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작기간 4년 동안 《판도라》는 현실이 되었다
  • 나원정 매거진M 기자 (sisa@sisapress.com)
  • 승인 2016.12.29 15:56
  • 호수 1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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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최초 지진으로 인한 원전 사고 다룬 재난 블록버스터 《판도라》, 진짜 현실을 영화에 새겨 넣다

“지진이 또 발생하면 어떡하나, 내내 마음을 졸였어요.” 영화 《판도라》의 관계자가 기자에게 들려준 얘기다. 개봉일인 2016년 12월7일을 한 달여 앞둔 때였다. 오랜만에 술이나 한잔하자고 만난 자리에서 “《판도라》 마무리 작업은 잘돼 가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그는 대뜸 그렇게 말했다. 얼굴에는 수심이 가득했다.

 

 

경주 지진 이후 시사에서 관객들 “무섭다”

 

《판도라》는 2012년 변종 기생충의 위협을 다룬 재난 영화 《연가시》로 450만 관객을 모은 박정우 감독의 두 번째 재난영화다. 재난 상황을 쥐락펴락하는 박 감독의 솜씨는 전작에서 익히 확인한 바다. 극 중 묘사가 얼마나 실감 나는지, 일부 초등학생들 사이에선 변종 기생충에 관한 괴담이 돌기도 했단다. 더구나 《판도라》는 한국영화 최초로 지진으로 인한 원전 사고를 다룬 재난 블록버스터다. 제작기간만 4년, 제작비는 140억원 규모다.

 

영화 《판도라》의 한 장면 © NEW

예사로운 영화는 아니리라 짐작했다. 그럼에도, 다음에 이어진 관계자의 말에 내심 ‘설마…’ 반신반의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첫 모니터링 시사 때만 해도, 이게 사실적으로 느껴질까 고민했어요. 실제로 공감 간다는 반응과 그렇지 않다는 반응이 엇갈렸고요. 그런데 지난 (2016년 9월12일) 경주 지진 이후 모니터링 시사에서 관객들이 ‘무섭다’는 거예요. 현실이랑 너무 똑같다고요. 오히려 걱정이 되기 시작하더라고요. 개봉일은 이미 (12월7일로) 잡혔는데, 설마 또 지진이 나면 큰일이다 싶었죠. 지진 피해자들이 발생한 상황에서 지진 재난 영화를 개봉할 순 없으니까요.”

기자는 영화를 보자마자 그의 말이 단박에 이해되었다. 《판도라》는 경상도의 모처로 추측되는 바닷가 마을이 무대다. 엄마(김영애)는 원전으로 출근하느니, 원양어선을 타겠다는 둘째아들 재혁(김남길)의 등을 떠민다. 남편과 큰아들을 모두 방사능 사고로 잃고, 혼자가 된 며느리, 어린 손자와 함께 살면서도 엄마는 “원전이 지은 지 40년이 넘어 위험하다”는 재혁의 말을 달래며 넘긴다. 이 동네에서 입에 풀칠할 일터라곤, 원전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날 규모 6.1의 강진이 발생하자, 노후된 원전 시설은 치명적인 타격을 입는다. 희생을 늘리는 건 다름 아닌 무능한 정치인, 이기적인 원전 수뇌부가 낳은 인재(人災)다. 인재. 이는 지금의 정국에 가장 현실적으로 와 닿는 상황 아닌가.

 

 

원전 인근 울산의 한 영화관, 관객 동원 1위

 

지진에 속수무책으로 타격을 입는 원자력발전소를 볼 때. 아무것도 모르는 주민들이 “일단 가만히 있으라”는 ‘높은 사람들’의 말만 믿다 결국 동네 체육관에 버려지다시피 할 때. 그리고 피란행렬로 주차장이 된 고속도로 저편으로 방사능 구름이 시커멓게 덮쳐올 때. 기자는 울산에 계신 부모님이 떠올라,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9월12일 경주에서 처음 강도 5.8의 역대 한반도에서 가장 강력한 지진이 일어났을 때, 기자의 어머니가 했던 말이 떠올랐던 것 같다.

 

“아파트가 흔들, 했다 아이가. 너무 놀라서, TV를 틀어도 아무 방송도 안 하는 거야. 얼마나 불안하던지. 좀 있으니까, JTBC만 지진 특보를 내보내줘서, 그것만 보고 있었는데, 손석희 앵커가 울산 사람이랑 생방송 인터뷰를 하다 지진이 또 난 거라.”

아무도 지진 대피 요령, 대피 시 준비물 따위를 모를 때였다. 나중에 《판도라》를 본 어머니는 전화로 기자에게 이런저런 감상을 들려줬지만, 귓전에 무겁게 가라앉은 건 이 한마디였다. “또 불안해지더라.” “요즘 시국이 시국인지라 정부며, 정치인들을 못 믿게 됐는데, 진짜 영화 속 상황이 벌어지면 똑같이 아무것도 모르고 우왕좌왕 혼란스럽기만 할 것 같다”는 얘기였다.

 

《판도라》가 개봉 12일째 누적 300만 관객을 돌파한 12월18일에는 또 다른 뉴스도 들려왔다. 울산광역시 남구에 위치한 영화관 ‘CGV울산삼산’이 전국에서 《판도라》 관객 수 1위 극장으로 꼽혔다는 것이다. 지진의 직접적인 영향을 입은 경주에 월성원자력발전소가 있듯, 울산도 부산과의 경계지역에 고리원자력발전소를 두고 있다. 《판도라》를 보러 극장에 몰려든 울산 사람들, 아니 경상도 일대 사람들은 아마도 기자의 어머니와 같은 심정이 아니었을까.

 

《판도라》가 한창 관객 몰이를 하고 있던 즈음, 경주 지진의 여진으로 추정되는 작은 지진이 잇달아 발생하자 소셜미디어에는 “《판도라》가 현실이 될까봐 두렵다”는 관객들의 불안감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울산의 어느 시민단체는 상영관 앞에서 이 영화를 보고 나오는 관객들에게 원전 반대 서명을 받기도 했다고 한다. 아마도 그건 박정우 감독이 원한 반응이기도 했을 것이다. 그가 《판도라》를 시작한 이유가 바로 “반면교사를 마련해, 현실을 변화시킬 계기가 됐으면” 하는 바람이었기 때문이다.

 

영화 《판도라》에서 지진에 속수무책으로 타격을 입어 대피하는 주민들 © NEW

“가상의 재난을 통해 현실을 시뮬레이션”

 

박정우 감독이 《판도라》의 아이디어를 떠올린 건 5년 전의 일이다. 2011년 동일본대지진으로 후쿠시마 원전 사고가 일어났던 그때, 그는 《연가시》를 만들고 있었다. 

 

“원전 문제가 전 세계적인 충격과 공포를 안겼는데, 우리나라만 이상하리만큼 조용했어요. 당연히 원전 보유국인 우리나라도 원전의 안전 상태를 점검하고, 노후 원전 처리 문제가 심각하게 논의될 줄 알았는데,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습니다. 이러면 안 되겠다 싶어서 원전 재난에 대한 시나리오를 떠올렸습니다.” 

“꾸준히 제기된 국내 원전의 위험성을 스크린에 사실적으로 투사해, 경각심을 일으키는 것”이 목표였다. 시나리오를 쓰기 전 6개월간 우크라이나 체르노빌, 일본 후쿠시마 등 기존 원전 사고 정보와 자료를 공부했다. 너무 복잡한 소재여서 도중에 좌절한 적도 수차례다. 2013년 초부터 약 반년간 완성한 초고는 다행히 반응이 나쁘지 않았지만, 민감한 사안이니만큼 투자·배급사 NEW를 만나기까지 투자 유치에 우여곡절이 많았다.

 

세트 제작 등 촬영 준비에도 상당한 노력이 필요했다. 보안 문제상 국내 원전은 취재할 수 없었다. 대신 필리핀 바탄 원자력발전소를 답사했다. 한국 원전과 유사하다고 알려져서다. 강원도 춘천 지역에 5000평 규모 실물 크기의 원자력발전소 세트를 짓고, 2014년 3월부터 8월까지 촬영을 진행했다. 이후 1년 반을 더 폭발 장면 등의 컴퓨터 그래픽 등 후반작업에 매달렸다.

 

원전 전문가들의 고증을 통해 재난 악화 과정을 현실과 90% 가까이 정교하게 구현하고, 재난 현장에 복구팀과 구조팀이 투입되는 상황도 자세히 구축했다. 원전 관련 자문은 김익중 동국대학교 의대 교수(전 원자력안전위원회 위원)가 맡았다. 김 교수는 “영화적 상상력을 발휘하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2011년 후쿠시마 원전 사고에서 일어났던 일을 그대로 가져왔다”고 했다.

 

《판도라》가 “가상의 재난을 통해 현실을 시뮬레이션 하는 과정”이었다는 박 감독의 의중은 생각지 못한 방향으로 힘이 실리게 됐다. 영화가 4년 넘게 제작에 난항을 겪는 동안 현실이 영화와 점점 더 닮아갔기 때문이다. 한국이 지진 안전지대란 믿음은 깨졌고, 세월호 참사 당시에는 컨트롤타워가 부재했다. 영화 속에서처럼 말이다.

 

박정우 감독이 꼭 들려주고 싶다고 당부한 것이 있다. “핵연료를 완벽히 안전하게 저장·폐기하는 기술은 아직 없으며, 핵은 현생 인류가 마음대로 제어할 수 있는 물질이 아니다”라는 얘기 말이다. “만약 30년 넘게 노후된 고리 1호기에 문제가 생기면, 인근 30km 이내에 있는 부산과 울산은 사실상 무방비 상태가 될 것”이라고 그는 경고한다. 《판도라》가 무서울 만큼 실감 났던 건, 그가 진짜 현실을 영화에 새겨 넣었기 때문이다. 그 두려움을 어떤 실천으로 옮길지, 방치하고 또다시 잊어버릴지는 우리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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