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를 구할 수 있었다면’ 가정(假定)의 놀라운 상상력
  • 이은선 영화 저널리스트 (sisa@sisapress.com)
  • 승인 2017.01.05 13:59
  • 호수 1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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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대지진의 그림자가 극 전체에 어른거리는 《너의 이름은.》이 일본 열도 뒤흔든 이유

신카이 마코토는 일본의 거장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 이후 가장 주목받는 애니메이션 연출가 중 한 명이다. 삭막한 도시 안에 갇힌 채 미래를 향한 기대와 불안, 과거에 대한 그리움으로 살아가는 일본 젊은 세대의 심상과 언어 그대로를 담는다고 평가받는다. ‘색채의 마술사’라 불릴 정도로 아름다운 작화 역시 그의 명성을 높였다.

 

그는 성우와 음악을 제외한 거의 모든 공정을 홀로 하며 7개월 만에 완성한 25분짜리 애니메이션 《별의 목소리》(2002), 제2차 세계대전 후 남북으로 갈린 가상의 일본을 배경으로 한 정식 데뷔작 《구름의 저편, 약속의 장소》(2004) 등 초기작부터 좋은 평을 받았다. 사랑에 빠지고 다시 안타깝게 엇갈리는 남녀의 마음을 섬세하게 그려내는 특유의 감수성으로 완성한 《초속5센티미터》(2007)와 《언어의 정원》(2013)은 수많은 팬들을 양산하며 ‘신카이 월드’를 공고히 한 작품들이다.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신작 《너의 이름은.》은 2016년 일본 열도를 뒤흔들었던 화제작이다. 12주간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했던 이 애니메이션은 일본에서만 1500만 관객을 동원했다. 결과적으로는 수년째 1위를 지키고 있는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2001)에 이어 역대 일본 애니메이션 흥행 순위 2위에 올랐다. 지금 일본에서 신카이 마코토 감독, 그리고 그의 작품이 차지하는 위상이 어느 정도인지를 보여주는 수치다.

 

영화 《너의 이름은.》의 한 장면 © 메가박스㈜플러스엠

비극을 잊지 않으려는 마음 돋보이는 수작

 

영화는 도쿄에 사는 소년 타키(가미키 류노스케)와 산골에 사는 소녀 미츠하(가미시라이시 모네)의 이야기다. 둘은 뚜렷한 이유를 모른 채 신기한 꿈을 계속해서 꾸고 있다. 꿈이라기에는 너무도 생생한 시간을 반복해서 겪던 이들은 마침내 서로의 몸이 뒤바뀐다는 것을 알게 된다. 타키와 미츠하는 서로에게 남긴 메모를 확인하면서 점차 가까운 사이가 되고, 언젠가부터 몸이 뒤바뀌지 않는 것을 깨달은 타키는 미츠하를 직접 만나러 가면서 놀라운 사실과 마주한다.

 

신카이 마코토 감독은 “사람과 사람이 만났을 때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자신의 이름을 말하고 상대방의 이름을 묻는 것”이라며 바로 거기에서부터 관계가 출발한다고 생각해서 《너의 이름은.》이라는 제목을 지었다고 밝혔다. 문장에 마침표를 더한 이유는 ‘너의 이름을 나는 알고 있다’ ‘너의 이름을 잊어버렸다’ 등 영화 속에서 이름과 관련한 다양한 해석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그 모든 의미를 담은 것이라고 알려졌다.

 

소년 소녀의 애정을 발랄한 상상력에 버무린 작품 정도라고 생각되던 영화가 비범해지는 순간은 후반부에 찾아온다. 타키는 자신과 미츠하 사이에 시간의 차이가 존재하고, 그 사이 미츠하가 살던 곳은 어떤 이유로 인해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을 알게 된다. 이제부터 타키가 하는 일은 미츠하가 사는 세계를 구하고 그 이름을 잊지 않으려는 발버둥이다. 수많은 일본인이 목숨을 잃고 전 세계가 충격에 빠졌던 2011년 동일본대지진의 그림자가 극 전체에 어른거린다.

 

결국 이 영화는 비극적인 사건으로 사라졌던 한 사람, 한 사람의 소중한 세계, 그리고 그 이름들을 잊지 않으려는 노력이다. ‘모두를 구할 수 있었다면’이라는 가정(假定)을 놀라운 상상력으로 빚어낸 감독의 솜씨가 감탄을 부른다. 감독은 지난 2016년 10월 부산국제영화제를 찾아 “2011년의 비극을 겪으면서 기적을 일으키는 이야기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에 강하게 사로잡혔다”고 말했다.

 

신카이 마코토 감독이 2016년 10월9일 제21회 부산국제영화제 《너의 이름은.》 기자회견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 연합뉴스

동일본대지진이 일본 감독들에게 미친 영향

 

일본의 거장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그의 에세이 《걷는 듯 천천히》에서 2011년 3월11일, 자신의 눈앞에 펼쳐진 세계가 과거를 포함해 그 의미를 크게 바꾸어 놓았다고 털어놓았다. 영화가 감독의 세계관을 반영하는 도구라면 그 인식의 변화는 이들이 만드는 작품에도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이야기였다.

 

실제로 일본의 많은 감독들이 자신과 일본 사회 전체가 입은 내상을 치유하기 위해, 비극을 잊지 않기 위해 카메라를 들었다. 《러브 레터》(1995), 《하나와 앨리스》(2004) 등의 작품으로 유명한 이와이 슌지 감독은 그해 곧바로 《3·11: 이와이 슌지와 친구들》이라는 다큐멘터리를 찍어 동일본대지진 당시 터진 후쿠시마 원전 사태를 대하는 언론의 태도를 비판하고 원전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웠다. 이 다큐는 일본 TV를 통해 방영됐고, 이후 후쿠시마 원전 사고 1년을 추모하며 극장 상영이 추진됐다. 당시 감독은 더는 일본에서 실사영화를 찍지 않을 작정이었다. 영화를 찍기에는 일본 사회가 지나치게 안정되어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2011년의 아픔을 겪은 일본 사회가 불안정하고 감정적 흔들림이 많은 사회로 변화했다는 생각에 감독은 이후 세대를 기록하기로 했고, 《립반윙클의 신부》(2016)를 만들었다.

 

흥미로운 것은 일본 감독들이 그들에게 일종의 부채의식으로 남은 하나의 재난을 각자의 화법으로 다양하게 이야기한다는 사실이다. 이와이 슌지가 다큐를 택했다면, 소노 시온 감독은 극영화 《두더지》(2011)를 통해 아버지 세대에 저항하는 현 세대에게 “힘내”라는 직설적인 외침을 전달하는 식이다. 《유레루》(2006)로 유명한 니시카와 미와 감독은 일상에 비극적 사건이 일어나기 전, 가족 혹은 주변의 사람들과의 관계를 제대로 풀지 못한 이들의 후회를 그린 신작 《아주 긴 변명》으로 일본 사회를 위로한다. 아내(후카쓰 에리)에게 버스 사고가 있던 날 젊은 여자와 밀회를 즐기고 있던 작가 사치오(모토키 마사히로)의 마음을 따라가는 영화다. 1월 내 국내 개봉 예정인 《신 고질라》 역시 동일본대지진을 은유하는 영화다. 이 영화는 괴수 고질라로 대변되는 재난 앞에서 갈팡질팡하는 정부 시스템을 비판하고, 위기를 극복하려는 사람들의 노력을 보여준다.

 

재난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각 분야에서 당시의 상황을 꼼꼼하게 되짚으려는 노력은 필요하다. 동시에 비극을 겪은 사람들의 마음을 위로하고 치유하려는 작업 역시 계속되어야 한다. 일본 영화계의 움직임이 말하는 바다. 거의 모든 상황을 오작동하는 시스템, 무능한 공권력에 화살을 돌리는 방식으로 일괄 수렴하는 듯한 재난영화의 스토리를 선보이는 한국영화계에도 시사하는 바가 큰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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