접하지도 않아서 숲은 잘 보전되고 있었다. 

 

길가메시는 삼나무를 잘라 왕국을 건설하겠노라고 선포했다. 그러자 우루크 시민들은 두려움에 떨었다. 수메르인들이 섬겼던 여러 신들 중에서 가장 높은 신은 바람과 폭풍을 지배하는 대지의 신 엔릴이었다. 그리스 신화에서 제우스에 맞먹는 존재다. 그는 반은 신이고 반은 인간인 거인 훔바바를 시켜 숲을 지키게 했는데, 훔바바가 노하면 억수 같은 폭풍우가 쏟아졌으며, 입으로는 불길을 내뿜었고, 그 숨결에는 사람을 죽게 만드는 독이 서려 있었다고 한다.

 

강력한 도끼로 무장한 길가메쉬와 그의 친구인 괴력의 거인 엔키두가 삼나무 숲으로 들어갔다. 숲은 햇빛이 들지 못할 정도로 빽빽하고, 그윽한 향기에 넘쳐 있었으며, 성스러움이 서려 있었다. 길가메시와 엔키두는 잠시 압도되어 정신을 차리지 못하다가 곧 가장 큰 나무에 도끼를 대기 시작했다. 격노한 훔바바는 당장 지금 하는 짓을 그만두라고 명령했지만 그들은 듣지 않았다. 치열한 싸움이 벌어졌지만, 결국 훔바바는 길가메시의 칼에 목이 잘리고 말았다.

 

그러자 삼나무들은 두려움에 울었다. 인간들이 지나간 자리에는 처참하게 잘린 그루터기와 맨 땅과 바위만 남았다. 길가메시와 엔키두는 잘라낸 나무로 뗏목을 만들고 그 위에 더 많은 나무를 실어 유프라테스 강줄기를 따라 운반했다. 분노가 극에 달한 엔릴은 이 무도한 인간들에게 저주를 내렸다. 

 

“그대들이 먹을 양식을 불이 먹을지어다. 그대들이 마실 물을 불이 삼킬지어다.”

우리는 이 이야기의 결말을 안다. 엔릴의 저주는 실현됐다. 길가메시는 삼림을 침범한 이후로도 한동안 기고만장해서 살다 죽었지만, 그로부터 몇 백 년이 지나는 사이에 이 일대는 작물이 나지 않는 불모의 사막이 돼버렸다. 사람들의 환경의식 수준이 높아진 20세기 말부터 길가메시는 영웅의 명성보다는 그 비옥했던 메소포타미아를 불모의 땅으로 만든 환경파괴범이라는 오명으로서 전해진다.

 

이 장면을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자. 우선 메소포타미아의 지도를 보자. 자그로스 산맥은 터키에서 시리아, 이라크를 거쳐 이란 서부에 이르는, 길이 1500km에 달하는 거대한 산지다. 오른쪽 사진은 현재 자그로스 산맥 중 일부의 경관이다. 나무가 없는 헐벗은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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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자그로스 산맥 전체가 우거진 숲으로 덥혀 있었다면, 그 밑의 땅, 메소포타미아는 그야말로 ‘비옥한 초승달’이라는 별명에 걸맞게 기름진 땅이었을 것이다. 이 지역은 얼마 전까지 지구상에서 가장 먼저 인간이 집단을 이루어 정주생활을 시작하고 농사를 지은 곳으로 알려져 있을 정도로 비옥했던 곳이다. (지금은 지구상에서 가장 먼저 정주생활이 시작된 곳이 한반도라는 고고학적 증거물이 나오고 있다. 이 문제는 나중에 좀 더 자세히 다루어질 것이다.)

 

그런데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아무리 전설적인 괴력을 가진 캐릭터라 하더라도, 길가메시와 엔키두가 자그로스 산맥을 결딴 낼 정도로 나무를 베어낼 수 있었을까? 

 

길가메시와 엔키두 외에도 많은 부하들이 함께 했을 것이다. 길가메시가 숲에서 나무를 자르는 선례를 남기자 인근 도시국가들이 너도 나도 경쟁적으로 베었을 것이다. 길가메시 당대에 국한되지 않고 후손들도 필요하면 숲에 들어가 나무 베기를 주저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도끼와 톱으로 잘라냈을 옛날 기술을 고려할 때 저 엄청난 자그로스 산맥에서 하늘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울창하게 자라고 있었다는 삼나무들을 그 일대와 하류 충적지까지 다 불모지가 되도록 잘라냈다는 것은 납득이 되지 않는다.

 

이 문제는 과거의 기후변화 역사와 함께 봐야 풀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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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도 잠깐 나왔지만, 과거 1만 년 동안 있었던 지구 평균기온 변화의 모습을 보여주는 그래프에 길가메시 시대를 표시한 것이다. 약 1만2천 년 전부터 빙하시대가 끝나고 기온이 가파르게 오르기 시작, 지구의 연평균 기온이 섭씨 15도를 넘는 온난기에 돌입하기 시작한 것이 약 8천 년 전이며, 두 번째 온난기는 5000년 쯤 전인 기원전 3000년 무렵부터 약 1000년 간 지속됐다. 후기 홀로세 기후 최적이라고 불리던 이 시기가 시작되면서 지구상에는 식생이 왕성하게 성장해서 짙은 숲이 많이 형성되게 되었다.

 

5000년 전, 지구상 총인구에 대한 추정은 연구자들마다 차이가 크지만 가장 많이 잡아야 1800만 명 정도로 본다. 이 정도의 인구가 원시적 기술수준에서 일으키는 삼림파괴 효과는 거의 무시해도 될 정도였을 테니까, 지구상 저·중위도의 산지들에는 대체로 푸른 녹음이 잘 형성되어 보존되고 있었다고 봐도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다. 

 

 

기후의 변화로 풀어보는 ‘엔릴의 저주’

 

길가메시가 등장한 것은 후기 홀로세 기후 최적이 시작된 지 약 5~600년 정도 지난 시점에서였다. 나날이 더워지는 날씨 속에서 식생들이 번성해가던 정점에 해당되는 시기다. 아마 길가메시의 무리가 있는 힘껏 삼나무를 잘라냈다 하더라도 그 삼림생태계는 금방 회복이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 엔릴의 저주가 실현됐을까? 

 

위 기후변화 그래프를 보면 그 답이 나온다. 길가메시 시대 이후로 급속히 기온이 하강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렇게 되면 식생의 생장 속도가 눈에 띠게 줄면서 숲의 큰 나무들이 먼저 사라진다. 당시 인간에 의해 개발되었을 지극히 적은 일부의 땅에 그치는 게 아니라 지구 전체 스케일로 그런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다. 따라서 메소포타미아가 불모의 땅으로 변하게 된 것은 길가메시가 나무를 잘라서가 아니라 기후변화라는 거대한 자연의 수레바퀴가 돌면서 한랭기로 들어갔기 때문이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지구가 똑같이 한랭기에 들어갔지만, 비슷한 위도의 다른 지역에 비해 이 지역 숲이 특히 회복 불능으로 망쳐진 편이다. 이것은 기온 뿐 아니라 또 다른 거시적인 환경요인이 악화됐기 때문이며, 또한 이 지역 생태계의 특성상 한 번 망쳐지면 회복이 불가능한 요인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 연재에서 이 부분까지 설명할 수는 없을 것 같아 다음 기회를 기대해본다. 

 

어쨌든 그 모든 악조건들이 하필이면 이 지역에 집중적으로 나타난 것은 어쩌면 엔릴의 저주 때문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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