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에도 트럼프 그림자 어른거린다
  • 최정민 프랑스 통신원 (sisa@sisapress.com)
  • 승인 2016.11.22 14:41
  • 호수 1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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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은 지지 받고 있는 대선후보들 모두 극우 성향

11월9일 아침 7시, 프랑스의 극우정당 국민전선의 당수인 마린 르펜은 자신의 트위터에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후보의 승리를 축하하는 메시지를 올렸다. 트럼프 후보의 당선이 공식화되기 이전이었고, 전 세계가 경악에 빠진 상황이었다. 극우 포퓰리즘의 물결이 미국 정계를 뒤엎은 그날 아침, 마린 르펜이 흥분한 것은 트럼프의 승리보다 자신이 대권에 한발 더 다가섰다는 확신 때문이었다. ‘막말의 대가인 마린 르펜은 프랑스의 트럼프가 될 수 있을까.’ 이 식상한 질문이 무겁게 다가오는 이유는 바로 프랑스 차기 대선이 5개월 앞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정치학 연구원인 에디 푸지에는 기고문을 통해 ‘미국과 프랑스는 선거 제도와 투표 방식이 다르기 때문에 미국과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러나 11월17일 독일을 방문 중이던 마뉘엘 발스 총리는 독일 언론과의 간담회에서 “마린 르펜의 당선은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며 깊은 우려를 나타냈다.

 

대선을 앞둔 프랑스 정가의 구도는 집권 여당과 대통령이 낮은 지지율을 보이는 가운데, 야당인 우파 공화당의 경우 비슷한 성향의 후보들이 난립하고 있으며 제3의 후보인 엠마뉴엘 마크롱의 대선 출마 선언으로 요약된다. 먼저 프랑스의 야당인 우파 공화당이 대선 경선 레이스에 돌입했다. 11월20일 1차 투표에서 승자가 과반을 넘기지 못하면 27일 2차 투표를 통해 후보를 확정한다.

 

프랑스 극우정당 ‘국민전선’ 당수 마린 르펜 © AP 연합

“풍성한 잔칫상에 먹을 것 없다” 관측

 

이런 상황에서 우파 공화당 후보들의 면면은 어떨까. 이력은 모두 화려하다. 장관은 기본이고 현직 시장에 전직 대통령까지 7명의 후보가 난립했다. 어느 후보도 문제가 없는 후보가 없다. 유권자의 입장에서 본다면, 잔칫상은 풍성한데 선뜻 손이 가기 어려운 상황인 것이다.

 

먼저 현재 지지율 1위를 달리고 있는 후보는 현 보르도 시장인 알랭 쥐페다. 전직 총리부터 경제, 외무, 국방은 물론 환경부 장관까지 정계의 주요 요직은 모두 거친 탁월한 행정가이자 정치인이다. 오죽하면 자크 시라크 전 대통령이 자신의 대권유세 중 “우리 중에 가장 뛰어나다”라고 공개적으로 천명했을 정도다. 현재 그가 시장을 맡고 있는 보르도의 경우를 보면 탁월한 시정 운영으로 좌우를 불문하고 시민 전체의 지지를 받으며 10년째 재직 중이다. 그러나 시장 이상의 역할을 할 수 있을지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사람이 많다. 화려한 정치 경력에도 대선에 실패했던 힐러리 클린턴을 연상시키는 대목이다. 또한 쥐페의 발목을 잡고 있는 것은 그의 나이다. 그는 시라크와 같은 세대로 올해 71세의 고령이다. 5년 중임제인 프랑스의 대통령제에서 단 한 번만 임기를 채우겠다는 공약까지 걸고 나왔다.

 

알랭 쥐페의 뒤를 바짝 쫓고 있는 것은 바로 전직 대통령인 니콜라 사르코지다. 탁월한 웅변가적 기질과 특유의 카리스마로 열정적인 선거 캠페인을 벌이고 있지만 쥐페의 벽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그를 붙잡고 있는 문제들이 너무나 많다. 먼저 2012년 대선자금 초과지출에 대한 위법 여부는 이제 공공연한 비밀이 됐다. 이뿐만이 아니다. 11월16일 공화당의 마지막 대선후보 토론을 하루 앞두고 새로운 증언이 폭로됐다. 그것은 2007년 대선 이전에 당시 리비아의 카다피 원수로부터 불법 대선자금을 수수했다는 의혹에 관한 내용이었다. 2007년 대선 이후 끊이지 않는 이러한 의혹들에 대한 비난의 화살은 우파 공화당 내부에서도 나오고 있다.

 

재미있는 것은 기소된 전직 대통령인 사르코지를 정조준하며 지지율을 끌어올리는 제3의 후보 프랑수아 피용이다. 그는 사르코지를 둘러싼 게이트를 두고 돌직구를 날리며 대중의 주목을 받고 있다. 사르코지와 쥐페의 대안으로 약진하고 있는 그의 유일한 약점은 공교롭게도 자신이 비판하고 있는 사르코지 집권 동안 내각의 수반인 총리직을 수행했다는 사실이다. 그 외의 군소 후보군도 마찬가지다. 브뤼노 르메르나 나탈리 코쥐스코 모리제 모두 사르코지 집권 당시 각각 대변인과 농산부 장관을 역임한 인물들이다. 과거에 한 지붕의 각료들이 대권후보 자리를 두고 이전투구를 벌이고 있는 셈이다. 사르코지 계파가 아닌 장 프랑수아 코페의 경우 지지율이 미미함에도, 반(反)사르코지라는 이유로 선거전에 뛰어든 모양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프랑스 유권자들의 심기는 무관심을 넘어 분노로 향하고 있다. 프랑스 공영방송이 이번 대선을 두고 야심 차게 준비한 프랑스 국민들과의 대담 프로에서 브뤼노 르메르 후보의 경우 “당신이 하는 말은 모두 고양이 오줌 같다”(하찮다는 것을 의미하는 프랑스 관용어)라고 일갈하는 시민의 독설을 뒤집어써야 했다.

 

“미국 같은 일 일어나지 않을 것” 분석도

 

말하기를 유난히 좋아하고 지적인 것을 목숨처럼 여기는 프랑스인이지만 말뿐인 정치 담론에 염증을 느끼는 분위기가 역력하다. ‘위대한 프랑스’(브뤼노 르메르), ‘국가 정체성’(사르코지), ‘행복한 정체성’(알랭 쥐페) 등 화려한 슬로건들은 난무하지만, 어느 누구도 뚜렷한 대안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여권 내부에서 가장 높은 지지율을 받아왔던 엠마뉴엘 마크롱 전 재경부 장관은 11월16일 야심 차게 대권 도전을 선언했다. 같은 날 저녁 프랑스2와의 인터뷰를 통해 자신은 좌파 또는 우파를 결집하려고 나온 것이 아니라고 전제하며 “프랑스를 결집하려고 나왔다”고 야심 찬 포부를 밝혔다. 그러나 언론의 반응은 냉랭하다. 그의 선언을 두고 경제전문 채널인 ‘BFM 비즈니스’의 엠마뉴엘 레시프르는 “독창성도 없고, 비전은 부재하다”고 혹평했다. 실제로 그가 내놓은 정책적 대안인 ‘퇴직 연령의 다변화’ ‘35시간 노동제의 유연화’ 등은 이미 오래전부터 나온 얘기들이다. BFM의 정치 평론가인 아폴린 드 말레브가 “우리는 시리아 사태나 난민 문제, 그리고 이민자 문제 등 가장 첨예한 사안들에 대해 그가 내놓는 어떠한 뚜렷한 대답도 들어본 적이 없다”고 지적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실제로 마크롱 후보는 어떠한 정당에도 속해 있지 않으면서 독자적인 대선 가도에 뛰어들었다. 그러나 프랑스 역사상 어떠한 후보도 정당에 적(籍)을 두지 않고 대권을 거머쥔 적은 없었다. 실제로 마크롱 후보가 사회당 경선을 통해 대권 절차를 밟았다면 오히려 무난히 후보로 당선되고 오히려 성공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 대체적인 분석이었다. 그럼에도 마크롱이 집권 여당의 지붕으로 들어가지 않은 것은 현재 너무나 저조한 지지율을 의식한 것으로 풀이된다. 그리고 한발 더 나아가 최근 트럼프 열풍에서도 드러난 기존 정치에 대한 반감을 이용하려는 것이 아닌가라는 추측도 가능한 대목이다.

 

그 어느 때보다 대권에 다가선 프랑스 극우정당의 운명은 이제 기존 정치에 대한 프랑스인의 분노가 어느 쪽으로 쏠릴지에 달려 있다. 미국처럼 극우를 지지하는 선택을 하게 될지, 그나마 나은 차악(次惡)을 선택할지 세계의 지성이라고 자부하는 프랑스인의 지적(知的) 인내심이 시험대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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