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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저널

우연이 겹쳐 운명을 만든 문재인 삶의 변곡점

특전사·인권변호사·노무현재단 거쳐 두 번째 대권 도전

이민우 기자 ㅣ mwlee@sisajournal.com | 승인 2017.03.29(Wed) 08:30:00 | 143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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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 같은 것이 나를 지금의 자리로 이끌어온 것 같다. 노무현 변호사를 만나고, 지금에 이르게 된 것도 마치 정해진 것처럼 느껴진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유서에서 ‘운명이다!’라고 했다. 내 삶도 그런 것 같다.”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자서전 《운명》의 표지에 이 같은 말을 남겼다. 피난민의 아들로 태어난 운동권 대학생이 특전사로 갔고, 사법연수원을 차석으로 수료했지만 시위 전력 때문에 판사로 임용되지 못해 인권변호사의 길을 걷게 된 우연. 이때부터 시작된 노무현 전 대통령과의 동행은 결국 정치인 문재인을 탄생시켰다. 헌정 사상 첫 대통령 탄핵을 거친 조기 대선에서 대세를 형성하고 있는 문 전 대표는 어쩌면 이를 자신의 운명으로 받아들이는 듯하다. 문 전 대표 앞에 펼쳐질 운명을 과거의 성장사를 통해 추론해 보고자 한다.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정치를 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참여정부에 참여했다. 문 전 대표는 2004년 참여정부의 초대 민정수석을 1년 만에 사임하고 히말라야로 트레킹을 떠났다. © 시사저널 포토

 

 

운동권 대학생, 특전사에 가다

 

문 전 대표의 어린 시절을 상징하는 단어는 ‘가난’이다. 그의 부친은 6·25 전쟁 당시 함경남도 함흥에서 미군 선박을 타고 경남 거제도에 마련된 피난민수용소로 내려와 문 전 대표를 낳았다. 부산 영도로 이사한 뒤에도 가난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가난은 그에게 자립심과 독립심을 선물로 줬다. 힘들게 보여도 가능하면 혼자서 해결하려는 자세였다. ‘돈이 중요하긴 하지만 제일 중요한 건 아니다’는 가치관은 살아오는 동안 큰 도움이 됐다고 한다.

 

책을 가까이하던 어린 시절의 문재인은 경희대 법대로 진학했다. 역사학과를 가고 싶었지만 담임선생님과 부모님의 반대로 법대를 택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유신을 통해 영구집권을 시도하던 시대적 상황은 그를 광장으로 이끌었다. 학내에서 유신반대 시위를 주도한 이유로 구속된 그는 집행유예를 선고받고 석방됐다가 강제징집을 당했다.

 

문 전 대표를 상징하는 단어 중 하나는 ‘특전사’다. 흔히 야당 정치인에게 숙명처럼 여겨지는 ‘색깔론’을 방어할 수 있는 하나의 카드로 여겨졌다. 문 전 대표는 1975년 8월 강제징집을 당해 입대했는데, 특전사령부 예하 제1공수 특전여단 제3대대에 배치됐다. 학생운동 전력으로 ‘신원특이자’가 되면서 훈련이 힘든 부대에 배치된 것이다. 여단장은 전두환, 대대장은 장세동이었다. 그는 특전사 복무 시절 폭동진압 훈련도 받았지만, 실제로 폭동진압에 출동한 일은 없었다. 문 전 대표가 제대한 후 그가 근무했던 부대는 부마민주항쟁이나 5·18 민주화운동 현장에 진압군으로 투입됐다. 강제징집을 당하지 않고 군복무를 좀 더 늦게 했다면 문 전 대표 또한 국민을 향해 총을 겨누는 역할에 동원됐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특전사 동기인 최경원씨는 이등병 문재인을 ‘지독한 놈’으로 기억한다. 표창장을 받을 정도로 모범적인 사병이었지만,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바로 다리가 휘어 ‘차렷’ 자세가 어려웠던 것이다. 이때 조교가 두 개의 띠를 가져와 다리를 묶고 잘 것을 지시했다. 최씨가 매일 밤마다 이등병 문재인의 다리와 발목을 묶었는데, 몰래 느슨하게 푸는 일이 없었다. 특전사 부사관으로 복무했던 이형만씨는 문 전 대표에 대해 “다른 병사들에 비해 약체였지만 체력과 정신력이 좋았다”고 기억한다.

 

문재인 전 대표를 상징하는 단어 중 하나는 ‘특전사’다. 왼쪽부터 문 전 대표의 특전사 복무 시절 모습, 성악가 김정숙씨와 결혼하는 모습, 변호사 시절 모습 © 시사저널 포토


 

인권변호사의 길에서 만난 노무현

 

제대 후 문 전 대표의 부친이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뒤늦게 사법시험을 보기로 하고 공부를 시작했다. 1980년 5월17일 신군부가 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면서 문 전 대표는 계엄포고령 위반으로 체포돼 청량리경찰서 유치장에 수감됐다. 문 전 대표는 유치장에서 사법시험 합격 소식을 들었다. 사법연수원을 차석으로 마치면서 법무부장관상을 받고 판사를 희망했으나, 시위 전력으로 판사로 임용되지 못했다. 검사를 할 수도 있었으나 적성에 맞지 않았다.

 

결국 택한 변호사의 길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과의 운명적인 만남이 이뤄진다. 당시 문 전 대표에게 김&장을 비롯해 이름난 법률법인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왔다. 문 전 대표 또한 솔깃했지만 평범한 변호사의 길을 가기로 했다. 어머니도 모실 겸 부산으로 내려갔다. 사법시험 동기였던 박정규 전 청와대 민정수석의 소개로 노 전 대통령을 만나게 됐다. 첫 만남에서 소탈하고 솔직한 노 전 대통령에게 매력을 느끼고 바로 같이 일하기로 결정했다. 처음부터 인권변호사의 길을 걸으려고 작정했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들을 찾아오는 사건을 피하지 않았고, 그들의 말에 공감하다 보니 노동·인권 변론의 중심 역할을 하게 됐다. 부산 미문화원 점거농성 사건, 부산상공회의소 점거농성 사건 등을 도맡아 하다 보니 어느 새 노동·인권 변호사가 돼버렸다.

 

변호사 시절 오해를 샀던 사건도 있다. 문 전 대표가 ‘노동자를 위한 연대’ 부설 노동상담소 소장으로 있을 때의 일이다. 노동조합원이나 활동가를 대상으로 법률 교육을 많이 하는데, 주로 문 전 대표가 강의를 맡았다. 다른 강사들은 강의료를 사양하거나 뒤풀이 비용에 보태곤 했는데, 문 전 대표는 꼬박꼬박 챙겨갔다고 한다. 책정된 수입이니 꼭 받아가야 한다는 원칙이었다. 그러면서 해당 단체의 회비는 늘 두 배를 냈다고 한다.

 

1987년 6월 항쟁 이후 동업자였던 노 전 대통령은 거리로 나갔다. 7~8월 노동자 대투쟁의 결과로 벌어진 노동자 구속·해고 사건은 문 전 대표의 몫이었다. 결국 노 전 대통령이 대우조선 사건으로 구속되자 문 전 대표가 진상조사소위원회 위원장을 맡게 된다.

 

이듬해 초 김영삼 전 대통령(당시 통일민주당 총재)은 노 전 대통령을 영입한다. 노 전 대통령의 출마에 문 전 대표도 찬성했고, 1988년 4월 정치인 노무현의 인생을 만들었다. 문 전 대표는 뒤늦게 이를 후회했다. 노 전 대통령의 정치적 좌절과 고통을 볼 때마다 그랬다. 문 전 대표는 “바보 노무현은 끝내 대통령이 됐지만, 비운의 일을 겪고 나서 처음부터 말렸어야 한다는 회한이 남는다”고 말했다.

 

문재인 전 대표는 정치적 동지였던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 이후 “(정치 참여를) 처음부터 말렸어야 했다”고 말했다. © 시사저널 포토


 

‘리틀 노무현’ 문재인의 홀로서기

 

이후 문 전 대표의 활동에 대해선 잘 알려진 내용이 없다. 부산에서 변호사 활동을 하던 문 전 대표는 2001년 대선 출마를 선언한 노무현 전 대통령을 도와 부산선거대책본부장을 맡았다. 대통령에 당선된 노 전 대통령은 문 전 대표에게 민정수석비서관을 맡긴다. 정치에 찬성했던 마음의 빚 때문이었다. 문 전 대표는 ‘민정수석으로 끝낸다’ ‘정치하라고 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민정수석을 맡았다. 하지만 문 전 대표는 이후 시민사회수석, 대통령 비서실장을 맡았다. 

 

문 전 대표는 노 전 대통령의 퇴임과 함께 시골 생활을 시작했다. 청와대에 몸담았던 사람이 바로 변호사를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해 몇 달을 양산 집에서 칩거했다. 격식이 필요한 자리에선 노 전 대통령 체면을 위해 요청할 때마다 봉하마을을 찾았다. 문 전 대표는 “봉하마을을 가끔 찾을 때마다 기분이 좋았다. 소박함에서 행복을 느끼는 전직 대통령, 또 그를 바라보며 즐거워하는 국민들의 미소 덕분이었다”고 말했다. 

 

2009년 5월23일 노 전 대통령의 급작스러운 죽음이 찾아왔다. 수백 개의 플래시가 터지는 기자회견장에서 문 전 대표는 노 전 대통령의 서거 소식을 국민들에게 알렸다. 장례가 끝난 후 노 전 대통령의 뜻을 이어 가기 위해 노무현재단 상임이사직을 맡았다. 이후 친노(親盧) 세력의 상징이 되면서 운명처럼 정치인의 길을 걷게 됐다.

 

그렇게 시작된 정치인의 길 역시 부침(浮沈)이 많았다. 정권교체를 위해 2012년 19대 총선에 출마해 부산 사상구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같은 해 대권에 도전했지만 박근혜 전 대통령에게 약 100만 표 차이로 패했다. 이후 백의종군을 자처했던 그는 2014년 12월 새정치민주연합의 당 대표가 된 뒤 친노 세력의 후계자로 인정받았다. 당권을 장악한 이후 친노 진영은 친문(親文) 세력으로 급격히 전환됐지만, 오히려 친문 패권주의라는 공격을 받게 된다. 조기 대선을 앞두곤 대세론을 형성하며 ‘반문(反文)연대’라는 단어가 공공연히 나올 정도다.

 

문 전 대표는 친노 세력의 또 다른 적통으로 불리는 안희정 충남지사와 건곤일척의 승부를 펼치고 있다. 노 전 대통령은 생전 ‘절대 정치는 하지 마라’는 고언을 남겼지만, 그의 적자로 불리는 두 사람은 대선 길목에서 정면으로 마주쳤다. ‘대연정’과 ‘선의(善意)’ 발언, ‘전두환 표창장’ 논란 등에서 벌어지기 시작한 갈등의 골이 돌이킬 수 없을 만큼 파였다는 평가도 나온다.

 

현재까지 문 전 대표는 2017년 장미 대선에서 청와대에 가장 가까이 다가가 있는 인물이다. 하지만 역대 대선에서 대세론은 늘 부침의 역사를 겪었다. 그는 노 전 대통령이 머물렀던 청와대에서 ‘완전히 새로운 나라’를 꿈꾸는 개혁의 선구자가 될까, 아니면 야인으로 돌아가 생계를 책임지는 평범한 자연인이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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