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진해운 침몰’ 아닌, ‘한국 해운산업’의 침몰
  • 박성의 시사저널e. 기자 (sisa@sisapress.com)
  • 승인 2016.09.05 11:28
  • 호수 1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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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칙 지킨 법정관리, 역으로 국내 해운사와 정부에 대한 신뢰도를 떨어뜨릴 수도

기적은 없었다. 한진해운 채권단이 8월30일 “더 이상 추가지원은 없다”고 못 박으면서 세계 7위 해운사 한진해운이 8월31일 법원에 기업회생절차(법정관리)를 신청했다. 이 사건을 배당받은 서울중앙지법 파산6부(파산수석 부장판사 김정만)는 9월1일 한진해운 자산 처분을 금지하는 보전처분과 채권자의 한진해운 자산 강제집행을 금지하는 포괄적 금지명령을 내리기 위해 한진해운 본사와 부산 신항만 등을 방문하고 현장검증과 대표자 심문 절차에 들어갔다. 법원이 회생 절차 개시를 결정하면서 한진해운은 당장 청산은 면했지만, 정상화로 가는 길은 순탄치 않아 보인다. 법정관리 신청 뒤 선박 압류와 입항 거부, 해운동맹 퇴출 등의 악재가 연일 속출하고 있는 탓이다.

 

최악의 시나리오를 받아든 부산 지역과 해운업계는 아연실색하고 있다. 국내 1위 해운사가 청산되면 항만업계 종사자는 ‘실직 쓰나미’에 시달리고 운임은 폭등할 것이 틀림없다. 한진해운이 보유하고 있던 74개 서비스 루트도 사라지게 돼 100조원 이상 유·무형의 손실이 발생할 것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9월1일 부산항 신항 한진해운부두에 접안한 선박이 없어 분위기가 썰렁하다. 한진해운이 법정관리를 신청하면서 한진해운 선박 입출항과 컨테이너 운송에 차질이 빚어졌다. © 연합뉴스


“대량 실직 발생할까” 불안감 휩싸인 부산항

 

서울발(發) 한진해운의 비보(悲報)에 부산이 긴장하고 있다. 한진해운이 사라지게 된다면 부산항을 이용하는 외국 해운사가 줄어 환적 물량 감소가 불가피하다. 부산항이 지역경제에 미치는 파급력이 높은 탓에 벌써부터 부산 시민들은 우려 섞인 목소리를 내놓고 있다. 부산항에서 27년 동안 선박관리 업무를 담당했던 전삼환씨(53)는 “항구에서 일하던 뱃사람들이 경제에 대해 뭘 알겠나. 단지 일자리가 걱정일 뿐”이라며 “신문도 잘 안 읽던 아들이 벌써부터 아빠 실직을 걱정한다. 아들에겐 괜찮다고 말했지만 업황이 좋지 않아 불안한 게 사실”이라고 말했다.

 

한국선주협회는 환적화물이 줄어들면 부산항에서만 실직자 1000명 이상이 발생할 것으로 추산한다. 협회 분석 자료에 따르면, 한진해운 청산 시 해운업계에서만 1193명이 일자리를 잃게 된다. 부산항만에서 근무하는 선박관리 및 수리, 터미널, 환적화물 관련 종사자 1154명도 해고 위기에 놓여 총 2347명이 ‘실직 쓰나미’에 휩쓸릴 것으로 전망된다. 김영무 한국선주협회 상근부회장은 “한진해운이 청산된다면 불특정 다수 화물의 물류 중단과 중첩적인 소송으로 서비스 공급 재개가 불가능해진다”며 “한진해운 매출이 소멸되고, 환적화물 감소와 운임 폭등을 감안한다면 연간 17조원대의 손실이 발생한다. 일자리 감소도 불가피한 상황”이라고 밝혔다.

 

한진해운에 사망선고를 내린 채권단도 이 같은 피해를 염려하고 있다. 한진그룹 측의 자체 조달자금이 미흡한 상황에서 추가지원이 어렵다는 판단을 내렸지만, 국내 최대 해운사 청산이 결과적으로 내수경기에 악영향을 끼칠 것이라는 데는 채권단 대다수가 동의하고 있다. 한진해운 채권단인 수출입은행의 양종서 선임연구원은 “한진해운의 법정관리로 국내 해운산업 전체가 침체될 가능성이 높다”고 밝혔다. 경영이 어려워진 해운사를 원칙대로 처리하는 모습이 해외 화주들에겐 하나의 리스크(risk)로 고려될 수 있다는 것이다. 원칙을 지킨 법정관리가 역으로 국내 해운사와 정부에 대한 신뢰도를 떨어뜨릴 수 있다는 분석이다.

 


‘제2의 한진해운’을 기대하기는 어려워

 

한진해운과 비슷한 위기에 처했던 세계 1위 해운사 ‘머스크’와 3위 해운사 ‘CMA CGM’은 자국 정부와 채권은행으로부터 긴급지원을 받아 가까스로 살아남았다. 덴마크 정부는 머스크에 자국 수출입은행을 통해 5억2000만 달러(약 5755억원)를 지원하고, 정책금융기관이 대출 62억 달러(약 7조원)를 지원했다. 프랑스 CMA CGM은 채권은행과 민간 은행 등에서 9억3000만 달러(약 1조2000억원) 이상을 지원받았다. 양종서 연구원은 “해운업이 침체된 상황에서 세계 대형 해운사들도 유동성 위기를 피해 가지 못했다. 외국 정부 대다수는 해운업의 파급력 등을 고려해 무조건 살리고 보자는 입장이었다”며 “(한진해운의 청산으로) 한국에서는 해운사가 경영이 어려워지면 정부가 원칙대로 파산시킨다는 인식을 갖게 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어떤 화주들이 급한 화물을 한국 해운사에 맡기겠나”라고 지적했다.

 

금융 당국은 법정관리 과정에서 한진해운 자산을 공중분해시키지 않고 현대상선에 넘긴다는 방침이다. 법원도 ‘적정 가격에 한진해운의 영업 또는 자산을 양도하는 등 방안을 배제하지 않고 있으나, 이는 한진해운의 청산을 전제로 하는 것은 아니다’라며 회생 여지를 남겨뒀다. 법원은 외국 기항지에서 추가로 압류되는 선박이 없도록 강제집행 등의 위험을 방지하는 외국 법원의 금지명령(Stay Order)을 얻는 절차를 밟을 것으로 보인다. 다만 업계에서는 한진해운이 기적적으로 회생한다 해도 과거의 영광을 재현하기는 어렵다는 분석이 나온다.

 

한진해운에 수출화물 운반을 맡겼던 국내 기업들이 선사 교체를 검토 중이고 신뢰를 잃은 화주들의 이탈도 줄지을 것으로 전망된다. 또 한진해운이 청산된다면 ‘제2의 한진해운’을 기대하기도 어렵다. 대형 해운사가 탄생하기 위해서는 컨테이너선과 터미널, 항만을 연결하는 원양 서비스 루트가 필요한데, 이 같은 자금과 노하우 등을 가진 업체가 단기간 내에 탄생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한진해운은 1988년 대한선주 인수 후 30년에 걸쳐 영업망을 다져왔다. 현재 컨테이너선 100여 척, 터미널 11개, 해외 현지법인 23개를 보유 중이다. 또 90여 개 항만을 연결하는 74개 서비스 루트를 가지고 있는데 1개 루트를 개발하는 데 통상 1조5000억원이 들어간다. 한진해운 관계자는 “그룹이 한진해운 경영정상화를 추진하기 위해 해외 채권자와 선주사들의 협조까지 힘들게 이끌어냈음에도 불구하고 추가지원 불가 결정이 내려져 안타깝다”며 “한진해운이 법정관리 절차에 들어가더라도 한진그룹은 해운산업을 다시 살리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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