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아의 지구 위 인류사(가야사 편)] 돌 하나에서 찾은 역사의 실마리
  • 이진아 환경․생명 저술가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7.04.26 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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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왜곡이 일어났다면 낙동강 수계의 가락국에만 일어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특히 반도 지형으로 엄청난 해상국가의 잠재력을 가진 우리 땅이다. 낙동강뿐 아니라 한반도 해안가, 그리고 거기서 이어지는 강 유역 지방은, 물길을 이용할 수 있는 환경만 괜찮았다면 어디나 가락국처럼 활발한 해상활동을 했던 과거를 갖고 있을 가능성이 아주 높다. 

 

그나마 가야의 본모습과 함께 우리 민족의 진정한 모습을 찾으려는 노력이 상당히 진행될 수 있었던 것은 삼국유사에서 《가락국기》라는 축소, 변형된 기록으로나마 남아 있기 때문이다. 또 거기 있는 문장 하나를 보고 김해까지 내려가 당시 논 한 가운데 놓여 있던 몇 개의 돌을 쌓은 돌무더기를 보고, 한민족의 위대했던 과거를 직감하고 삶을 불태우는 열정을 이어갔던 이종기라는 탐구자와, 이에 공감해서 탐구를 이어갔던 많은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조금이라도 관심을 갖고 찾아본다면, 그리고 우리 민족의 과거를 축소지향형으로 보는 태도에서 벗어나 좀 더 자유로운 시각을 갖기만 한다면, 한민족의 위대했던 과거를 짐작할 수 있게 해주는 근거들은 도처에 널려 있다. 

 

예를 들면 백제가 일본에 앞선 문물을 전파했다는 건 이젠 어린아이도 아는 상식이다. 그 문물 전파의 대표 아이콘으로 꼽히는 사람 중에 ‘왕인’이라는 이가 있다. 일본에 한문을 전해준 것으로 알려져 있는 사람이다. 이 사람의 출신지가 지금의 전라남도 해안가 도시인 강진 지방으로 그곳에서 일본에 오고갔다는 것은 그만큼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서울이라는 거대도시가 오늘날 한국을 대표하는 상황에 살고 있는 우리로서는 백제인으로 역사에 남을 정도 활약한 사람이라면 거의 무의식적으로 백제의 수도 부여나 공주 출신일 걸로 생각하기 쉽다. 왜 하필 멀리 떨어진 한반도 남단 바닷가 마을 강진에서 건너간 사람이 일본 황족의 스승이 됐는지 얼른 이해가 가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백제라는 국가도 가야처럼 해상활동을 활발히 했던 소국들의 연맹체였다는 사실을 이해하면, 그 사실이 충분히 납득될 수 있을 것이다.

 

경남 김해시에 남아 있는 파사석탑. 수로왕의 비 허왕후가 동한건무 24년 갑신에 서역 아유타국에서 머나먼 바다를 건너올 때 파신의 노여움을 잠재우기 위해 배에 이 석탑을 싣고 왔다고 삼국유사 등 고서에 기록되어 있다. 출처/문화재청 ⓒ 사진=연합뉴스

백제도 해상활동을 위주로 한 연맹체의 일부였다

 

작은 예를 하나 더 보자. 전라남도 해남군 북평면 이진마을. 북쪽으로 커다란 두륜산계를 두고 있고 서쪽으로 정기가 강한 것으로 알려진 달마산을 두고 있으며, 동남쪽으로 바다로 이어지는 마을이다, 지금의 모습은 작지만 상당히 영화로운 과거 얘기가 마을 사람들 사이에 대대로 전해져 온다. 옛날부터 천하가 흉년이어도 이 일대는 굶지 않는다는 말이 전해 올 정도로 풍요로운 땅이라는 것이다. 

 

마을 노인들 사이에는 아주 오랜 옛날, 멀고 가까운 여러 나라들로부터 이 마을로 식량을 구하러 오는 배들이 줄을 이었던 때가 있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 마을 앞쪽 바다의 이진 포구는 지금은 퇴적물이 많이 쌓여 바닥이 높아져 마치 개펄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지만 한때는 아주 큰 배들이 드나들었던 번성한 항구였다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지금까지 익숙해져 온 대로 역사를 판단한다면 그런 얘기는 허무맹랑한 민담으로 간주했을 것이다. 이 마을에 관해서는 역사기록 같은 게 전혀 없음은 물론, 그런 구비 전승이 있다 해도 지금의 마을 외관을 보면 정말 상상이 가지 않는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눈으로 보이는 것 외에도 여러 가지를 종합적으로 봐서 판단할 줄 안다.

 

 

위 지도에서 보다시피 이진마을은 두륜산이 북쪽, 달마산이 서쪽에서 오는 찬바람을 막아주고 풍부한 영양물질을 공급해주는 위치, 동남쪽으로 바닷길이 열려 완도를 마주하고 있으면서 더 넓게 동남아시아로 향해가는 길목에 자리 잡고 있다. 이런 지리적 및 지형적 특성을 고려해볼 때 때 이진마을은 기온이 높고 식생이 풍부했던 시기에는 가락국이나 광동지방, 혹은 아테네나 로마처럼, 상당히 강력한 해상국가로 활동했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이젠 아무도 그런 옛날의 모습을 인정해주지 않는다. 이곳에 대대로 살아온 촌로들이 어렸을 때 할머니, 할아버지로부터 들었던 옛날얘기 속 외에는 어디에도 그 옛날의 영광을 찾아볼 수 있는 흔적이 남아있지 않은 것 같다. 커다란 항구가 있었다고 보기엔 너무 얕고 좁은 마을 앞 바닷가는 아무리 상상력을 발동하려 해도 그런 그림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먼 것 같다.

 

그런데 단 한 가지, 관찰력 뛰어난 사람이라면 눈길을 줄만한 부분이 이 마을에 있다. 그것은 바닷가에 있는 집들의 돌담이다. 어른 혼자서 들 수 있을 정도의 크기로 보이는 커다란 돌들로 담과 축대를 쌓은 집들이 보이는데, 그 돌들 중에서 유난히 돋보이는 돌들이 듬성듬성 박혀 있다. 

 

이 지역 문화사 전문가인 박필수씨는 그게 외국에서 온 돌이라고 한다. 오랜 옛날, 이진 포구가 커다란 항구였고, 천하에 흉년이 들어도 이 지방만 먹을 것이 넉넉했기 때문에 먼 나라에서 배들이 곡식을 사러 왔던 때 얘기다. 당시에는 원거리 항해용 선박은 다 돛단배였다. 돛단배는 위쪽에 달린 돛으로 바람을 받아 움직이기 때문에, 배 아래쪽에 무거운 것을 실어서 무게 중심을 낮추어주어야 한다. 안 그러면 배가 쉽게 뒤집히니까. 그래서 빈 배로 곡식을 사러 오는 이들은 배 밑에 돌을 실어 무게중심을 최대한 낮추어서 왔다는 것이다. 곡식을 싣고 돌아갈 때는 곡식 가마니의 무게 때문에 돌들을 내려놓아야 한다. 그렇게 해서 이진 포구에 내려진 이국 땅의 돌들 중 일부가 아직까지 전해진다는 것이다.

 

 

인적 물적 교류 활발했던 해상연맹체들

 

이종기는 김해 수로왕릉에 있던 파사석탑의 석재가 한반도에서 나오는 종류가 아니라는 점에 착안, 황옥공주의 바닷길을 탐사해서 밝혀냈다. 아닌 게 아니라 이진마을의 돌담을 이루는 일견 평범해 보이는 돌들 중에서도, 이 땅의 것이 아닌 돌들은 유난히 눈에 띤다. 마치 먼 타국의 외국인이 우리 속에 섞여 있으면 눈에 띠듯이. 

 

앞서 본 《가락국기》 원문에, 허황옥 공주를 가락국까지 데려다주었던 뱃사람들 15명에게 각각 쌀 10섬과 베 30필을 주어 본국으로 돌아가도록 했다는 기록을 다시 들여다보자. 총 150섬의 쌀과 300필의 베를 싣고 돌아가기 위해서는 올 때 “파도 신의 노여움을 달래기 위해” 싣고 왔던 무거운 돌들을 내려놓아야 했을 것이다. 어쩌면 황옥공주는 태백산계와 소백산계가 만나 지붕처럼 보호해주는 풍요로운 지형에서 성장하고 있었던 신흥강자 가락국의 풍부한 물자를 보고 새롭게 우호적 교역관계를 맺기 위해 아요디아 혹은 아유타야 국이 보낸 선발대일 수도 있다. 

 

예나 지금이나 세력이 큰 집단끼리 우호적인 동맹 관계를 맺기 위해 제일 먼저 하는 일 중 하나가, 동맹 대상 집단의 사람과 자신 집단의 사람을 결혼시켜 인척관계를 형성하는 일이다. 가락국 뿐 아니라 한반도 해안가에 형성되어 있었을 무수한 해상소국들이 모두 지금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먼 거리의 인간집단들과 그런 관계를 형성하면서 교류했다는 사실에 대해서, 최근의 역사학계는 막 주목하기 시작하고 있다.  

 

우리 역사를 보는 방식이 달라져야 한다. 현대 과학이 성취해낸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하고, 이 글로벌 시대에 당당하게 세계사 무대에서 있었던 일과 함께 비교해서 ‘융합’적으로 보는 방향으로. 그 방향으로 갈수록 한반도에 살았던 우리 조상들의 위대한 모습이 조금씩 드러나는 것은 참 기쁜 일이다.

 

(한편 그렇게 작은 마을이 어떻게 그런 대국 행세를 할 수 있었을까, 그렇게 얕은 바다로 어떻게 대양을 항해하는 범선이 드나들었을까 의문이 생길 수도 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2부에서 자세히 다루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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