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 Insight] ‘명절 특식’이 반가운 북한의 설
  • 이영종 중앙일보 통일전문기자 (sisa@sisapress.com)
  • 승인 2017.01.25 00:25
  • 호수 1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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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씨 일가 우상화 작업에 명절 의미는 퇴색

고단한 겨울나기를 해야 하는 북한 주민들에게 설 명절은 잠깐이지만 소중한 안식을 준다. 공장·기업소나 협동농장에서의 노동이나 지겨운 사상교양 등에서 잠시 벗어나 가족들과 시간을 보낼 수 있다. 식량난과 식품·생필품의 공급 부족에 시달려온 주민들에겐 돼지고기·식용유·설탕 등으로 구성되는 ‘명절 특식(특별공급)’도 반가운 소식이다.

 

물론 북한에서 설이 민족 전통 명절로서의 의미는 색이 바랜 지 오래다. 김일성·김정일의 생일을 설이나 추석 명절보다 더 치켜세워 의미를 부여하기 때문이다. 개인숭배와 가계 우상화의 극단이다. 분단 70여 년이 지나면서 남북 간 이질화는 심해졌고, 특히 북한 정권에 의한 민족 전통 말살이나 사회·문화 부문의 이념화는 위험 수위에 달했다는 평가다.

 

올해 설 명절을 앞둔 북한 내부 분위기는 그 어느 때보다도 뒤숭숭한 편이라는 게 대북 소식통과 탈북 고위 인사들의 전언이다. 무엇보다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이 새해 벽두부터 신년사를 통해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시험발사 마감단계’를 공언하는 등 도발적 행태를 보인 때문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의 출범이나 중국·일본·러시아 등 주변 국가의 이해 충돌 양상도 북한의 엘리트뿐 아니라 주민들을 술렁이게 하고 있다는 얘기다. “뭔가 한 방 크게 터질지 모른다는 걱정이 번지고 있다”는 말도 흘러나온다. 외교관이나 해외 대표부 간부 등 엘리트층의 체제 이반도 간단치 않은 데다 경제 문제를 중심으로 한 일반 주민들의 볼멘소리도 작지 않다.

 

2016년 2월9일 장거리 로켓 ‘광명성 4호’ 발사 성공 소식에 북한이 설날을 기쁨과 즐거움 속에 맞이했다고 조선중앙통신이 보도했다. © 조선중앙통신 연합

“뭔가 한 방 크게 터질지 모른다는 걱정”

 

민족 고유의 명절임에도 북녘의 설맞이는 우리와 크게 다른 분위기다. 철도나 도로 교통 사정이 여의치 않고 자가 승용차의 보유도 꿈꿀 수 없기 때문에 우리처럼 민족대이동을 연상케 하는 귀성행렬은 없다. 멀리 헤어져 지내던 가족과 친지들이 한자리에 모여앉아 조상께 제사를 올린 후 덕담을 주고받는 미풍양속들도 찾아보기 어렵다. 당연히 정치적인 이슈나 사회문제를 화제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설 민심’은 나타날 수가 없다. 철저한 사회통제와 감시체제의 가동 때문에라도 엄두를 낼 수 없다.

 

본래 북한은 1945년 9월 정권 수립 직후부터 매년 1월1일을 민속 명절인 설날로 삼았다. 전래의 설 명절(음력설)을 쇠는 건 금지했다. 겉으로는 음력설을 쇠는 게 ‘봉건주의적 잔재’라는 이유를 내세웠지만 사실은 다른 판단이 있었다. 휴무가 많아지면 사회주의 건설을 위한 노동력 손실을 초래할 수 있다는 점과 함께 김일성 유일지배 체제를 구축하는 데 필요한 주민통제에 부적합하다는 점도 고려됐다.

 

음력설이 지금과 같이 제자리를 찾게 된 건 2005년부터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음력설을 ‘기본명절’로 정하고, 설 당일부터 사흘간을 연휴로 설정해 주민들이 쉴 수 있게 조치를 취했다는 게 북한의 주장이다. 재일 조총련 기관지 조선신보는 당시 보도에서 “올해(2005년)부터 조선에서는 양력설보다 음력설을 기본 설 명절로 쇠게 됐다”며 “전통적인 민속명절을 크게 쇠기 위한 국가적 조치가 취해졌다”고 선전했다. 평양의 관영 선전매체들도 “장군님(김정일을 지칭)이 설 명절을 제대로 쇠기 위한 조치를 취해 줬다”며 찬양·선전을 이어갔다.

 

북한에서는 설과 추석 같은 전래의 명절보다 김정일 생일인 2월16일과 김일성의 출생일인 4월15일이 더 큰 ‘명절’로 치러져왔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민속명절에 한해서만 명절이라고 부르는 것과는 달리, 북한은 국경일·민속명절·국제기념일 등을 총칭해 명절이라고 부른다.

 

또한 북한의 필요에 따라 공휴일(노동량이 부과되지 않아 노동으로부터 자유로운 날), 휴무일(당일 노동은 하지 않아도 되지만 노동량은 부과돼 추후 공휴일 등을 기해 할당된 노동량을 벌충해야 하는 노동 의무가 부과돼 있는 날), 그리고 단순히 기념행사만 하는 기념일 등으로 나눠져 있다. 김일성·김정일 부자의 생일을 비롯해 국제노동자절(메이데이·5월1일), 조국해방기념일(8월15일), 정권창건일(9월9일), 노동당 창건일(10월10일), 헌법절(12월27일)은 국경일에 속한다. 이를 북한에서는 ‘사회주의 7대 명절’로 부르며 공휴일로 지정해 놓고 있다.

 

 

김정은, 새해 들어 ‘애민’ 제스처에 공들여

 

최근 들어 북한 사회에서는 설 명절 문화의 변화가 감지된다고 한다. 대북매체인 데일리NK는 “예전에는 송편을 빚고 만둣국을 끓여놓고 동네사람들 초청해 윷놀이로 집단문화를 즐겼다면, 이제는 친구 혹은 가족들끼리만 노는 분위기로 변했다”고 전했다. 빈부 격차 등이 나타나면서 계층별로 명절을 쇠는 모습도 달라지고 있다는 말도 나온다. 장마당에서의 사업으로 막대한 달러자본을 거머쥔 속칭 ‘돈주’의 경우는 외화식당에서 즐기는 데 비해, 일반 주민들은 명절임에도 불구하고 장사에 나서 돈을 벌겠다는 경우도 적지 않다는 것이다.

 

올해의 경우 북한 당 간부들과 주민들은 설 명절보다 김정은 생일(1월8일)에 촉각을 곤두세웠다고 한다. 북한 당국 차원에서 김정은 생일을 휴일로 지정하거나 대대적으로 기념하는 상황이 닥치지 않을까해서다. 하지만 별다른 움직임은 없었다. 정부 당국자는 “아직 김정은 생일을 휴일이나 명절로 내세우기에는 우상화 등 정지(整地)작업이 미흡하다고 판단한 듯하다”고 말했다.

 

생일에 맞춰 이런저런 근거 없는 소문들이 퍼지면서 주민들은 설왕설래해야 했다. 미국 자유아시아방송(RFA)은 김정은의 33회 생일을 앞둔 1월4일 보도에서 “김정은 생일 선물로 도루메기(도루묵)을 공급한다는 말이 나돌면서 시장 가격이 폭락했다”고 전했다. 김정은은 2016년 11월 북한 군부가 운영하는 수산사업소를 잇달아 방문해 “수천 톤의 도루메기를 잡았다는 대풍 소식에 춤이라도 추고 싶은 심정”이라고 말하는 등 어획고 증대를 직접 챙겼다.

 

김정은은 새해 들어 민심을 사로잡기 위한 애민(愛民) 제스처에 공을 들이고 있다. 신년사에서는 자책하는 듯한 표현을 쏟아냈고, 민생과 관련된 시설을 연이어 찾았다. 최근 공개된 관련 영상에서는 김정은이 공장 근로자에게도 고개 숙여 인사하는 장면이 나온다. 하지만 진정으로 북한 주민들을 챙기려 한다면 김씨 일가 우상화에 밀린 우리 민족 전래의 명절을 제대로 된 자리에 돌려놓는 데 공을 들여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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