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로 보다...5·18 공수부대 투입 ‘묵인’한 미국
  • 박준용 기자 (juneyong@sisapress.com)
  • 승인 2016.05.17 20:21
  • 호수 13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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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보는 5·18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美 기밀문서

 

5·18 당시 광주 시민은 미국에 잠시 환호했다. 1980년 5월 말께 미군이 필리핀에 있던 항공모함 코럴시호와 일본에 있던 미드웨이호를 각각 진해와 부산에 전진배치했기 때문이다. 당시 광주 시민은 신군부의 반인권적 시위 진압 상황을 개선하는 데 미군이 역할을 해줄 것이라 믿었다. 

 

하지만 당시 미국의 입장은 그 기대와 전혀 달랐다. 미국의 항공모함 파견은 ‘북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한 목적에 그쳤다. 뿐만 아니라 미국은 계엄군이 광주에서 자행한 폭력에 ‘동조’ 또는 ‘묵인’하는 태도를 보였다. 이는 1996년 미국의 팀 샤록 ‘저널 오브 커머스’ 기자가 12·12 사태, 광주 민주화 운동과 관련한 미국 정부의 극비 문서 2000여건을 공개하면서 밝혀졌다.

 

팀 샤록이 공개한 자료에는 광주항쟁에 대한 미국의 주장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미국은 광주항쟁 이후 극비문서가 공개되기 전 까지 일관되게 “한국의 특전사 부대가 광주에 배치된 것을 사전에 몰랐으며, 그들이 광주에서 취한 행동에 대한 책임도 없었다”고 말해왔다. 

 

 

미국, 광주항쟁 진압 위한 군 이동 사실 미리 알고 있어

 

공개된 문서에 따르면 1980년 5월7일 당시 주한 미국 대사인 글라이스틴 대사는 워싱턴에 보낸 ‘한국정부, 특전사를 이동시키다’라는 전문에서 “한국 군부는 우발적 상황과 학생들의 시위 가능성에 대비해 2개 공수여단을 서울과 김포공항지역으로 이동시킨다는 사실을 주한미군 지휘관들에게 알려왔다”고 밝힌다. 또 “한국 군부로부터 병력이동 요청이 오면 주한미군사령부는 동의할 것이다”라면서 시위 진압을 위해 한국군이 부대를 이동하는 데 동의할 것이라는 의사를 표했다.

 

5월8일과 5월9일 전문에서도 유사한 내용이 나타난다. 5월8일 미국 국방정보국이 국방부·합참에 보낸 비밀전문은 “(한국)특전사부대가 비상대기중이며 서울 외곽에 남은 부대는 7공수여단 뿐으로, 이 부대는 전주와 광주지역 학생소요에 대비하는 것으로 보인다”라고 보고한다. 한국의 공수부대가 광주에 투입될 수 있다는 사실을 미국이 사전에 인지한 셈이다. 5월9일 글라이스틴 대사와 크리스토퍼 부장관 교신내용에서는 “법과 질서 유지를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할 경우 경찰에 군을 가세시킨다는 한국정부의 비상계획에 대해 미 정부가 반대한다는 의사를 전달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 같은 법적용이 자제 속에 신중하게 이뤄지지 않으면 그 위험이 급증할 것임을 귀하(글라이스틴)가 전(두환)과 최(규하)에게 알려야 할 것이다”라면서 한국군의 ‘무력사용’에 대해 미국이 조건부 승인하겠다는 의사를 밝힌다.  

 

미국의 미온적 태도는 5월18일이 다가오자 구체화된다. 5월 16일 한미연합사는 이희성 당시 육군참모총장이 ‘수도권 질서유지를 위하여’ 20사단 작전통제권 이양을 요청하자 승인한다. 5월 23일 한미연합사는 광주항쟁을 무력으로 진압하기 위해 33사단 1개 대대의 작전통제권을 해제해주기도 했다. 이 부대는 투입 대기만 하고 실제로 투입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 또한 미국이 광주항쟁을 진압하는 계엄군의 작전에 동의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또 5월22일 백악관 정책검토위원회 회의록에 따르면 헤럴드 브라운 국방장관 등 미국 각료들은 “자제를 촉구하나 질서회복을 위해 필요시 병력사용을 배제하지 않는다”는 의견 일치를 보기도 했다. 

 

김양래 5·18 기념재단 상임이사는 “광주 시민들은 당시 미국을 정의로운 나라, 상황 개선에 도움을 줄 나라로 인식했다. 하지만 이 인식과 정반대로 한국군의 작전권을 통제하던 미국은 수많은 시민이 희생된 5·18의 가담자이자 공모자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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