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가장 약한 자도 살아남을 수 있는 사회가 되길
  • 남인숙 작가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7.04.28 11:37
  • 호수 1436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언젠가 캐나다로 이민을 간 지 얼마 안 된 지인이 이런 말을 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여기 와서 가장 먼저 느낀 게, 어디에 가나 장애인이 너무너무 많다는 거야. 기분 탓인가?” 그게 기분 탓이 아니라는 건 이야기를 듣자마자 알 수 있었다. 그 나라에 장애인이 특별히 많은 게 아니라, ‘바깥 활동을 하는’ 장애인이 많은 것이다. 한국에도 그만한 비율로 장애인들이 있지만, 부족한 사회적 인프라와 인식 때문에 거리로 나서지 못하는 것이다.

 

4월20일 장애인의 날을 맞아 나온 기사들 중 눈에 띄는 것이 있었다. 장애인 채용 정책이 있는 한 커피 프랜차이즈 카페에서 고객이 장애인 점장의 서비스를 거부한 사건이 기사의 중심이었다. 이런 기사가 아니라도 필자는 여러 경로를 통해 이곳이 장애인들이 살기에 쉽지 않은 나라라는 것을 절감했다. 필자는 다리를 다쳐 며칠간 한쪽 다리를 절면서 다닌 적이 있었는데, 많은 사람들의 노골적인 시선에 충격을 받았다. 직접 겪기 전에는 결코 알지 못했을 종류의 시선이었다. 휠체어를 간접 체험해 볼 수 있는 유모차를 밀어본 몇 년 동안은 왜 장애인들이 외출을 어려워하는지 몸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전에 잠깐 봉사한 복지관에서 장애인들의 피부가 하나같이 유난히 희고 고와서 의아해한 경험이 있다. 알고 보니 외출을 거의 하지 못해 햇빛에 의한 피부손상을 받을 일이 없어 그랬던 것이었다. 그렇다면 한국인들은 캐나다인들보다 미개하고 악해서 장애인에 대해 차별적인 인식을 가지는 것일까?

 

ⓒ Pixabay

인간이 지구상에 번성하게 된 결정적 이유는 가장 약한 개체도 살아남게 할 수 있는 거대하고 단단한 공동체를 형성할 수 있어서였다. 구성원이 그 집단 내에서 가장 강한 서열에 머물지 못하면 생존할 수 없다는 불안감이 있는 사회는 비리가 많고 불안정할 수밖에 없다.

 

몇 주 전 필자는 아버지의 교통사고라는 평범하지 않은 횡액을 만났다. 척추 손상으로 하반신 마비가 왔고, 장애를 입을 확률이 적지 않다는 의사의 소견을 들었다. 대한민국에서 평범한 벌이로 생활을 하는 사람이 환자가 되고 장애인이 되는 수순을 밟을 때의 추락을 예상하며 현실적인 계산을 해야 한다는 건 꽤 암담한 일이었다. 가족으로서 환자의 고통과 치료에 온전히 집중할 수 없다는 데 죄책감도 느껴야 했다. 누구라도 장애인이 될 수 있고, 누구라도 사회의 밑바닥으로 떨어질 수 있다는 식상한 구호는 누구라도 지나치기 쉬운 현실이기도 하다는 걸 깨닫고 있는 중이다.

 

인간 사회의 위대함을 확장시키는 건 아이러니하게도 인간의 이기성에 제동을 걸 수 있는 공동체의 가치다. 나라는 개인이 가장 취약한 존재로 추락하더라도 사회가 최소한의 보호는 해 줄 거라는 믿음이 있는, 그래서 불안해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 생업에 집중할 수 있는 사회를 꿈꾼다. 그런 사회를 지향하는 사람이 다음 대통령이 되고, 그 태도가 바뀌지 않게 압력을 가할 수 있는 국민. 그 변화된 모습을 기대해 본다. 우리의 성숙한 가치는 아직 자라고 있는 중이다. 

 

● 외부 필자의 칼럼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