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폭스, 워너브러더스가 충무로에 뛰어드는 이유
  • 허남웅 영화 평론가 (sisa@sisapress.com)
  • 승인 2016.09.01 11:03
  • 호수 1402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20세기폭스의 《곡성》에 이어 워너브러더스는 《밀정》으로 한국영화에 뛰어들어

김지운 감독의 신작 《밀정》은 시작 부분에서 ‘워너브러더스’ 로고가 스크린에 뜬다. 순간 관객은 당황한다. 《밀정》이 한국영화 아니고 할리우드 영화였나? 한국영화가 맞다. 다만, 할리우드 6대 메이저 제작사 중 한 곳인 워너브러더스가 《밀정》을 제작했기 때문이다. 워너브러더스는 《곡성》을 제작한 ‘20세기폭스’에 이어 한국에 로컬 프로덕션을 세운 두 번째 할리우드 스튜디오다.

 

《밀정》은 지금 한창 한국영화계가 주목하고 있는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한 작품이다. 실제로 1923년에 발생했던 ‘황옥 경부 폭탄 사건’을 토대로 당시 무장독립운동 단체 의열단과 관련한 몇 가지 사실을 엮어 극화했다. 주인공은 의열단의 뒤를 캐는 조선인 출신 일본 경찰 이정출(송강호)이다. 조선총독부의 일본인 경무국 부장의 명령을 받은 이정출은 의열단의 리더 김우진(공유)에게 접근한다. 보자마자 서로의 정체를 알아차린 정출과 우진은 속내를 감춘 채 친하게 지내자며 각자 제안 하나씩을 한다. 우진은 상해에서 경성으로 물건을 들여오게 루트를 봐달라고, 정출은 의열단에 접근할 수 있게 중요한 인물과 연이 닿을 수 있도록 다리를 놓아달라고 요구한다. 이를 통해 우진은 폭탄을 들여와 경성 내 일제의 주요 시설을 파괴할 계획이다. 정출은 의열단을 결성한 의열단장 정채산(이병헌)을 생포해 그 공로로 조선총독부 내 더 높은 직위를 얻을 심산이다. 그렇게 정출과 우진은 경성을 떠나 상해로 향하는 가운데 또 다른 밀정이 이 둘을 쫓는다. 

 

“서구의 냉전시대 못지않은 질곡의 근대사를 가지고 있는 한국의 근대사를 소재로 스파이 영화를 만들어도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는 김지운 감독의 말처럼 《밀정》은 영화팬이라면 누구나 익숙한 ‘스파이물’을 장르로 채택하고 있다. 하지만 《밀정》은 한국 관객들이 더욱 감정이입하고 깊이 이해할 만한 한국의 특수한 역사를 다루고 있다. 그런 맥락에서 《경성학교: 사라진 소녀들》(2015), 《암살》(2015), 《아가씨》(2016) 등을 잇는 ‘경성 영화’라고 부르는 것이 더 적당할 듯싶다.       

 

영화 《밀정》의 조선인 출신 일본 경찰 이정출(송강호·왼쪽 사진)과 의열단의 리더 김우진(공유)


할리우드 제작사의 로컬 프로덕션 활발

 

한국적인 배경과 소재의 영화를 할리우드의 워너브러더스가 제작한다는 건 어떤 의미가 있을까? 할리우드는 2010년대 들어서면서 자국 극장 매출이 줄어들고 부가 판권 시장의 규모가 축소되면서 해외 시장의 중요성이 더욱 커지고 있다. 단적으로, 미국의 영화 흥행 정보 사이트 ‘박스오피스 모조’의 자료에 따르면, 할리우드의 2015년 전 세계 박스오피스 상위 10위권 영화의 수익 비중은 해외 시장이 66%를 차지하면서 자국 시장의 수익률을 훌쩍 넘어섰다. 

 

그러면서 할리우드는 해외 시장에 더 많은 공을 들이고 있다. 글로벌 팬층을 가진 할리우드 배우와 감독의 해외 시장 방문을 늘렸고, 관련 국가의 배우와 감독을 할리우드 영화에 기용하고 지역 로케이션을 적극적으로 진행한다. 그리고 또 하나. 《밀정》의 경우처럼 해외 시장 현지에 로컬 프로덕션을 세우고 영화를 제작한다. 단, 여기에는 조건이 있다. 한국처럼 자국 영화 시장의 점유율이 높아야 한다. 

 

한국 시장에서의 로컬 프로덕션 가능성을 가장 먼저 알아본 건 20세기폭스였다. 20세기폭스는 ‘폭스 인터내셔널 프로덕션 코리아’를 설립하고 《런닝맨》(2012)을 시작으로 《슬로우 비디오》(2014), 《나의 절친 악당들》(2015)을 거쳐 《곡성》으로 큰 성공을 거뒀다. 20세기폭스의 뒤를 이어 워너브러더스는 ‘워너브러더스 코리아’를 세우고 《밀정》을 첫 번째 작품으로 선택했다. 한국을 대표하는 김지운 감독 연출, 송강호·공유·이병헌 등 빅스타 출연, 지금 한창 인기 있는 경성 배경의 영화, 다가올 추석 시즌의 기대작 등 여러 면에서 《밀정》은 흥행 가능성이 큰 작품으로 주목받고 있다.

 

워너브러더스 코리아의 최재원 대표는 영화주간지 씨네21과의 인터뷰에서 ‘한국의 제작사·투자사와 할리우드 스튜디오의 로컬 프로덕션에서 일할 때의 차이’를 묻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워너브러더스에선 시나리오가 가진 장점을 많이 본다. 영화의 본질에 더 접근한다고 해야 할까. 영화 이외의 것에 눈치를 좀 덜 본다고도 할 수 있겠다.” 말인즉, 시장에서의 흥행 가능성보다 작품이 지닌 힘에 더 주목한다는 의미로 들린다. 

 

실제로 20세기폭스가 제작한 《곡성》은 천편일률적인 만듦새로 우려를 자아냈던 대다수 한국영화와 비교해 상당히 모험적인 작품이었다. 해피엔딩을 선호하는 산업 환경 내에서 악마의 정체를 따져 묻는 이야기는 워낙 어두운 데다 비극적이었다. 생애 첫 단독 주연을 맡은 곽도원은 흥행에서는 검증이 되지 않은 배우였다. 3시간에 가까운 러닝타임은 2시간 안에 영화를 끝내 상영 횟수를 늘려서 수익을 극대화하려는 극장의 전략과도 맞지 않았다. 결과는? 작품성은 물론이고 700만 가까운 관객을 모으며 일찌감치 올해의 영화라는 극찬을 받았다.

 


새로움 수혈 받은 한국영화, 차기작들도 대기  

 

140분 동안 상영되는 《밀정》은 선악이 구분되지 않는 이정출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상해 임시정부에서 활동하다 조선총독부에 중용된 이정출은 김우진과의 만남 이후 의열단을 위해 활동하는 등 도대체가 정체를 종잡을 수 없는 인물이다. 이는 《밀정》과 함께 ‘경성 영화’로 분류되는 《암살》과 비교해 확연히 차이가 나는 지점이다. 《암살》은 독립군 저격수 안옥윤(전지현)의 대척점에 친일파 염석진(이정재)을 위치시키고 선악 구도를 이야기의 추동력 삼아 민족감정을 자극(?), 1270만 관객을 모으는 데 성공했다. 반면 정체가 불분명한 정출은 관객들에게 ‘그는 어느 쪽의 밀정인가?’를 추측하게 하는 가운데 예상치 못한 전개로 영화적 재미를 선사한다. 그러니까 할리우드 로컬 프로덕션의 존재는 그동안 잊힌 한국영화의 새로움을 되살릴 좋은 기회다. 

 

워너브러더스는 《밀정》에 이어 신예 이주영 감독의 《싱글라이더》를 두 번째 제작 작품으로 선택했다. 《곡성》으로 재미를 본 20세기폭스는 《슈퍼맨이었던 사나이》(2008) 이후 장편영화를 발표하지 못했던 정윤철 감독의 사극 《대립군》을 선보일 예정이다. 할리우드 메이저 스튜디오의 로컬 프로덕션이 한국의 영화 시장을 조금씩 변화시키고 있다.  

관련기사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