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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 난수방송, 지난해 7월부터 38회 송출했다

[평양 Insight] 남파공작원 지령용으로 주로 사용…탄핵 정국·대선 겨냥 선전·선동인 듯

이영종 중앙일보 통일전문기자 ㅣ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7.06.02(Fri) 09:32:50 | 144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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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부터 27호 탐사대원들을 위한 원격교육대학 외국어 복습과제를 알려드리겠습니다. 문제를 부르겠습니다.”

 

지난 5월26일 새벽 서울에서 관계 당국에 의해 청취된 북한의 평양방송. 대남 전용 라디오인 이 방송 주파수를 통해 까랑까랑한 여성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전해졌다. 그런데 외국어 문제를 내겠다는 말과 달리 북한 방송은 의미를 알 수 없는 숫자를 부르기 시작했다. “451페이지(쪽) 18번, 803페이지 95번, 728페이지 70번…” 같은 형식으로 동일한 내용을 두 차례 반복했다. 북한 당국이 남파공작원 지령용으로 주로 사용하는 것으로 알려진 이른바 ‘난수(亂數)방송’이다.

 

이런 방송이 처음은 아니다. 남북 대결 시기 북한의 대남공작 기관은 평양방송을 통한 지령용 모스(morse) 부호 송출과 함께 난수방송을 수시로 내보냈다. 2000년 6월 남북정상회담을 계기로 북한은 난수방송 중단 조치를 취했지만 지난해 7월 이후 본격 재개했다. 재송출 이후 가장 최근까지 모두 38차례 난수방송을 내보냈다는 게 우리 관계 당국의 파악 내용이다. 올 들어서만도 18차례다. 대선을 전후해서 횟수를 늘린 점도 눈길을 끈다. 선거 이틀 전인 5월7일 새벽에 이어 선거 직후인 12일 새벽에도 “지금부터 27호 탐사대원들을 위한 원격교육대학 외국어 복습과제를 알려 드리겠다”며 방송을 내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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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 앞두고 송출 횟수 늘어

 

우리 정보 당국은 지난해 북한이 난수방송을 재개하자 “슬리핑 에이전트(sleeping agent)를 깨우려는 지령”이라고 분석했다. 5년이나 10년 이상 장기 은둔한 채 남한 내에 머물던 공작원에게 ‘깨어나라’는 ‘사인’을 준 것이란 얘기였다. 대남 교란을 위한 심리전 차원의 방송일 가능성도 제기됐다. 하지만 주기적으로 난수방송이 흘러나오면서 북한이 모종의 대남공작을 준비하고 있는 게 아니냐는 쪽에 무게가 실렸다. 탄핵 정국과 대선 등을 겨냥한 선전·선동이나 남한 내 갈등 조장 목적으로 북한이 난수방송 활용에 눈길을 돌린 것이란 얘기다.

 

실제 북한 당국이 난수방송을 통해 암살 지시를 내렸다는 외신 보도도 나왔다. 지난 3월말 미 자유아시아방송(RFA)은 “태영호 전 영국 주재 북한대사관 공사의 한국 망명을 도운 영국인에 대해 북한이 암살을 지시했다”며 “영국 정부가 대응에 나섰다”고 전했다. 영국 언론은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의 이복형인 김정남씨가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국제공항에서 신경작용제 VX에 의해 살해된 지 수 주일 만에 북한이 이 같은 지령방송을 내보낸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기도 했다.

 

낯선 표현인 ‘난수’는 우리 일상에서도 종종 쓰인다. 뭔가 복잡하게 얽히거나 까다로운 일에 ‘난수표 같다’는 말을 하는 경우가 있다. 본래 난수는 무작위로 뽑아낸 숫자 또는 그 조합을 의미한다. 하지만 첩보나 공작의 세계에서는 사전 약속에 따라 정교하게 짜인 숫자의 배열을 일컫는다. 미리 나눠 가진 난수표를 보고 그 숫자가 의미하는 글자를 조합해 지령 내용을 파악하는 방식은 고전적이다. 과거 북한이 파견한 간첩을 검거하는 경우 권총·독침 등과 함께 난수표는 중요 증거물품의 하나였다. 1996년 9월 강릉 침투 북한 잠수함 승조원들이 탈출 직전 제일 먼저 불태운 것도 난수표였다. 상대 수중에 흘러들어가면 현재는 물론 과거의 공작활동까지 지령 단계에서부터 노출돼 큰 타격을 입을 수 있다는 점을 의식한 행동이다.

 

최근 들어서는 난수표보다는 일반 책자를 활용하는 방식이 자주 쓰인다. 미리 특정 제목의 책자를 정한 뒤 어느 페이지와 몇 번째 줄인지를 지령방송으로 알려주는 경우다. “459페이지(쪽) 35번, 913페이지 55번, 135페이지 86번…”하는 식이다. 2006년 검거된 한 공안사범은 톨스토이의 고전 《부활》을 암호해독용 책자로 사용해 화제가 됐다. 어휘가 다양한 데다 의심을 덜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이 책을 택한 것으로 파악됐다는 게 당시 수사 관계자들의 전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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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당국, 난수방송 내용 파악 못해

 

난수방송처럼 숫자를 이용한 암호 방식은 고대 로마에서도 쓰일 정도로 역사가 깊다. 최근에도 국제 첩보전 등에서 여전히 유용하게 사용된다는 게 정보세계에 밝은 이들의 전언이다. 광범위한 지역에 걸쳐 동시에 지령을 내릴 수 있다는 등의 장점 때문에 라디오 전파를 주로 이용한다. 영국의 비밀정보기관이 운용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링컨셔 포처(The Lincolnshire Poacher)는 초강력 단파 난수방송의 대명사다. 키프로스 영국 공군기지에서 발신되며 전달력이 좋은 여성 목소리로 숫자 5개를 부르는 방식이라고 한다.

 

보안유지를 위해 활용 방식 또한 다양하기 때문에 난수를 “살아 있는 생물과 같은 존재”라고 부르기도 한다. 예를 들면 같은 난수표도 홀수 날짜에는 가로에서 세로로 해독하고, 짝수 날에는 숫자에서 전부 1을 뺀 뒤 조합하는 등의 규칙이 부여되는 방식이다. 음악 등을 결합해 중요도를 사전에 알리기도 한다. 북한 가요 《반갑습니다》가 나오면 별로 중요하지 않는 내용이거나 알맹이가 없는 기만용 방송이고, 혁명가요가 울리면 실제 지령이 떨어지는 등의 구분을 한다. 방송을 한두 차례 되풀이하는 건 검증을 위한 것이라고 한다.

 

첩보전도 인터넷과 SNS, 첨단 기술과 장비 등에 힘입어 진화를 거듭해 왔다. 북한의 대남 공작도 예외는 아니다. 간첩 검거 발표 때마다 단골로 등장하던 무전기와 모스부호 송신기, 공작금 달러 뭉치, 독침 등은 이젠 옛말이 됐다. 우리 관계 당국이 적발한  ‘PC방 간첩’은 인터넷 공간을 이용한 비밀통신과 관련이 깊다. 요즘엔 최첨단 암호화 프로그램인 스테가노그래피(steganography)를 사이버 공간에서 사용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기밀정보를 동영상이나 사진·음악 파일 안에 암호로 숨겨 놓는 방식이다. 치밀하게 들여다보지 않고서는 꼬리를 잡기가 쉽지 않아 우리 수사 당국이 골머리를 앓고 있다.

 

이 같은 첨단 디지털 추세 속에서 북한이 아날로그식 난수방송을 재개한 이유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하지만 우리 정보 당국은 구체적 내용을 파악하거나 대응책을 제시하지는 못하고 있다. 난수방송을 둘러싼 남북 간 신경전은 앞으로도 상당 기간 이어질 공산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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