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선 주자 톺아보기-②] 안희정 충남지사, 균형감 있는 젊은 ‘김대중·노무현의 적자’
  • 소종섭 편집위원 (sisa@sisapress.com)
  • 승인 2017.02.09 09:19
  • 호수 1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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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영 논리 넘어선 통합 지도자 부각…정치자금법 위반 구속 등은 약점

요즘 정치권에서 가장 핫(hot)한 인물은 안희정 충남지사다. 1월 중순 이후 상승하기 시작한 지지도가 탄력을 받고 있다. 2월1일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이 대선 불출마를 선언한 이후 더 그렇다. 대선 주자 전체를 대상으로 한 지지율 조사에서 2위까지 올라섰다. 1위인 문재인 전 대표와 아직 격차는 있지만 흐름이 예사롭지 않다. 진영 논리에 갇히지 않은 균형 감각과, 상대를 비판하기보다 자신의 비전으로 승부하려는 자세가 돋보인다. 그는 김대중·노무현, 두 전직 대통령이 넘지 못한 역사의 문지방을 넘고 싶다고 감히 말한다. 정가에서는 안희정이 드라마의 주인공이 될 가능성을 거론하기 시작했다. 그는 과연 문재인 대세론을 허무는 이변의 주인공이 될 것인가.

 

안희정은 1964년 10월 충남 논산 연무읍 마산리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당시 대통령이던 박정희의 정(正)자와 희(熙)자의 앞뒤를 바꿔 희정(熙正)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2남3녀 중 셋째였다. 아버지는 철물점 주인이었다. 구자곡초등학교-연무대중학교를 나왔다. 중학교 3학년 때 박정희 대통령의 죽음을 계기로 사회의식에 눈뜨기 시작했다.

 

더불어민주당 대선예비후보 등록을 마친 안희정 충남지사가 2월2일 여의도 국회 당대표실에서 기자간담회를 열고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 시사저널 박은숙

고등학교 1학년 때 중앙정보부 끌려가

 

1980년 남대전고등학교 1학년 때 잡지 《창작과비평》 《다리》 등을 읽으며 전태일의 죽음을 알게 됐다. 황석영의 소설 《어둠의 자식들》, 김지하의 시 《오적》 등에서 강한 충격을 받고 학교를 그만두기로 결심하고 교과서를 죄다 팔았다. 대신 김학준의 《러시아혁명사》, E H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 한완상의 《민중과 지식인》 같은 책들로 가방을 채웠다. 신문지를 들고 대전역으로 가 깔고 자면서 소외된 자들의 현실을 경험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어렴풋이 ‘혁명’을 꿈꿨다.

 

어느 날 평소 다니던 서점 주인이 ‘평천하’라는 지하신문을 안희정에게 줬다. 이게 계기가 돼 서점 주인에게 편지를 보내기도 하고 만나기도 했다. 이 때문에 ‘대전 철공소’ 간판을 단 중앙정보부 대전지부에 끌려가게 됐고, 결국 남대전고등학교에서 6개월여 만에 제적당했다. 고향에 내려와 책을 읽으며 소일하던 그에게 아버지는 어느 날 농약병을 꺼내놓고 선택하라고 했다. “학교에 다시 갈래? 아니면 이것 먹고 나랑 죽을래?”

 

안희정은 1981년 두 번째로 고등학교에 갔다. 서울 대방동에 있는 성남고등학교였다. 그러나 3개월 만에 자퇴했다. 누나가 야학 강사로 나가던 퇴계로의 한 교회에서 노동자들과 교류하기 시작했지만 노동자도, 대학생도, 혁명가도 아닌 그가 낄 곳은 없었다. 대입 검정고시를 통과한 뒤 1983년 고려대학교 철학과에 입학했다. 고려대 지하서클인 애국학생회 리더였던 안희정은 1986년 10월 ‘반외세반독재애국학생투쟁연합(애학투련)’을 결성하고 전두환 정권 퇴진을 요구했던 ‘건국대 사태’ 때 구속됐다. 1988년 반미청년회 사건으로 또 수감돼 한 달을 안기부 지하실에서 보냈다.

 

 

동갑내기 운동권 동지 민주원과 결혼

 

감옥에서 그는 사회 변화는 민주주의라는 틀 내에서 국민들과 함께 안정적으로 이끌어내야 하고 그 과정이 정치라는 것을 깨달았다. 안희정은 그곳에서 ‘미움이나 분노, 반대하는 마음이 아닌 대안과 희망으로 내 말을 채우자’고 결심했다. 1988년 12월, 당시 김영삼 통일민주당 총재의 비서였던 대학 선배 김영춘(현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이 아르바이트라도 하라며 김덕룡 의원실을 연결해 줘 제도 정치권과 인연을 맺었다. 1989년 1월, 26세 때였다.

 

그해 연말 학생운동 동지였던 동갑내기 민주원과 결혼했다. 민주원은 당시 박석무 평화민주당 의원의 비서관으로 있었다. 두 사람은 고려대 1학년 때 도서관에서 처음 만났다. 안희정은 집도, 패물도 준비할 형편이 안 돼 민주원이 융자를 받아 전셋집을 구하고 큐빅 반지를 사서 나눠 끼고 결혼했다. 그때 함진아비 역할을 한 이가 안희정의 ‘30년 지기’인 우상호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다. 두 사람은 1988년 서울구치소 수감 생활 중 친구가 됐다.

 

안희정은 제주도로 신혼여행을 갔는데 그 사이에 민정당-통일민주당-자유민주연합이 합당하는 3당 합당이 이뤄졌다. 안희정은 합당을 거부한 18명의 당직자들과 함께 꼬마민주당에 남았다. 정치에 회의를 품고 1991년 당에 사직서를 내고 돈을 벌기 위해 선배가 하던 출판사 영업부장을 맡아 전국을 돌았다.

 

안희정이 스스로를 정치인이라고 칭하기 시작한 것은 1994년부터였다. 1994년 초 이광재(전 강원지사)가 찾아와 노무현 의원(노무현)을 도와 연구소를 해 보자고 설득해 지방자치실무연구소에서 일하게 되면서다. 1996년 총선에서 낙선한 노무현은 1998년 정치를 재개했다. 안희정은 정치자금과 사무실 운영비를 마련하기 위해 온갖 일을 했다. 자동차보험 대리점을 내서 선·후배들을 찾아다니며 보험을 들어달라고 떼를 쓰기도 했다. IT(정보기술)회사를 운영하는 지인들과 정치 업무 전산화 프로그램 같은 소프트웨어 개발에도 손을 댔다.

 

노무현 대통령이 2007년 6월2일 서울교육문화회관에서 열린 참여정부 평가포럼 월례강연회에 참석해 영접 나온 안희정 포럼 상임집행위원장(왼쪽)과 악수하고 있다. 가운데는 이병완 포럼 대표 © 청와대 사진기자단

1994년 이광재 권유로 노무현과 인연 맺어

 

지방자치실무연구소에서 사무국장을 맡은 안희정은 과거 한 지역위원장의 부탁으로 노무현이 보증을 섰다가 나중에는 운영까지 맡게 된 생수회사 ‘장수천’을 떠안게 됐다. 2년여 뒤 생수공장 관정(管井)에 문제가 생기면서 털고 나왔지만 동문 선배에게서 회사 운영자금으로 얻어 쓴 돈이 문제가 됐다. 2001년 노무현 대통령 후보 경선캠프 사무국장을 맡았다. 훗날 생수 사업자금에서 시작된 검찰수사가 대선자금으로 이어지면서 2003년 다시 감옥에 갔다. 그때 읽은 빌 클린턴의 《마이 라이프》는 그에게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그는 ‘좌(左)희정, 우(右)광재’로 불리는 정권 창출 공신이었지만, 노무현 정권에서 아무런 공직을 맡지 않았다. 안희정이 감옥에서 나온 후 노무현은 일요일이면 곧잘 청와대 식사 자리에 안희정을 불렀다. 아무런 직함이 없던 안희정은 국정 주요 과제와 관련한 대화가 오가는 자리에서 아는 체하기도 그렇고 가만히 듣고 있자니 힘이 빠졌다. 그래서 비서실장에게 “다음부터는 부르지 말아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그러나 노무현은 계속해서 안희정을 불렀다. 안희정은 “지금 생각하면 나에게 정말 큰 수업이었다”고 회상했다.

 

2008년 안희정의 책 출간기념회에 노무현은 축하 영상을 보냈다. “안희정씨가 나 대신 많은 희생을 감수하고 이루 말할 수 없는 고생을 다 했죠. 난 엄청난 빚을 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안희정은 말한다. “나는 노무현을 위해서 대선을 치른 게 아니라 노무현으로 표현되는 그 가치에 충성한 것이다”라고.

 

안희정은 구속 전력 때문에 그해 4월 총선에서 공천 자격을 박탈당하고 출마하지 못했다. 2008년 7월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최고위원으로 선출됐다. 2010년 6월 민주당 최초로 충남지사에 당선됐고 2014년 재선했다.

 

안희정은 이런저런 굴곡을 겪었지만 그 와중에도 꾸준히 많든 적든 돈을 벌었다. 이상을 좇으면서도 현실에서 발을 떼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그가 현실적인 바탕 위에서 사안을 판단하는 균형 감각을 보여주는 배경이다. 안희정은 항상 스스로에게 묻는다. “나는 이 일을 왜 하는가. 이 일을 왜 좋아하는가. 이 일을 통해 뭘 만들어내려고 하는가.”

 

그는 정치가 현실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어야 한다고 본다. 분명한 비전이 있다면 밀어붙이기보다 대화를 통해 설득하는 노력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상대를 깎아내리기보다 자신의 포부를 이야기하려는 쪽이다. 과거와 결별해야 하고 절대의 선, 절대의 정의라는 기준으로 정치를 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1990년 입당한 뒤 한 번도 당을 옮기거나 탈당하지 않았다. “김대중과 노무현이 이룬 우리 당의 역사적 전통을 끊임없이 이어 붙여 앞으로 나아가려고 애쓴 이는 내가 유일하다. 나는 민주당의 적자(嫡子)다”라고 주장하는 이유다.

 

그가 사드 배치와 관련해 “한·미 군사동맹에 의해 합의된 바를 존중한다”는 입장을 밝힌 것이나 삼성그룹 이재용 부회장의 영장 기각에 대해 “법원의 판단을 존중한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입장을 밝힌 것은 신선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성장이냐, 분배냐 하는 시각으로 시장을 바라봐서는 안 되고 고용과 해고, 투자가 자유로워야 한다는 주장을 펼치는 것도 마찬가지다. “김대중·노무현의 뒤를 잇는 장자라는 자부심이 있다”고 하면서도 진영 논리에 얽매이지 않는 모습을 보여줬다. 이런 점이 ‘50대 젊은 지도자’와 어우러지면서 시대 흐름에 맞는, 확장성을 가진 후보라는 이미지를 형성했다. 충청이라는 지역 기반, ‘노무현’이라는 세력 기반에 더해 지도자로서의 안정감과 균형감을 갖고 있다는 것은 큰 강점이다.

 

2014년 5월30일 충남 서산시 동문1동 주민센터에 마련된 투표소에서 안희정 새정치민주연합 충남지사 후보와 부인 민주원 여사가 함께 한 표를 행사하고 있다. © 연합뉴스

노무현 “안희정에게 엄청난 빚을 졌다”

 

안희정은 2002년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삼성그룹 등으로부터 65억원의 정치자금을 받은 혐의로 2003년 12월 구속돼 1년 동안 복역했다. 안희정은 “평생 안고 가야 할 핸디캡”이라고 말한다. 최후진술에서도 “관행적인 돈 선거보단 깨끗하게 선거를 치르긴 했으나 저도 잘못이 있습니다. 무겁게 처벌해 주십시오”라고 말했다. 당시 노무현 캠프의 정치자금 창구 역할을 맡았기에 법적 책임을 졌던 것이긴 하나, 어쨌든 안희정으로서는 약한 고리다.

 

2009년 이른바 ‘박연차 게이트’ 사건 때는 그가 박연차 태광실업 회장으로부터 5000만원 상당의 상품권을 받은 사실이 불거졌다. 당시 안희정은 언론 인터뷰에서 “(상품권 수수를) 부인하지 않겠다. 문제가 되는 것인지는 검찰에서 판단해 줄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 사건은 그가 당시 피선거권이 상실돼 정치 활동이 불가능했다는 이유로 불기소 결정됐다.

 

 메시지 측면에서 볼 때는 말이 어렵다, 원론적이고 추상적이라는 평가가 있는 것이 약점이다. 딱 부러지는 용어, 쉽고 이해가 빠른 대중적인 언어 구사력이 떨어진다는 평가가 나온다. 한마디로 말해 “임팩트가 없다”는 얘기다.

 

아내 민주원은 인터뷰에서 ‘3농 혁신에 매진한 점, 충남 미세먼지 기준을 강화한 것, 닥터 헬기를 도입한 점’ 등을 안희정의 도정 업적으로 꼽았으나 상징화할 만한 업적이 없다는 지적도 나온다.

 

안희정과 관련해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은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다. 두 사람은 기본적으로 ‘노무현’이라는 지지층을 공유하고 있다. 건곤일척의 승부를 펼치면서 안희정은 ‘정책 차별화’라는 틀로 문재인과 차별화를 꾀하고 있다. 인간 문재인에 대한 평가나 비판에는 조심스러워하는 모습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문재인, 다음에는 안희정’이라는 이른바 ‘차차기 프레임’을 깨기 위해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네가 동생이니까 다음에 해라, 그러면 제가 얼마나 빈정이 상하겠습니까?” “문재인 대세론을 넘어서겠다” “다시 생각하면 안희정입니다”라고 주장한다.

 

안희정의 담대한 도전 1차 고지는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 경선에서 결선투표를 이끌어낼 수 있느냐다. 그가 결선투표라는 링에 오를 수 있다면 드라마는 현실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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