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관용 회고록] ‘미워도 다시 한 번’…昌을 당 대표로
  • 박관용│前 국회의장 정리=김현일 대기자 (sisa@sisapress.com)
  • 승인 2016.07.07 09:35
  • 호수 13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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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S “정치적 필요” 그러나 호랑이 집 안에 들인 격

 

1996년 4·11 총선 1개월 전 마련된 신한국당 선거대책위 오찬. 오른쪽부터 이회창 선대위원장, 민주계 핵심 최형우·서석재 의원. 그해 1월 당 총재인 김영삼 대통령이 영입한 이회창과 최형우·서석재 간 껄끄러움은 세 사람의 표정에서도 금방 읽힌다.


 

‘정치에 영원한 적도, 동지도 없다’처럼 정치의 비정(非情)을 적확하게 꼬집는 말은 없다. 권력을 위해서라면 언제라도 합치고, 또 언제라도 칼끝을 겨누는 게 정치판의 속성이다. 형제간 골육상쟁(骨肉相爭)이 더 살벌하듯 비록 허구일지라도 한때 살가운 체하던 이들이 적으로 등 돌릴 때는 더욱 냉엄하고 험악하기 마련이었다. 가슴 깊이 더 맺히는 탓인지 다른 상대에게는 베푼 관용조차 없는 경우가 허다했다.

 

이런 악연(惡緣)의 대표적 사례가 제14대 김영삼(YS) 대통령과 ‘이회창(昌)’이다. YS는 昌에게 감사원장, 국무총리 자리를 주었다. 여당 대표·대통령 후보 지위도 갖게 했다. 내켜서 시킨 게 아닌, 정치적 필요에 의해 했을망정 YS는 시혜를 베풀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昌은 달랐다. 그 반대였다. 昌에게 YS는 대통령의 꿈을 가로막은 결정적 장해물일 따름이다. YS와 昌 간에는 YS와 DJ(제15대 김대중 대통령) 간 애증(愛憎)과 비교가 안 되는 ‘원망’이 존재한다. YS로서는 DJ와는 애당초 경쟁 관계였지만 자신이 데려다 키운 ‘수하(手下)’ 昌에게 물렸다는 배신감이 강하게 작용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DJ가 昌을 끌어안으면”에 놀라 昌과 화해

 

“昌이 경질된 지 40여 일이 되던 1994년 6월1일 김 대통령이 러시아 방문을 위해 출국했다. 昌이 총리직에서 물러난 게 ‘사임’인지 ‘해임’인지를 놓고 설왕설래하던 언론의 관심도 다소 잦아들 즈음이다. 청와대를 지키기 위해 서울에 남았던 나는 昌의 서울 구기동 자택을 찾아갔다. 두 사람(YS-昌)의 원만한 관계 정립을 위해 나름대로 애쓴 것을 아는 그는 반갑게 맞아주었다. ‘두 분을 잘 모시지 못해 죄송합니다. 두 분이 만나서 오해를 푸는 게 좋겠습니다’고 권유했다. 내키지 않는 떠름한 표정이었지만 그는 ‘알겠다’고 했다. 순방을 마친 YS 귀국 후 대통령에게 昌을 다독이라고 진언했다. 昌을 만났다는 얘기는 않고, ‘칼국수라도 대접하면서 얘기를 나누시지요. 어차피 퇴임 총리에게 훈장도 수여해야 하지 않습니까’라고 했다. 하지만 YS는 묵묵부답이었다. 그 의미는 빤했다. 안 되겠다 싶어 ‘1년 후면 지방선거가 있습니다. DJ가 昌을 서울시장 후보로 영입하면 어찌 될까요. 그렇게 되면 정부 체면은 뭐가 되겠습니까’라고 하니까 대통령의 태도가 금방 달라졌다(YS와 대화할 때는 이 관련 정보를 갖고 대통령에게 말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나중에 DJ가 昌을 새정치국민회의 서울시장 후보로 내세우기 위해 접촉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다른 것은 다 몰라도 昌이 DJ 쪽에 서는 것은 YS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끔찍한 사건이다. 며칠 뒤 YS는 昌을 청와대로 초치해 식사를 함께했다.” 박관용 전 국회의장은 청와대 비서실장으로서 고심했던 시절을 회고하면서 YS가 昌을 초청하지 않았다면 YS와 昌은 마주하지 않았을 소지가 다분하다고 했다. 昌이 YS를 먼저 찾아가는 일은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昌은 YS를 아주 어려워했다. 대쪽 별명을 가진 昌이라 고개 숙이는 것을 꺼리기도 했지만 격정에 휩싸이면 욕설도 마구 퍼붓는 YS를 무서워해서다. 나중의 대통령 선거(2002년) 때 일이다. 昌에게 ‘YS와 화해하지 못하면 선거에 진다. 그러니 찾아가시라. 정월 초하루 아침 7시쯤 세배를 가면 YS도 차마 물리치지 못할 것이다. 잘잘못 따질 계제가 아니다’고 했다. 昌은 내 말을 수첩에 적었지만 그게 전부였다. 

찾아가지 않았고 끝내 YS와 화해하지 못했다.” 

 

4개월짜리 총리 생활을 마친 昌은 광화문 I빌딩에 변호사사무소를 개설했다. 그러나 법률사무소라기보다는 ‘캠프’였다. 

1995년 6월 실시된 제1회 지방선거에서 YS의 민자당은 참패했다. 광역단체장 15개 중 5개, 230개 기초단체장 중 69개를 건진 졸전이었다. DJ 후원을 받는 이기택 총재의 민주당은 서울과 호남을 석권했고, YS에 이를 갈며 민자당을 뛰쳐나간 김종필(JP) 자민련 총재는 대전, 충남·북, 강원을 휩쓸었다. 민주계 중심의 국정운영 대가는 혹독했다. 여기에 지방선거 이틀 뒤 발생한 삼풍백화점 붕괴로 502명이 사망하는 등 대형 사건·사고가 잇달아 터지면서 대통령 지지율은 20%대로 추락했다. 취임 초 90%를 감안하면 급전직하(急轉直下)라는 말 그대로였다. 민심이반을 확인한 DJ는 민주당 내 자파 세력을 규합,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했다. YS가 가장 ‘싫어하고 우려했던’ DJ의 화려한 부활이었다. 

 

1992년 대선 다음 날 “조용한 시민생활로 돌아가겠다”며 정계은퇴를 선언한 뒤 영국으로 ‘피신’했다가 1년7개월 만에 귀국, 기회를 엿보던 DJ의 정계복귀 발판을 YS가 깔아준 셈이다. 게다가 ‘역사바로세우기’ 일환으로 강행한 노태우·전두환 두 전직 대통령의 구속·수감은 정국 반전은커녕 TK(대구·경북)의 집단 반발만 키워 YS를 코너로 몰아세웠다. 사태가 이쯤에 이르자 1995년 12월6일 YS는 민자당을 신한국당으로 개명했다. 집권당의 간판 바꿔 달기는 총선거를 5개월여 앞둔 상황에서 YS가 선택한 궁여지책이었다. 그 ‘혁명적’ 조치 열흘 뒤, ‘차기 대통령 후보감’으로 내세웠던 이홍구 총리를 이수성 서울대 총장으로 교체하는 등 개각도 단행했다. 이런 정국상황 속에서 이뤄진 게 ‘이회창 신한국당 대표’다. 15대 총선이 실시되던 해(1996년) 1월 YS는 괘씸해 못 견뎌 하던 昌을 신한국당에 영입했다. 두 사람 관계를 고려하면 이도 ‘혁명적’ 선택이다. 내키지 않는 감사원장·국무총리 임명과 해임, 그리고 당 대표 기용. 이건 ‘YS의 역설(逆說)’이라는 표현 이외는 어떤 것으로도 설명이 안 된다. 

 

 

총선 나흘 전 지방 순회 중인 이회창 선대위원장. ‘대쪽 판사’ 이미지 대신 정치 현장에 익숙한 프로 정치인 모습이다.

 



급한 ‘총선 불’은 껐지만 악연은 악연 

 

“YS가 昌과 화해했다지만 말이 화해일 따름이다. 식사 한 번 같이했다고 ‘고집 10단’들 가슴의 응어리가 해소될 리 없었다. 하지만 YS는 정치 고수다. ‘YS에 맞선 소신파’ 이미지의 昌을 끌어들임으로써 당 전체 이미지를 살리는 묘수를 동원한 것이다. 선거대책위원장으로서 昌은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昌뿐이 아니다. 박찬종(1995년 서울시장 선거에 무소속으로 나섰다가 DJP연대가 밀은 조순 후보에게 패배)과 진보진영(민중당)의 이재오·김문수·이우재도 끌어 들였다. 홍준표 현 경남지사와 정의화 전 국회의장도 이때 가세했다. 이원종 정무수석이 이끄는 청와대 팀은 이 ‘새 피 수혈’ 작업을  과감·신속하게 처리했다. 사실 昌의 ‘재영입’에는 반대의 목소리가 작지 않았으나 YS는 단호했다. 이념과 정파를 뛰어넘어 당 면모를 일신한다는 대의명분은 그런대로 먹혀들었다. 138석 전적은 여당의 흐트러진 당시 모습을 감안하면 대단한 성과다. 과반 미달이라고 평가절하하나 그럴 것만은 아니다. 여당이 서울에서 제1당이 된 것은 정당 역사상 최초다.” 당시 청와대와 민주계 인사들의 증언은 한결같다. 20%대 지지율을 2배 이상(한국갤럽)으로 끌어올린 게 YS가 던진 승부수 결과라는 주장이다.

 

“선거대책위원장으로서 처음 이틀간 지방을 순회하고 돌아온 昌에게 물었다. ‘수고하셨습니다. 어떻던가요’라고. ‘힘들었다. 정치라는 게 이런 것인지 몰랐다’는 말을 예상했는데 딴판이었다. ‘재미있었습니다. 할 만하더군요’가 그의 답변이었다.” 박관용 전 국회의장은 昌에게 정치적 ‘소질’을 발견한 것은 의외였다고 술회한다. 사실 ‘대쪽 판사’라는 이미지에 집착해서 그렇지 그의 권력의지는 상상 이상이었다는 게 昌과 호흡을 맞췄던 이들의 얘기다. 昌은 당 대표직을 수락하자마자 중앙언론사 편집국장 출신 K씨를 비서실장으로 기용하는 등 즉각 진용을 꾸렸는데 당시 참모들은 昌의 정치학습 능력이 엄청났다고 말한다.  

YS는 昌 카드로 우선 급한 불을 껐다. 그러나 악연은 악연이었다. 호랑이를 집 안에 불러들인 격임은 분명했다.  

 

 

후계자…역대에 걸친 부질없는 시도, 그 허망한 결말

 

국부(國父)로 불리던 이승만 초대 대통령은 절대적 존재였다. ‘사사오입(四捨五入)개헌’이란 부끄러운 역사가 말해주듯 우격다짐으로 종신(終身) 대통령까지 가능케 한 카리스마 화신(化身)이었다. 무시무시한 권위에다가 70세에 첫 임기를 시작, 나이만으로도 모두를 압도하는 노(老)대통령에 대한 도전은 상상조차 어려웠다. 80세를 훌쩍 넘었기에 후계자라는 단어가 자연스러울 법했지만 되레 금기시됐다. 한민당 계열 일각을 제외한 나머지는 오로지 충성경쟁이었다. 집권 자유당이 원내 자유당과 원외 자유당으로 나뉘어 완전 별도 살림을 차린 것은 분할 통치에 도통한 대통령의 현란한 용병술에다 충성경쟁이 어우러진 결과다. 

 

대통령 후보는 내지 않고 부통령 후보만 내는 게 대부분 정당들의 기본이었다. 대통령과 별도의 선거로 뽑는 부통령 선거(총리는 대통령이 임명)에 다른 정파 후보가 당선됐지만 거기까지였다. 오로지 자유당 2인자인 이기붕이 미워 출마한 이들도 적잖았다. 초대 국무총리를 지낸 철기(鐵驥) 이범석, 이 대통령이 4차례나 총리에 지명했으나 국회 인준이 거부돼 서리(署理)만 네 번 했던 이윤영, 이 대통령 비서실장과 초대 내무장관을 지낸 윤치영 등이 그들이다. 목사 출신인 이윤영은 “질지라도 잠방이나 찢으러 씨름판에 나가는 거지. 이기붕이 떨어뜨리기 위해서다”의 주인공이다. 이 대통령에게 큰아들을 양자(養子) 보내며 신임을 얻은 이기붕은 1960년 3·15선거 때 이 대통령의 러닝메이트로 부통령에 당선돼 후계자로 우뚝 서는가 했으나 물불 안 가린 부정선거로 4·19혁명만 촉발시켰다.

 

18년 장기 집권한 박정희 대통령 치하에도 ‘일시적’ 2인자만 있었을 뿐이다. 부하를 다루는 용인술의 귀재 박 대통령 ‘슬하(膝下)’에선 도토리 키 재기 식 충성다툼이 전부였다. JP(김종필) 정도가 집권 초중반 잠시 후계자로 운위됐을 뿐이다. 박 대통령은 후계자를 세울 겨를도 없이 차지철 경호실장과 2인자 경쟁을 벌이던 김재규 정보부장에게 피살됐다.   

 

전두환 정권 시절엔 장세동 안기부장, 노신영 총리 등이 입에 오르내렸으나 ‘설(說)’로 그쳤다. ‘후계’ 단어도 꺼내기 어려울 만큼 서슬이 퍼기 때문인데 임기 말인 1987년 직선제 개헌 요구가 빗발치면서 ‘몸을 낮추고 기다리던’ 노태우 민정당 대표가 점지됐다. JP는 1980년 ‘노태우 보안사령관’에게 2인자 금도(襟度)를 훈수했다고 밝힌 바 있다. 군 선후배들의 조언에 더해 동향(同鄕·대구)에다 육사 동기인 ‘노태우’를 가장 ‘만만하게’ 여긴 전 대통령은 그를 낙점(落點)했다. 그는 대선 6개월 전 당 중앙위 운영위원회를 통해 노 대표를 대선후보로 지명한 뒤 세력이 노 후보에게 쏠리는 기색을 보이자 “퇴임하는 내년 2월25일 자정까지 대통령으로서 권한을 행사하겠다”는 으름장을 놓기도 했다. 하지만 자기가 ‘키우고 만든’ 후계자에 의해 백담사에 유폐(幽閉)되는 신세가 됐다.

 

노태우 대통령의 자타 공인 후계자는 황태자 박철언 의원. 박 의원은 그러나 3당 합당으로 한배(민자당)를 탄 민주계 ‘김영삼(YS) 대표’에게 당하고 만다. ‘후보 조기 가시화’ 요구 등 YS의 억척과 고집에 질린 노 대통령은 박태준·박준규·이종찬 등 민정계 중진들의 대선후보 경선 참여를 간접 지원하면서 YS를 견제했으나 무위에 그쳤다. YS 대안 모색이 허사가 되고 임기 중반 총선 대패로 위기에 처하자 YS 대세론을 수용했다. 밉건 곱건 YS를 여당 대선후보가 되게 하고 선거자금을 대줘 당선시켰던 노 대통령은 그러나 당에서 축출당했고 YS의 대통령 재임 중엔 감옥까지 가야 했다.

 

이렇듯 후계자를 만드는 게 뜻대로 되지도 않고, 뜻대로 돼봤자 후사(後事) 안녕은커녕 뒤통수나 얻어맞기 십상임에도 ‘현재 권력’은 권력 재창출 명분 아래 입맛에 맞는 후계자 고르기에 골몰했다. YS도 예외가 아니었다. 아니 모든 게 YS 기대와는 정반대로 흘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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