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gain 1994? 1차 핵위기로 보는 ‘4월 위기설’
  • 조유빈 기자 (you@sisajournal.com)
  • 승인 2017.04.12 1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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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이 북한 폭격을 준비하고 있다.”

 

최근 이슈가 되고 있는 ‘4월 위기설’의 핵심이다. 미국이 시리아를 폭격한 데 이어 한반도 주변에 핵 항공모함 칼빈슨호를 재배치하자 4월 북폭설, 한반도 위기설이라고도 불리는 ‘4월 위기설’이 일파만파 퍼지는 중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대북 강경 발언과 북한의 핵실험 가능성, 국내 리더십 공백 등이 합쳐져 촉발된 4월 위기설이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등을 통해 급속히 확산되고 있다.  

 

4월 위기설은 김일성 생일을 기념하는 태양절(4월15일)을 앞두고 더 급속하게 퍼졌다. 기념일을 앞두고 북한이 6차 핵실험을 실행하거나 미사일을 발사할 가능성이 커지면서 미국 트럼프 정부가 북한을 폭격할 것이고, 중국도 이에 동의했다는 것이다. 여기에 미국의 핵심전략무기인 칼빈슨호가 한반도 인근에 배치되면서 실제 북한에 대한 공격이 임박한 것이 아니냐는 불안감이 더해졌다. 트럼프 대통령도 최근 “(선제타격을 포함한) 모든 가능한 옵션을 준비하라”는 강한 대응을 지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 해군의 핵추진 항공모함 칼빈슨호가 3월15일 오전 해군 장병의 환영을 받으며 부산기지에 입항하고 있다. © 연합뉴스

 

 

 

 1994년 1차 북핵 위기 재조명

 

사실 북한을 예방적 차원에서 타격해 핵시설을 제거하자는 미국의 선제타격론 주장은 과거에도 있었다. 1994년에는 실제 미국이 북폭을 고려했다. “전쟁이 일어나면 서울을 불바다로 만들겠다.” 1994년 3월 판문점에서 열린 남북 특사 교환 실무회담에서 북한 대표가 던진 말이다. 

 

이 발언으로 생필품 사재기 현상이 일어나는 등 전쟁에 대한 공포가 극단으로 치솟았다. ‘1994년 1차 북핵 위기’는 이렇게 한반도를 뒤흔들어 놓았다. 북한은 1993년 핵확산방지조약(NPT)을 탈퇴하면서 탄도미사일인 노동 1호를 발사하고 핵실험을 강행했다. 핵에 대한 공포는 당시 클린턴 정부를 움직이기에 충분했다. 

 

미국의 생각은 간단했다. 어떠한 일이 있어도 북한의 핵개발은 용인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북한은 영변 핵 연료봉을 교체하면서 미국을 비롯한 국제사회의 핵 개발 규제를 간단히 넘어서버렸다.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은 자서전 ‘My Life'에서 “북한의 핵무기 개발을 막기 위해서라면 전쟁의 위험도 감수해야만 했다”고 회고했다. 한반도에서의 또 다른 전쟁이 일촉즉발의 상황까지 내몰린 것이다. 실제로 1994년 5월18일, 미 국방부 펜타곤에서는 제2의 한국 전쟁 발발 가능성에 대한 회의가 열렸다. 

 

클린턴 정부의 대북 선제타격 계획은 북한의 핵시설 파괴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이른바 ‘외과 수술식 정밀 폭격’이다. 클린턴 전 대통령과 당시 4성 이상의 장군들의 회고록을 보면 미국은 같은 해 6월14일 영변에 대한 폭격 방법을 실제로 논의했다. 재래식 순항 미사일을 통해, 영변 재처리 시설‧원자로는 물론 주요 군사시설까지 폭격하는 방안이 논의됐다. 북한에 대한 폭격은 곧 한반도의 전쟁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디데이(D-day)는 6월16일. 북한이 영변 원자로에서 폐연료봉을 꺼내 재처리를 시작하는 날을 선제 폭격 실행일로 잡은 것이다. 한반도에서의 또 다른 전쟁은 기정사실화되는 듯했다. 

 

“(한국 전쟁에 대한 예상 시나리오) 보고서를 받았는데, 그 내용은 전쟁이 일어날 경우 양측이 입을 막대한 피해 규모에 관해 정신이 번쩍 드는 내용이었다.”

 

클린턴 대통령은 한반도에서 전쟁이 발발했을 경우 피해 규모가 ‘정신이 번쩍 들’ 정도였다고 자서전에서 밝혔다. 당시 예상 피해 규모는 전면전이 발생할 경우 3개월 안에 미군 5만2000명, 한국군 49만 명이 전사하는 것으로 집계됐다. 수도권 북방에 배치된 북한군의 장사정포로 인해 수도권 등지에서만 민간인 100만여 명이 사망하고, 전쟁이 장기화 될 경우 미군과 한국군 100만여 명 이상이 사망할 수도 있다는 예상도 나왔다. 

 

이런 와중에 미국은 한국에 있는 미국 민간인 소개 작전을 실행했다. 주한미군 가족과 외교관 및 그 가족을 1순위, 일반 민간인과 시민권자를 2순위, 소수의 한국인이 3순위로 분류해 비상시 집결지 등을 통보하기까지 했다. 심지어 애완동물 철수계획까지 수립됐다. 6월6일에는 민간인 소개 작전에 대한 대대적인 훈련을 가지기도 했다. 

 

한국 정부는 즉각 반발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레이니 주한 미국대사를 불러 강력 항의하면서 “한국군의 통수권자로서 (전쟁이 발발한다면) 군인 60만 중에 절대 한 사람도 동원하지 않을 것”이라는 엄포를 놓았다.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도 북한을 개인 자격으로 방문해 전쟁을 막으려 나섰다. 이 시기는 북한에 대한 미국의 선제공격 디데이가 포함돼 있다. 

 

 

“미국이 우리 땅을 빌려서 전쟁을 할 수 없다”

윌리엄 페리 전 국방장관의 회고록에 따르면, 6월16일 정오에 북한 핵 시설에 대한 폭격이 가해질 예정이었다. 페리 전 장관은 “작전 개시를 불과 한두 시간을 앞두고 카터 전 대통령으로부터 연락이 왔다”면서 “북한이 카터 전 대통령을 통해 ‘모든 핵 재처리 활동을 중단하면 미국 역시 제재 및 미군 증강을 유보하고 협상에 나서야 한다’고 제안했다”고 당시를 설명했다. 이후 KEDO(한반도 에너지 개발기구)가 만들어지면서 북한의 핵시설 폐기와 이를 대체할 경수로 건설에 대한 합의가 이뤄지게 된다.

 

20년이 지난 이제 다시 북폭설이 제기되고 있다. 긴장 고조 상태도 앞으로 상당기간 계속될 것으로 전망된다. 그러나 미국이 한국 정부의 동의 없는, 독자적 전쟁을 치르기 어렵다는 사실은 1994년과 비슷하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당시 상황에 비추어볼 때 선제타격 가능성은 현실적으로 낮다고 보는 것이다. 

 

군사전문가인 김종대 정의당 의원은 라디오 인터뷰를 통해 “4월 북폭설이라는 것은 아무리 충동적 성향이 강한 트럼프 정부라고 하더라도 실현 불가능하다”며 “긴장이 고조되고 있다는 것은 인정되지만 선제공격은 다르다. 우리 국민들이 사재기하고 대피해야 할 전쟁 위기가 아닌, 이런 흐름을 악용하는 세력들이 만들어낸 가짜 뉴스”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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