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다 더 적나라한 ‘정치 영화’를 보고 싶다
  • 이은선 영화 저널리스트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7.05.04 10:17
  • 호수 1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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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 정치 드라마 표방한 《특별시민》 절반의 성공 절반의 실패 평가

 

올해 조기 대선을 맞아 공개된 영화들은 지난 2012년 18대 대선을 앞두고 등장한 작품들과는 그 양상이 조금 다르다. 이명박(MB) 전 대통령의 관점에서 2007년 그의 대선 활동을 바라본 다큐 《MB의 추억》, 세계적 자산운용회사 맥쿼리와 MB의 검은 커넥션을 추적하는 《맥코리아》 등 당시 개봉한 독립 다큐멘터리들의 이슈는 MB 정권 5년의 비리와 거짓말을 고발하는 데 집중됐다. 《광해, 왕이 된 남자》처럼 이상적 지도자 상(像)을 말하는 상업 기획영화의 시도들도 눈에 띄었다.

 

반면 지금은 사정이 달라졌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에서 촉발해 박근혜 정부의 범죄가 정황이 아닌 사실로 밝혀졌고, 촛불의 힘으로 대통령 탄핵을 이끌어낸 직후다. 독립다큐들은 새로운 선거를 위해 보다 현실적인 제언을 던지는 데 집중하는 분위기다. 18대 대선 부정 선거 의혹을 제기하며 투표자들의 각성을 촉구하는 독립다큐 《더 플랜》과 《멘붕의 시대》는 ‘투표보다 개표’의 중요성을 짚고 넘어가려 한다. 이 가운데 정치 선거전 풍경을 다룬 상업 기획영화인 《특별시민》도 개봉했다. 이 영화는 한국영화계에 전례가 드물었던 ‘본격 정치 드라마’를 표방한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서울시장 3선에 도전하는 정치인 변종구(최민식)와 그의 주변을 둘러싼 인물들 이야기인 영화 《특별시민》의 한 장면 © 쇼박스

 

 

정치에 대한 대중의 피로도 높아져

 

현실 정치계에서 연일 거짓말 같은 뉴스가 쏟아지는 상황에 상업 기획영화가 색다른 이야깃거리로 승부하기란 쉽지 않다. 정치에 대한 대중의 피로도는 높아질 대로 높아졌다. 그러니 영화가 정치라는 카드를 이용해 무엇을 보여줄 것인지 결정할 때는 이전에 비해 훨씬 신중한 고민과 접근 방식이 필요하다. 《특별시민》이 주목한 것은 “똥물에서 진주 꺼내는” 선거판의 풍경, 그리고 권력을 향한 정치인의 욕망이다. 배급사(쇼박스)가 특별히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공교롭게도 올해 조기 대선을 위해 각 후보들의 유세가 한창인 때와 개봉 시기가 맞물렸다는 점이 일단 흥미로운 대목이다.

 

《특별시민》의 배경은 서울시장 선거가 있기 얼마 전이다. 영화는 사상 최초로 서울시장 3선에 도전하는 정치인 변종구(최민식)와 그의 주변을 둘러싼 인물들을 통해 이야기를 풀어간다. 변종구는 이미 수년간 정치밥을 먹어온 노련한 ‘정치 9단’인 데다 당선이 유력한 후보이지만, 지지율 면에서 계속해서 치고 올라오는 경쟁자 양진주(라미란)를 비롯한 다른 후보들의 역량 역시 만만치 않은 상황이므로 골머리를 앓는 중이다.

 

극 중 선거판은 장차 대선까지 노리는 변종구뿐 아니라 그의 선거 캠프를 이끄는 냉철한 본부장 심혁수(곽도원), 캠프에 광고 전문가로 합류한 20대 박경(심은경), 변종구를 견제하는 당내 경쟁자 등의 욕망이 얽히고설킨 공간이다. 동시에 그곳은 서로를 속고 속이는 징글징글한 쇼가 펼쳐지는 무대이자 피가 튀는 전쟁터로 묘사된다. 정당과 언론의 유착 관계, 상대편을 공격하기 위해 후보와 그 가족들의 사생활까지 낱낱이 파헤치면서 물어뜯는 경쟁, 이슈 조작 등이 난무한다. 이 과정에서 시민을 위한 고민과 공약들은 아주 당연하다는 듯 휘발된다. 아군과 적군의 경계 역시 점차 흐릿해진다.

 

극 중 인물과 배경 등은 특정인이나 실제 사건을 모델로 한 것이 아니다. 이 영화는 사람들의 뇌리에 강하게 남은 현실 정치의 어떤 풍경들을 그대로 가져와 베끼듯 풍자하는 대신, 그간 한국 정치와 선거가 어떤 식으로 흘러왔는가에 대한 나름의 고찰을 통해 현실에 존재할 법할 캐릭터를 세공하는 데 집중했다. 철저한 현실 반영의 결과물이라기보다 권력욕으로 드글대는 인물들이 저마다의 목적을 위해 움직이도록 만든 캐릭터극에 가까운 것이다. 그러므로 당연히 이 영화에서는 현실 정치를 향한 고발과 각성이 아닌 캐릭터 관찰이라는 목적성이 더 두드러진다. 정치인의 욕망을 탐구하기 위해선 그것이 최고조로 치달을 뿐 아니라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선거판이란 무대가 제격이었을 테고 말이다.

 

 

정치 소재로 한 한국 상업영화 손에 꼽을 정도

 

조금 도식적인 캐릭터이긴 해도 정치 혹은 정치계에 이상을 품었다가 점차 환멸을 느끼며 고민하는 청년 세대를 대변하는 인물인 박경의 존재는 흥미롭다. 그가 극 중의 중요한 축이자 관객을 선거판의 풍경 속으로 이끄는 안내자가 된다는 점은 감독이 균형 잡힌 인물 구성을 고민한 결과로 보인다. 실제로 박경은 변종구의 편에 서기도, 그와 대립하기도 하면서 극의 긴장을 만들어 나간다. 박경에 비하면 임팩트가 조금 떨어지긴 하지만 상대편 캠프의 선거 전문가 임민선(류혜영)도 기능적으로는 비슷한 역할이다.

 

아쉬운 것은 변종구에게 일어난 치명적 사건이 그의 발목을 잡아끄는 후반으로 갈수록 각 캐릭터의 개성이 점차 무너지고 만다는 점이다. 동시에 영화는 돌연 예상 가능한 전개를 갖춘 스릴러로 변모한다. 선거판 묘사는 뒷전으로 물러나고 여느 장르 영화에서 줄곧 봐온 것만 같은 익숙한 흐름만이 남는다. 기껏 입체적으로 세워놓았던 주변 인물들은 급작스러운 퇴장을 맞이하거나 변종구의 배경에 가까운 역할들로 부질없이 밀려난다. 박경 정도가 선거에서 유권자들의 역할과 선택이 얼마나 중요한지 묵직한 질문을 던지는 캐릭터로 마무리되지만, 그것마저 극 안에서 아주 자연스러운 흐름처럼 보이지만은 않는다.

 

그럼에도 《특별시민》이 의미 있는 작품인 것은, 권력을 향한 욕망을 먹고 자라는 괴물들이 모인 정계라는 정글의 생리를 이토록 끈질기게 들여다보는 시도 자체가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부패한 정치인, 인물 간 음모와 배신을 다룬다는 점에서 기시감이 먼저 드는 소재라고 느낄 수도 있지만 의외로 정치, 특히 선거를 전면에 내세워 이야기를 풀어간 한국 상업영화는 손에 꼽을 정도다. 계보를 따라가면 1991년 개봉한 강우석 감독의 《누가 용의 발톱을 보았는가》 정도를 언급할 수 있을 뿐이다.

 

《내부자들》을 비롯해 올해 1월 개봉했던 《더 킹》까지 가까운 과거에 개봉했던 일련의 영화들이 ‘정치 영화’가 아니었느냐고 반문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영화들은 검사가 주인공이며, 정경유착을 비롯한 부정부패를 일삼는 권력의 추함을 꼬집고 풍자하는 걸 주 목적으로 하는 하나의 유행 장르로 분류되는 편이 더 옳을 것이다. 이 과정에서 정치 관련 이슈는 이유도 목적도 불분명하게 단순히 조롱의 대상으로 전락하기 십상이다. 충분한 고민을 거친 영화적 가공이 아닌 1차원적 현실 반영에 그치는 우려를 범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특별시민》은 적어도 답답한 현실 세계의 풍경들을 알리바이 삼아 관객들의 울분을 손쉽게 자극하는 영화는 아니다. 다만 기왕 선거판이라는 신세계에 카메라를 들이댄 이상 보다 적나라하고 과감한 전개를 보여줬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만큼은 분명히 남는다. 절반의 성공, 절반의 실패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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