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찬욱 상병 정말 자살했을까?
  • 정락인 객원기자 (sisa@sisapress.com)
  • 승인 2016.07.13 11:16
  • 호수 13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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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족 “군 수사결과 못 믿겠다” 유해 인수 거부, 군과 팽팽한 입장 차이 보여

 


 

지난 2014년 1월9일 강원도 홍천의 육군 제11기계화보병사단(화랑부대)의 한 중대가 발칵 뒤집혔다. 이날 오후 1시50분쯤 생활관 화장실에서 목을 맨 사병이 발견됐다. 김찬욱 상병(당시 22세)이었다. 1군 헌병대, 11사단 헌병대, 육군중앙수사단 등 군 수사기관이 수사에 나섰다. 현장 감식, 시신 검시, 부검 등을 통해 수사결과를 발표했다. 군은 사망경위, 발견 당시 상황, 사건현장, 의사 소견, 국방부조사본부 과학수사연구소의 감정결과 등을 종합해 타살 가능성은 없는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스스로 목을 매어 사망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유족 측은 군의 수사결과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유족 대표인 최명자씨(김찬욱 상병 이모할머니)는 “장례를 치르고 나서 수사결과를 보고는 이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사망진단서에 ‘자살’이라고 사인하라는 것을 우리가 ‘못한다’고 거부했다”고 밝혔다. 군이 ‘자살도 순직처리가 된다’며 수사결과를 인정하고 자살로 받아들이도록 했다는 것이 최씨의 주장이다. 

 

고 김찬욱 상병의 시신은 발견 다음 날인 1월10일 부검한 후 15일 화장 절차를 거쳐 강원도 횡성의 육군 임시 봉안소에 안치됐다. 군 복무 도중 숨졌지만 유족들이 진상 규명을 요구하며 인도를 거부하는 유해를 ‘미인수 영현’이라고 하는데 고 김찬욱 상병도 여기에 속한다. 김 상병의 영혼은 죽은 지 2년이 넘었지만 이승을 떠나지 못하고 구천을 떠돌고 있는 셈이다. 

 

 

“군, 수사 시작 전 자살 결론”

 

유서는 발견되지 않았다. 군은 김 상병의 관물대에서 나온 메모지를 집중 조사했는데, 이것은 동기생이면서 같은 분대원인 박아무개 병장이 남긴 것이었다. 여기에는 김 상병이 박 병장을 성추행한 것처럼 나와 있다. 군 수사 당국은 이것을 김찬욱 상병이 자살한 이유로 판단했다. 군은 김 상병이 박 병장의 메모를 보고 사과하려고 했으나 받아주지 않자, 주변 동료들이 알 경우 따가운 시선을 받게 될 것이 두려웠고, 이것이 자살로 이어졌다고 추정했다. 

 

그러나 유족 측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죽은 자는 말이 없기 때문에 ‘성추행’이 실제 있었는지부터 의심한다. 또 김 상병의 죽음을 ‘자살’로 짜 맞추려 했다는 시각을 갖고 있다. 그 이유에 대해 최명자씨는 “찬욱이가 사망했다는 얘기를 듣고 우리가 홍천 부대에 도착했더니 수사과장(준위)이라는 사람이 (박 병장의) 쪽지(복사본)를 보여주며 ‘찬욱이가 이것 때문에 자살한 것 같다’는 말을 했다. 그때는 수사를 시작하기도 전이었다”고 말했다. 유족은 군이 이미 자살로 결론짓고 박 병장의 메모를 그 이유로 만들었다고 보고 있다.

 

그런데 기자가 군 수사 자료를 살펴보니 몇 가지 의문스러운 점이 발견됐다. 유족 측도 이것을 군 수사의 문제점으로 지적했다. 우선 박 병장의 필체다. 군은 박 병장의 메모 등 필체를 감정해본 결과 본인이 작성한 것이 맞다는 결론을 내렸다. 군 수사 자료에는 박 병장의 진술서가 첨부돼 있는데 4번에 걸쳐 작성됐다. 김 상병 관물대에 남겼다는 메모까지 합치면 박 병장의 필체를 비교해볼 수 있는 것은 총 5가지다. 진술서의 필체는 비슷해 동일인의 필체로 판단된다. 이번에는 메모와 진술서를 모두 한곳에 놓고 비교해봤다. 그랬더니 육안으로 봤을 때 메모와 나머지 진술서의 필체가 다르게 보였다. 자음과 모음의 자획 구성, 필순·필획 등 전체적인 필체의 특징에서 차이가 났다.

 

또 하나 이상한 게 있었다. 박 병장은 김찬욱 상병(2012년 6월26일)보다 입대가 정확히 42일(2012년 5월14일) 빠르다. 김 상병의 전역 예정일자가 2014년 3월25일인 것을 감안하면 박 병장의 전역은 이보다 앞선 2월13일이다. 그런데 박 병장이 마지막에 쓴 진술서는 작성한 연도와 날짜가 ‘2014년 4월8일’이다. 이때는 박 병장이 전역하고 민간인 신분일 때다. 내용과 연도가 맞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군 수사기관(육군 중앙수사단)과 사망진단서(시체검안서)의 사망추정시간이 확연하게 다르다. 군 수사기관의 사망추정시간은 1월9일 오후 1시30분부터 시신으로 발견된 오후 12시50분 사이다. 김 상병이 마지막으로 목격된 후 최초 시신으로 발견된 시간을 기준으로 했다. 그러나 군의관이 발급한 사망진단서(시체검안서)에 나와 있는 사망추정시간은 1월8일 오후 1시40분 이전이다. 군 수사기관과 군의관의 사망추정시간이 1~2시간도 아니고 무려 24시간의 차이가 나고 있다. 

 

 


 

시신 발견 전 심하게 아팠다

 

김찬욱 상병이 목을 맨 자세는 누가 봐도 부자연스럽다. 김 상병의 시신은 생활관의 화장실 열린 좌변기 칸 입구 상단 알루미늄 지지대에 전투화 끈으로 목매어 있었다. 양팔은 바닥을 향해 축 늘어뜨리고 있고, 맨발인 양발은 연두색 슬리퍼를 착용한 채 바닥에 닿아 있었다. 목맨 올가미는 헐렁한 상태로 똑바로 서면 목을 조이고 있는 올가미가 느슨해지게 보인다. 김 상병이 목을 매달았다고 해도 발만 디디면 살 수 있을 것 같은 모습이다. 

 

김 상병의 착용복장은 상의는 내복, 하의는 군용 동계 활동복을 입었다. 전투훈련이 없는 주말에 휴식을 취할 때 입는 복장이다. 그러나 김 상병이 목을 맨 상태로 발견된 1월9일은 평일(목요일)인 데다 한겨울이었다. 아무리 전역을 2개월 정도 앞둔 말년 병장(김 상병은 태권도 승단시험에서 탈락해 1개월 진급 누락 상태)이라 할지라도 평일 근무시간에 내복에 활동복 바지를 입고 있는 게 의아하다. 

 

아들의 사망 소식을 전해 들은 김 상병의 아버지는 급히 홍천 부대를 찾았다. 그리고 1월9일 오후 4시11분부터 10시21분까지 김 상병의 아버지와 최초 발견자, 1군 헌병대 수사과장 등이 참여한 가운데 사고 현장을 감식했다. 부검에는 입회하지 않았다. 

그런데 2014년 1월10일 육군 중앙수사단 제1지구수사대가 작성한 ‘검시조서’에는 변사자인 김 상병의 유족 측 검시 참여인으로 ‘변사자의 외조부, 정○○(64) 등 3명’이라고 명시돼 있다. 유족 측에 따르면 “찬욱이 부모는 어릴 적 이혼해서 연락이 되지 않고 외조부가 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찬욱이가 죽은지도 모르고 있을 텐데 어떻게 외조부가 올 수 있느냐. 실제 그날 외가에서 누구도 오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날 검시에 참여한 것은 김 상병 아버지가 유일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육군 중앙수사단이 기록한 ‘외조부 등’은 누구인지가 의심스럽다.

 

김 상병은 시신으로 발견되기 전 몸 상태가 좋지 않았다. 중대원들의 진술서를 봐도 김 상병의 몸 상태가 상당히 심각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들의 말을 종합하면 김 상병은 사망 2일 전인 1월7일 아침부터 아프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생활관에 누워 있었고 밥은 동기나 소대 후임들이 가져다 줬다. 화장실 세면장에서 고개를 하수구 쪽으로 숙이고 토하는 모습이 목격되기도 했고, 며칠 전부터 허리와 골반이 아프다는 호소를 듣기도 했다. 

 

김 상병에게는 왜 이런 증상이 있었던 것일까. 유족들은 “밥을 못 먹고 누워 있으면 병원을 보내야지, 이렇게 아파하다가 병원 한 번 못 가보고 죽음을 맞이했다”며 “병사를 관리하는 소대장 외 상급자들에게 책임을 묻고 싶다”며 분통을 터트렸다. 

김 상병의 시신 검시결과 오른쪽 앞 부위 아래로부터 14cm 지점 1곳, 19cm 지점 1곳에 각각 다소 시일이 경과된 것으로 추정되는 가피(부스럼 딱지)가 형성돼 있었다. 이게 외부요인 즉 구타에 의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김 상병이 부대 내에서 간부들로부터 구타나 괴롭힘을 당하지는 않았는지 의심해볼 수는 있다. 

 

군 수사기관도 이런 일이 있었는지를 조사했다. 한 후임은 자신이 당직병 근무를 하던 2013년 12월31일 저녁 7시쯤 김 상병이 통합키를 분실해 행정반에서 꾸중을 듣는 것을 봤다고 진술했다. 목맨 시신으로 발견되기 8일 전이다. 

 

2013년 11월11일 김 상병이 작성한 일기 형식의 글을 보면 장아무개 소대장이 제설작업을 하고 복귀하던 김 상병의 전신을 수차례 때렸다는 내용이 있다. 이 내용으로 보면 소대장이 장난하듯 때린 것은 아닌 듯하다. 장 소대장의 진술서를 보면 김 상병을 수시로 때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그는 ‘장난’이었다고 표현했다. 한 중대원은 “2소대장이 찬욱이를 발로 차고, 비틀고, 꺾고 그랬었다. 정확한 날짜는 기억은 나지 않지만 복도에서, 그런 모습들도 보았었고, 장난 식으로 하는 것으로는 보였지만, 좀 심했던 것 같다”고 진술했다. 

 

김 상병 개인 신상 그리고 군 생활과 관련된 것을 자세하게 들여다봤다. 김 상병은 2012년 6월26일 입대해 같은 해 8월17일 자대 배치를 받았다. 2014년 3월25일 제대 예정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목맨 시신으로 발견됐을 당시에는 전역을 불과 2개월16일 정도밖에 남겨놓지 않은 상태였다. 김 상병은 군 생활에 누구보다도 솔선수범했고, 성격도 쾌활하고 긍정적이었다. 동료 사병들의 진술서를 보면 하나같이 김 상병에 대해 아낌없는 칭찬을 해놓았다. 

 

김 상병은 죽어서도 슬프다. 사망한 지 2년이 지났지만 아직 군을 나오지 못하고 있다. 김 상병이 ‘자살이냐, 타살이냐’를 놓고 군과 유족의 입장 차이가 극과 극을 달리고 있다. 김 상병은 언제 군 봉안소에서 나올 수 있을까.  

 

“절대 자살할 애가 아니다”

故 김찬욱 상병 이모할머니 최명자씨 인터뷰

 

 

© 故 김찬욱 상병 유족 제공

군 수사기록에 보면 유족이 ‘자살을 수긍했다’고 나와 있다.

 

처음에는 경황이 없어 자살이라고 하니까 자살이라고 말한 것이다. 자살로 인정해서 사인한 것이 아니다. 장례를 치르고 나서 수사결과를 보고는 이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사망진단서에 ‘자살’이라고 들어가는 것에 사인하라는 것을 우리가 ‘못한다’고 거부했다. 군은 또 ‘자살도 순직처리가 된다’며 수사결과를 인정하고, 자살로 받아들이도록 현혹했다. 

 

왜 자살이 아니라고 보는 것인가.

 

찬욱이가 자살할 애도 아니고 자살할 이유도 없다. 11일 후면 휴가도 예정돼 있었고 제대도 얼마 남지 않았다. 힘들어도 휴가와 제대를 생각하며 견뎠는데 자살했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받아들이기 힘들다. 그리고 자살할 애도 아니다. 

 

유족은 어떻게 죽었다고 보는 것인가.

 

타살됐거나 아파서 죽었다고 본다. 자살은 절대 아니다. 

 

 

군이 어떻게 해야 된다고 보는가.

 

찬욱이가 어떻게 죽었는지 우리가 제기하는 의혹들에 대해 한 점 의혹도 없이 규명해야 한다. 그렇게 해서 찬욱이가 차디찬 봉안소에서 나와 양지바른 곳에서 영면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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