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현석 변호사의 생활법률 Tip] '최대 다수 최대 행복'으로 따져본 사드배치
  • 박현석 변호사 (sisa@sisapress.com)
  • 승인 2016.09.05 1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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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 글에서 밝혔듯이 이번에는 마이클 샌델 교수의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에 나오는 학자들의 주장을 살펴보려고 한다. 먼저 제레미 밴덤의 주장이다. 고맙게도 제레미 밴덤의 주장은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이라는 간단한 문구로 요약된다. 중고등학교 시절 도덕이나 윤리 시간에 여러 번 공부했던 내용이다. 제레미 밴덤은 공리주의자(功利主義者)이고 그의 제자인 존 스튜어트 밀의 주장과 비교해 양적 공리주의자라고도 한다는 사실이 시험에 종종 나왔던 것으로 기억한다. 샌델 교수는 밴덤의 주장을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도덕의 최고원칙은 공리의 극대화인데, 여기서 공리란 쾌락이나 행복을 가져오고 고통을 막는 것 일체를 가리킨다. 입법자의 경우 공동체 전체의 공리를 극대화하는 선택을 해야 한다. 공동체는 허구이며 개인의 총합이 공동체라고 본다.

 

밴덤의 주장은 오늘날에 보면 너무 단순한 것 같기도 하고 정의와 상관없어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지난 주 글에서 기재한 것처럼 정의는 주관적 정의, 객관적 정의와 최고의 진리로서 정의라는 여러 차원이 있고 밴덤의 주장은 적어도 객관적 정의를 밝히는 한 기준은 될 수 있다. 공동체에서 구성원들 사이에 권리와 의무를 분배하는 기준으로 삼을 수 있기 때문이다. 샌델 교수 책 뿐 만아니라 여러 사람들이 밴덤의 주장이 ‘말이 안 된다’는 것을 아주 희화화해서 비판하고 있다. 최대다수가 행복할 수 있다면 한 명의 인권쯤은 눈 하나 깜박하지 않고 무시할 수 있단 말인가. 샌델 교수가 드는 사례처럼 여러 명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 한 명의 목숨을 빼앗는 것이 정의롭다는 것인가.

 

이런 비판 외에도 행복이라는 것은 지극히 개인의 주관적인 감정에 좌우되기 때문에 측정하기 어렵다는 점도 지적된다. 이러한 지적은 상당한 합리성을 갖추고 있다. 필자 또한 밴덤의 주장을 생각할 때마다 사회의 복잡성을 고려하면 이것이 무슨 설이라도 될 수 있는가 생각하며 혀를 찼다. 결국 밴덤은 정의를 원칙이 아닌 계산의 문제로 만든다는 것이고 인간행위의 가치를 하나의 도량형으로 환산해 획일화하면서 그것들의 질적 차이를 무시한다는 데 주된 문제가 있다.

 

ⓒ Pixabay


존 스튜어트 밀은 공리를 매 순간이 아니라 장기적 관점에서 봐야 한다든가 쾌락에도 질적인 차이가 있으므로 저급한 쾌락이 아니라 고급 쾌락을 추구해야 한다는 등의 말로 이러한 비판을 비켜가려고 했다. 그러나 밀의 주장조차도 공리주의에 대한 비판을 완전히 무력화시키지는 못한다. 무엇이 고급 쾌락이고 저급한 쾌락이란 말인가. 그것을 판단하는 절대적인 기준이 있는지. 그리고 장기적으로 공리를 판단한다는 것이 가능한가. 

 

그렇다면 밴덤의 공리주의는 정말 말이 되지 않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우리 사회 뿐만 아니라 세계 곳곳에서는 아직도 밴덤의 공리주의적 사고를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고 그렇게 정책들이 결정되고 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성주 사드 배치 문제를 생각해보자. 성주에 살지 않는 사람들 중 상당수는 북한의 핵과 미사일 위협이라는 현실에서 성주 내지는 제3후보지 사람들의 생존권은 다소 희생되어도 할 수 없다는 생각을 은연 중에 하고 있을 것이다. 그들의 희생을 통해 대한민국 국민 대다수가 안전과 번영을 누릴 수 있다면 그것이 정의로운 결정 아닌가 하고 말이다. 아직도 사드 배치문제는 많은 논란을 낳고 있지만 배치가 진행될 가능성이 높아 보이고 그 이면에 밴덤의 공리주의가 그림자처럼 어른거리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나만의 생각일까. 이렇게 공리주의는 아직도 우리가 살아가는 현대에도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사드배치 뿐만 아니라 소수의 희생을 강요할 수밖에 없는 순간, 공리주의에 대한 비판과 밀의 대안 등 공리주의의 맹점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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