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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저널

[평양 Insight] '최순실 게이트'에 김정은은 침묵 중

어설픈 도발로 박근혜 정부를 위기에서 구해 주지 않겠다는 의지

이영종 중앙일보 통일전문기자 ㅣ sisa@sisapress.com | 승인 2016.11.22(Tue) 18:41:13 | 141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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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평양에서 발간되는 노동신문은 맨 마지막 장인 6면을 최순실 국정개입 농단 사태로 연일 도배한다. 대남·국제소식 몇 가지로 편집하던 걸 아예 최순실 사태에 쏠린 남한 내 비판 분위기와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하야 요구 등으로 채우는 것이다. 특히 주말 서울 광화문 촛불집회 소식은 “서울로 오는 전세버스가 동났다”거나 “집회에서 ‘늘품체조’ 대신 ‘하품체조’ 시범이 있었다”고 전하는 등 깨알같이 세세하게 전하고 있다.

 

북한 보도의 초점은 박 대통령 퇴진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거친 대남 선전·선동을 통해 박근혜 정부의 리더십 위기를 더욱 부풀리고, 남한 내 반정부 분위기와 혼란을 조장하려는 의도로 읽힌다. 정부 당국은 최순실 사태가 불거진 이후 북한이 관영 선전매체를 통해 내보낸 박 대통령 비난 보도가 2배 이상 급증한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노동신문의 경우 11월1일부터 17일까지 모두 102건의 박 대통령 관련 비방·선동 기사를 내보낸 것으로 ‘미국의 소리(VOA)’ 방송은 전하고 있다.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이 물고기 잡이 성과를 이룩하고 있는 인민군 ‘5월27일 수산사업소’와 ‘1월8일 수산사업소’를 잇달아 시찰했다고 조선중앙통신이 11월17일 보도했다. © 조선중앙통신 연합


北, 박 대통령 비난 보도 두 배 이상 급증

 

주목되는 건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의 행보다. 9월초 북한이 감행한 5차 핵실험에 대응해 한·미 당국이 B1-B 전폭기 등 전략자산을 동원한 연합훈련에 돌입하자 김정은은 공개 활동을 중단한 채 은신에 들어갔다. 그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 건 최순실 사태가 본격 점화된 10월 하순이다.

 

그런데 김정은의 동선은 이전과 달리 도발·위협 일변도가 아닌 ‘민생 챙기기’ 이미지를 구축하는 쪽으로 옮겨갔다. 수산사업소의 물고기 잡이 실태를 둘러보거나 식료품 공장을 방문하는 데 치중하고 있는 것이다. 서해안 최전방 섬 방어대를 고무보트를 이용해 방문하는 이벤트도 벌였지만 “적이 도발하면 응징하라”는 수준의 의례적인 언급을 하는 데 그쳤다. 남북관계가 대치국면으로 치달을 때 이곳에 들러 “항복문서에 도장 찍을 자들도 없이 수장시켜버리라”는 등의 극언을 퍼부었던 과거와 차이가 난다.

 

한·미 군 당국이 촉각을 곤두세워야 했던 6차 핵실험 관련 동향도 주춤하다. 또 무수단(북한은 화성10호로 지칭)을 비롯한 중·장거리 미사일 도발도 일단 멈춘 상태다. 연초부터 연일 핵과 미사일을 앞세워 ‘서울 불바다’와 ‘워싱턴·괌 핵 타격’을 위협하던 북한이 속도조절을 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강원도 원산 일대를 비롯해 북한이 수시로 단거리 미사일을 발사해 온 기지나 발사대에서도 특이 동향은 포착되지 않는다는 게 대북정보 당국자의 귀띔이다. 물론 김정은의 이 같은 숨고르기는 도널드 트럼프가 당선된 미 대선 결과와 향후 추이를 지켜봐야 하는 상황 때문일 수 있다. 하지만 북한이 최순실 사태를 계기로 박근혜 정부 흔들기를 통해 대남 주도권을 쥐는 데 당분간 집중하겠다는 의도가 드러난다. 공연히 핵실험 같은 도발적 행보를 통해 남한 국민들의 대북 불안감을 고조시키고 보수 세력의 결집을 야기하는 판단 미스를 범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박근혜 정부 출범 이후 김정은은 잇단 도발 행보로 남북관계와 한반도 정세를 긴장으로 몰아넣었다. 공교롭게도 남한 내에서 정책부실이나 비리사태로 정부와 대통령에게 비난이 쏠리고 여권이 궁지에 몰리던 상황에 맞춰 북한이 도발을 감행하는 듯한 일도 빈번했다. 지난 1월 4차 핵실험 직후 박근혜 정부가 개성공단 폐쇄라는 초강수를 뒀지만, 국민여론은 북핵 응징을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라는 쪽으로 박 대통령에게 힘을 실어줬다. 지난해 8월 북한의 목함지뢰 도발은 대북 반감을 고조시켜 결과적으로 안보·보수층의 결집을 유도했다. 이를 두고 야당이나 박근혜 비판 세력 쪽에서는 “해도 해도 너무한다. 김정은이 위기 때마다 ‘박근혜 구하기’에 나서는 것 아니냐”는 볼멘소리가 나왔다. 일각에서는 박근혜 정부가 북한과 ‘내통’하는 것 같다는 얘기까지 나올 정도였다.

 

 

핵실험·미사일 도발도 멈춘 상태

 

최순실 사태를 호재 삼아 대남 선동과 비방에 나선 북한은 전례 없이 치밀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어설픈 도발로 박근혜 정부가 위기를 모면하는 결과를 초래하는 건 피하겠다는 의지가 강하다. 남한 내 일부에서 ‘북한 위협’ 변수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오는 것까지 감안해 대남전략을 짜겠다는 뜻이다. 노동신문이 11월14일 논평에서 ‘통치 위기에 몰린 남조선이 북핵·미사일 위협 현실화 등을 거론하며 우리(북한)를 걸고넘어지고 있다’며 ‘박근혜 일당이 ‘북 도발 가능성’ 등 안보위기를 내세워 분노한 민심을 잠재우고 여론의 이목을 다른 곳으로 돌리려 한다’고 주장한 데서 이런 분위기는 확연히 드러난다.

 

2012년 초 김정은의 집권과 그해 말 박근혜 대통령의 당선은 세간의 관심을 불렀다. 남북대결의 맞수였던 박정희 대통령의 딸과 김일성 주석의 손자가 각각 남북 양측의 최고지도자로 다시 등장했다는 측면에서다. 박 대통령은 2002년 5월 평양을 방문해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회담했다. 당시 김정일은 1968년 1월 북한군 특수부대의 청와대 습격 미수 사태에 대해 “1·21 사건은 극단주의자들이 잘못 저지른 일이고 미안하게 생각한다”며 사과했다. 두 사람의 화해이자 박정희·김일성의 구원(舊怨)을 일부 씻어낸 만남이란 해석도 나왔다.

 

이런 맥락에서 박근혜와 김정은 두 사람은 정상회담 파트너로서의 만남이 기대됐다. 북한은 박근혜 대통령이 취임하자 ‘자손정치’란 말로 박정희 대통령의 딸이 집권했음을 알렸다. 3대 세습으로 집권한 김정은의 입장을 고려할 때 묘한 뉘앙스를 느끼게 하는 표현이다.

 

하지만 박 대통령이 최순실 사태라는 초특급 돌풍을 만나 사실상 좌초 상태에 빠지면서 향후 남북관계는 안갯속에 빠져버렸다. 남북한 최고지도자로서의 박근혜·김정은 간 대좌가 물 건너간 것이란 말이 나온다. 2002년 방북 때 ‘여사’로 불렸던 북한의 박근혜 대통령 호칭은 ‘역도·추물’ ‘청와대 아낙네’ 등으로 급전직하했다. 위기에 빠진 박 대통령과 남한 정국을 주시하고 있는 김정은이 대남 수읽기를 토대로 어떤 공세를 펼칠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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