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데타가 끝났으니 이제는 '귈렌' 제거의 차례
  • 김회권 기자 (khg@sisapress.com)
  • 승인 2016.07.18 00:19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쿠데타가 발생한지 6시간 뒤,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이 이스탄불 아타튀르크 국제공항에 도착하면서 상황은 모두 마무리됐다. 2016년 7월15일 발생한 터키의 쿠테타는 이렇게 '6시간 천하'로 마무리됐다. 터키 정부는 쿠데타를 빠르게 진압하며 3천명에 가까운 쿠데타 세력을 체포했다. 의아한 대목은 터키 전역의 판사와 검사 2700여명이 해임된 점이다. 터키 정부는 이들에 대한 체포에도 나선 상황이다. 여기에 등장하는 한 사람의 이름이 있다. 재미 이슬람학자 펫훌라흐 귈렌이다. 에르도안 터키 총리와 정부는 그를 쿠데타의 배후 세력으로 지목했으며, 판사와 검사들의 해임 이유도 귈렌에 동조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번 쿠데타는 에르도안 집권 이후 10여 년, 터키가 직면한 모든 모순의 축소판과 다름 없다. 이번 쿠데타에 관해서는 아마 앞으로 좀 더 자세한 이야기들이 쏟아져 나오겠지만, 과거 터키의 역사를 되돌아 보면 군이 정부에 반기를 드는 일은 드물지 않았다. 

터키뿐만 아니라 개발도상국에서는 군이 정부를 비판하며 궐기에 나서는 경우가 더러 있었다. 터키도 그랬다. 1960년, 1971년, 1980년, 1997년, 그리고 2016년에 쿠데타가 발생했다. 특히 1997년 쿠데타는 2016년의 쿠데타와 관계가 있다. 1997년의 쿠데타는 1995년 선거에서 복지당(Welfare Party)이 제 1당이 되고 이듬해인 1996년 복지당을 중심으로 하는 연립정권이 성립한 것에 대한 반작용이었다.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은 쿠데타의 배후로 펫훌라흐 귈렌을 지목하며 그를 추방해 터키로 넘길 것을 미국에 공식적으로 요구했다.
터키 국민의 대다수는 무슬림이다. 하지만 1922년 건국 이후 특정 종교에 특별한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 '세속주의(정교분리)'를 국시로 해왔다. 공공 장소에서 무슬림 여성의 상징인 스카프 착용을 규제하는 등 세속주의가 국민 생활에 미치는 영향은 지대했다. 그러나 1970년대 이후 근대화의 동력이 떨어지고 자본주의나 공산주의 같은 세속적인 이데올로기에 대한 터키인들의 신뢰가 떨어졌다. 중동 각국에서는 비슷한 이유로 종교 부흥 운동이 진행됐고 이슬람 세력이 대두하게 됐는데, 터키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 결과 이집트에 뿌리를 둔 '무슬림 형제단'과 같은 이슬람 세력이 지지를 받을 수 있었다. 정교분리 원칙과 반대되는 이념을 가진 복지당이 1995년 선거에서 승리하게 된 이유였다.

여기에서 지금 터키의 대통령인 에르도안이 등장한다. 에르도안은 1994년 40세의 나이로 복지당 후보로 출마해 이스탄불 시장에 당선되며 새로운 기수로 주목받았다. 그러나 복지당이 떠오르고 선거에서 승리하자 '터키 건국의 아버지'인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가 주창한 세속주의를 옹호하는 군이 개입하면서 1997년 쿠데타가 일어났다. 복지당은 정부에서 축출됐고 1998년 터키헌법재판소는 "정교분리 원칙에 적대적이고 이슬람 율법을 추구하기 때문에 체제에 위협이 된다"며 복지당을 해산시켰다. 

그후 에르도안은 재기를 도모했다. 복지당이 해산한 뒤 '미덕당'을 주변 사람과 결성했고 1999년 선거에서 약진했다. 그러나 터키 헌법재판소는 미덕당에도 해산 명령을 내렸다. 여기에 굴하지 않고 2001년 에르도안은 동료들과 함께 정의개발당(AKP)을 출범시켰다. 그리고 이 당은 2002년 선거에서 제 1당이 되었고 에르도안은 총리에 취임하게 됐다. 세속주의를 간판으로 내건 나라에서 이슬람주의 정당이 권력을 잡을 수 있었다.

에르도안 정부는 이슬람적인 가치에 바탕을 둔 정책을 점진적으로 실행하기 시작했다. 2008년 대학에서 여성들이 스카프를 착용하는 것을 인정하는 법안이 가결됐다. 2013년에는 90년간 금지돼 온 여성 공무원의 스카프 착용 금지를 해제했다. 이슬람 교리에 따라 술 판매를 제한하는 법안도 만들어졌다. 

이슬람 정책 실시와는 별개로 에르도안은 자신의 정적들을 제거하기 시작했다. 일단 세속주의자가 많은 법원과 미디어, 그리고 군은 에르도안에게 눈엣가시였다. 특히 1997년 쿠데타를 기억하고 있었기에 군의 약화가 가장 중요했다. 2010년 터키의 전 공군과 해군 참모총장 등 터키군 핵심 수뇌부를 포함한 51명이 쿠데타 모의 혐의로 체포됐다. 2011년에는 쿠데타를 기도했다는 혐의로 전·현직 군간부 133명이 법정 구속됐다. AKP에 비판적인 인사들은 이런 과정들을 통해 군에서 점점 사라져갔다. 이 시기 즈음이 AKP에 대한 군의 위협이 약해지고 반대로 정부의 민간 통제 우위가 확립된 시점이기도 했다.

터키 이슬람운동의 양대 축인 AKP와 귈렌파

이 과정에서 귈렌은 중요한 역할을 했다. AKP와 귈렌파는 터키 이슬람운동의 중요한 양대 축이었다. 1960년대 터키에서 시작한 히즈멧(봉사) 운동은 교육과 빈곤 문제에 주력한 사회운동이었다. 특히 종교 교육을 정부의 간섭 없이 실시해 왔다. 히즈멧은 봉사를 의미하는 단어지만 보통은 리더인 귈렌의 이름을 따와 '귈렌 운동'이라고도 불렀고 함께하는 세력을 '귈렌파'라고 했다. 히즈멧 운동에 대한 견해는 터키 국내에서도 갈린다. 이슬람 부흥 운동이라고 지적하며 터키의 정교 분리의 원칙을 위협하는 존재라고 비판하는 목소리도 있다.

실제로 히즈멧을 통해 귈렌파는 터키 국내외에 적지 않은 고등교육기관을 가지고 있다. 병원이나 은행, 보험사도 설립했을 정도로 터키 정재계에 실체와 영향력이 있는 조직이다. 특히 군과 사법부, 재계와 언론사 등 터키 엘리트층에 지지자가 많다고 알려져 있다. 일각에서는 '세속주의를 부정하게 세뇌하는 단체'라는 소리도 듣는다.

AKP와 귈렌파는 기본적으로 이슬람주의라는 노선 아래 이해 관계가 일치했다. 그래서 2002년 AKP가 집권했을 때 귈렌파는 힘을 보탰다. 귈렌파에게 AKP는 이슬람주의를 달성하게 해 줄 정치적 수단이었다. 서로 종교적 지향점이 같았고 잊을만하면 세속주의라는 무기로 위협하는 군부에 대해 반감을 가진 점도 같았다. 

AKP는 군과 권력 다툼을 할 때마다 귈렌파 지지자와 그들의 광범위한 네트워크로부터 도움을 받아 왔다. 이 네트워크는 귈렌파가 수십 년에 걸쳐 구축한 것이었다. 귈렌파를 지지하는 터키 엘리트층은 다양한 정부 기관에 존재했다. 군부가 AKP 집권 동안 여러번 꾀했다가 적발된 쿠데타 음모들. 그것이 누설된 것도 정부 기관 내 귈렌파 네트워크가 한 일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그 힘은 막강했다.

귈렌파는 군이 정치에 영향력을 미치는 터키의 관행을 무너뜨리기 위해 AKP 집권 이후에도 노력해오고 있었다. 이 노력은 군이 민주적으로 선출된 터키의 이슬람주의 정부를 전복한 것에 대한 대응책이었다. 군은 이슬람정부를 무너뜨릴 때마다 터키 헌법의 원칙, 즉 세속주의를 국가의 기본에 둔다는 헌법의 원칙을 들고 나왔다. 그래서 귈렌파는 AKP가 군에 대해 보다 강경한 노선을 취할 거라 기대했다. 

귈렌파가 부담이 된 AKP

하지만 둘 사이에는 군을 둘러싸고 시각차가 있었다. AKP는 정치 집단이다보니 군을 찍어누르기보다는 적당히 타협하고 제어하는 쪽으로 관계 설정을 하려 했다. 예를 들어 2010년 터키 법원은 2월과 7월, 두 번에 걸쳐 쿠데타 혐의를 이유로 군 장교 102명에 대해 체포 영장을 발부했다. 하지만 구속 영장이 나온 102명 중 실제로 구속된 사람은 1명 뿐이었고 그조차도 계급이 낮은 부사관에 불과했다. 당시 귈렌파는 구속 영장의 집행을 촉구했지만 AKP는 구속 영장을 무효로 하는 대신 군부의 고유 권한이었던 승진 문제 등 군 인사 정책에 제동을 걸었다. 체포 영장과 군 인사권을 교환하며 협상하는 모양새였다. 당시 귈렌파는 법무장관과 국방장관의 사임을 요구했지만 AKP는 이를 무시했다.

AKP와 귈렌파의 2인3각은 터키 내 세속주의 엘리트 그룹을 무너뜨리기 위한 동행이었다. 그러나 AKP는 귈렌파와 협력하는 것이 스스로를 과격하게 보이고 자신들의 정치적 장래를 위태롭게 할 수 있다는 점을 이해하고 있었다. 반대로 귈렌파는 자신들의 정치동맹인 AKP가 터키의 세속주의에 근본적인 변화를 만들어 줄 것을 기대했다. 이 둘의 간극은 점점 시간이 지나면서 서로에 대한 의심으로 번졌다. 어느 순간 AKP에게 귈렌파는 부담으로 변했다. 군을 약화시키고 문민 통제가 어느 정도 가능해졌으며 빈곤층을 중심으로 일반 유권자에서도 폭넓은 지지를 얻게 되자 에르도안 정부가 귈렌파와 협력해야 할 이유는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히즈멧은 터키 내에서 적지 않은 지지자를 갖고 있는데 특히 법조계의 지지가 두터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어깨동무 대신 등돌림을 선택한 에르도안 대통령은 귈렌파를 그동안 제거의 대상으로 발언해 왔다. 2014년 에르도안 정부가 터키 내 트위터를 차단했을 때 헌법재판소가 이를 두고 '인권 침해'로 인정한 것, 2014년 말 도시 개발 사업과 관련해 여러 장관들의 부패 혐의가 발각돼 3명의 각료가 사임했던 일, 이 모든 것을 에르도안 대통령(당시 총리)은 귈렌파의 음모라고 주장했다. 귈렌파의 지지자가 많은 사법부의 음모라는 얘기였다. 그리고 이번 쿠데타의 뒷수습으로 법조인들을 체포하는 것 역시 에르도안 대통령이 귈렌을 배후로 강조하며 '귈렌파 청소'를 천명하는 것과 맞닿아있다. 미국에 머물고 있는 귈렌은 오히려 이를 부인하며 '기획 쿠데타'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