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커 기다리는 자영업자들이 무슨 죈가
  • 김유진 푸드 칼럼니스트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7.03.16 15:58
  • 호수 1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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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진의 시사미식] 생기 잃고 썰렁해진 2017년 3월의 명동 거리

궁금했다. 정말로 사드 배치 때문에 유커(중국인 관광객)가 사라졌는지. 궁금하면 도통 이겨내지 못하는 성미 탓에 필자는 직접 명동에 왔다. 습관이란 무서운 거다. 명동을 걷는 시작은 늘 중앙우체국이다. 화상(華商)이 운영하는 중국집을 지나 대사관, 그리고 화교학교가 있는 작은 골목을 걷는다. 화교학교 담벼락에는 노점이라고 이름 붙이기도 애매한 붙박이 상점들이 몇몇 버티고 섰다. 보는 것만으로도 이마에 주름이 잡히는 바이주(白酒)와 월병·잡지 등을  파는 곳이다. 담벼락에 바짝 들러붙은 모양새라 벽장처럼 보인다. 사나운 바람이 몰려드는 골목에 노파들이 서성인다. 호객을 하는 일은 없다. 그들끼리의 묵계이리라.

 

명동에 유커, 아니 중국인들이 등장하기 시작한 건 임오군란(1882년)이 있고 여러 해 뒤의 일이다. 이 땅에 발을 들여놓은 중국인들은 세 부류로 나뉜다. 무역과 관련된 장사를 하거나 요릿집을 하거나 농사를 지었다. 무리 중 발 빠른 일부가 명동에 자리를 잡았다. 대단한 생활력을 가진 인류다. 호떡과 짜장, 그리고 바이주를 한반도에 이식시키며 삶을 이어갔다. 낯선 땅에서 공존으로 이어지는 흡수가 빨랐다. 대의명분이 있으면 언제고 그 뜻을 같이했다. 1949년 12월11일 경향신문에는 이런 기사가 실렸다. ‘화교전체대회. 현하 긴급국내외 정세에 대처하여 화교의 역량을 총집중해서 한·중 양국의 친선을 도모하며 반공정책을 적극 추진시키고자 제 일자 여한화교전체대회를 어제 십일 오전 구시부터 시내 명동에 있는 중국대사관 강당에서 개최하였다.’

 

사드 배치 결정에 대한 중국 당국의 보복이 계속되고 있는 3월9일 오전, 평소 유커들로 북적이던 서울 중구 명동 거리가 한산하다. © 시사저널 고성준

명동 공기 꽉 채우던 중국어 들리지 않아

 

동거는 언제고 이별을 고하기 마련이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이 땅에 발붙이고 살던 화교들의 입장이 곤란해졌다. 북경어를 쓰든, 광동어를 쓰든, 죄다 중공군과 한 족속으로 치부되었다. 상당수는 대만을 비롯해 동남아시아와 미국행을 택했다. 그리고 일부는 도시를 떠나 농촌으로 향했다. 많지 않지만 지금도 농업에 종사하는 분들이 있다. 이후 숨을 죽이고 그들만의 작은 천국을 만들기 시작했다. 생존본능은 이념을 무색하게 만든다. 순응하고 적응하면 살게 되는 법. 교육권·토지소유권까지 제한받는, 전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화교 탄압 정책에도 꿋꿋하게 버텨왔다. TV에서 ‘사부’로 칭송받는 여러분들도 이 시대를 지나왔다. 많은 생각이 들게 하는 골목이다.

 

여기를 빠져나오면 작은 네거리가 있고, 유커와 싼커(중국인 개별관광객)들의 성지로 불리는 영양센터와 장수갈비를 만날 수 있다. 쇼케이스 안을 뱅뱅 도는 전기구이 통닭 앞에서 관광객들은 인증샷을 찍었었다. 그러나 공기를 꽉 채우던 중국어는 들리지 않는다. 독특한 성조 때문에 고개가 절로 돌아가기 마련인데, 오늘은 그 자극이 일본어로 대체된다. 굳이 입을 벌리지 않아도 일본인과 중국인은 구분이 간다. 옷 입는 스타일, 가방을 드는 팔 모양, 걷는 발의 각도가 그 구분점이다. 참, 손가락질도 변별을 돕는다. 유커들은 손을 뻗어 손가락을 심하게 흔들어대는 반면 일본인 관광객들은 대놓고 삿대질을 하지는 않는다. 쇼케이스 안에서 구워주는 장수갈비 앞에도 팔을 뻗은 채 웃어 젖히는 중국인 관광객들은 찾을 길이 없다. 코를 들이밀고 까르르대던 그 모습도 삽시간에 사라져버렸다. 가게 앞에 진을 치고 호객행위를 하던 발랄한 언니·오빠들의 모습도 종적을 감췄다.

 

거리는 생기를 잃었다. 대형 고깃집을 운영하고 있는 사장님이 필자를 알아보고 인사를 건넨다. 목소리는 평상시보다 두 톤쯤 가라앉아 있다. “반절로 준 거 같아요. 번 돈 까먹고 있다니까요. 얼마나 갈지 원….” 빙그레 웃어주는 걸로는 위로가 되지 않으리라. 불과 50m도 떨어져 있지 않은 패션 브랜드 건물로 들어갔다. 썰렁하다. 히터를 빵빵하게 틀었는데도 온기가 없다. 매장의 난방은 체온으로 하는 모양이다. 더 볼 것 없다는 생각이 발길을 돌리게 만든다. 단체여행 제재가 만든 결과라면 한류 광팬들의 개인여행은 그래도 숨이 붙어 있지 않을까? 별의별 걱정을 다 하며 유네스코 회관으로 이어지는 노점골목으로 접어든다.

 

이 골목은 좀 다르다. 좁은 탓도 있겠지만, 어깨를 부딪힐 정도는 채워져 있다. 여기저기 중국어가 들려온다. 반가운 나머지 고개를 돌려 얼굴을 확인한다. 그래, 국가가 막을 수 있는 게 있고, 막을 수 없는 게 있지. 가지 말란다고 다 안 가면 인간사회가 아니다. 그까짓 관광객 좀 주는 게 뭐 그리 큰 대수냐고 차갑게 이야기할 분도 계시리라. 하나 길어진다면 심각하다. 유커가 오지 않는다고 임대료를 내려줄 건물주는 많지 않다. 매출이 줄면 인건비도 부담스러워진다. 발주량도 줄어든다. 도매상은 물론 몇몇 업종은 제조사까지 타격을 받는다. 모두가 지갑을 닫고 있는 상황에서 그나마 한줄기 빛이었던 유커들마저 발길을 돌리면… 도저히 비상구가 보이지 않는다.

 

무의식은 무섭다. 어느새 명동에서 제일 유명한 칼국숫집 앞이다. 줄이 평상시보다 짧다. 자리에 앉으며 검지손가락을 곧추세워 주문을 한다. 워낙 손발이 척척 맞는 노포(老鋪)다 보니 오래 기다릴 필요가 없다. 주위를 둘러보다 오른쪽 아가씨와 눈이 마주쳤다. “아 유 차이니즈?” “……예스.” 영어를 못 알아들어서가 아니라, 고민을 한 모양이다. 대답이 나오기까지 몇 초가 흘렀다. 고맙기도, 미안하기도, 아쉽기도, 그리고 불안하기도 한 눈빛이었다. 이해한다. 한국 여행을 학수고대했을 텐데, 한껏 즐기기에도 모자란 시간일 텐데, 아무래도 양국 관계 때문에 복잡한 심경일 터다. 사드를 배치하고 또 보복성 금지조치를 내린 책임자도 아닌데, 그렇게 우리는 미안했고 또 서로 고마웠다.

 

종종걸음으로 국숫집을 빠져나가는 그녀와 나, 그리고 전국에서 유커들을 기다리는 자영업자들은 죄가 없다. 아니 이해관계자들을 제외하고는 서로 미워할 이유가 없다. 혹시 길거리에서, 사우나에서, 식당에서, 백화점, 그리고 마트에서 숨죽이고 한국을 몰래 사랑하고 있는 유커들을 만나면 밝게 웃어주자. 그러면 되는 거다. 관계가 악화될수록 득을 보는 사람은 없다.

 

‘띵’ 휴대폰에서 알람이 울린다. ‘중국에서 취소 잇따르는 한국행 비행기 예약…사드 보복성 조치에 항공업계 긴장’. 어이쿠, 여행 차원이 아니라 아예 비행기 예약을 취소한다고? 타격을 받을 사람이 더 늘어나겠군. 문제는 오지 않아서 피해를 입을 사람도 있지만,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서 가지 않을 사람 때문에 생기는 충격도 만만치 않다는 사실이다. 이래저래 입맛이 써지는 요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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