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메뚜기 가왕’들의 시대
  • 하재근 | 대중문화 평론가 (.)
  • 승인 2016.05.12 17:57
  • 호수 13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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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성기 맞은 음악 경연 프로그램의 빛과 그림자

지난 설 연휴 때 선보인 방송사들의 파일럿 프로그램은 시청자들을 놀라게 했다. 음악 경연 프로그램이 세 편이나 등장했기 때문이다. MBC의 <듀엣가요제>와 SBS의 <보컬전쟁-신의 목소리>(<신의 목소리>), <판타스틱 듀오> 등이었다. 더욱 놀랄 일은 그다음에 벌어졌다. 세 편의 음악 경연 프로그램이 모두 성공을 거둔 것이다. <신의 목소리>가 시청률 10.4%로 설  특집 중 전체 시청률 수위권에 올랐고, <듀엣가요제>는 9.8%로 설 당일 시청률 1위에 올랐다. 음악 경연 파일럿 3개 중 꼴찌를 한 <판타스틱 듀오>마저 8.4%로 동시간대 1위였다.

 

세 편 모두 성공했다 하더라도 포맷이 너무 겹치긴 했다. 사람들은 당연히 한두 편은 사라질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다시 또 놀랄 일이 벌어졌다. 세 편이 모두 다 정규 편성에 안착한 것이다. 그것도 방송사들의 전략 시간대였다.

 

MBC 의 음악대장 MBC 의 민경훈 ⓒ MBC·SBS·후난TV

 


정형화된 가창력이 가져온 겹치기 출연

 

가히 지금은 음악 예능, 음악 경연 프로그램의 전성기라는 걸 확인시켜주는 에피소드다. 시청자들의 호응이 이어지고, 이에 방송사들은 앞뒤 안 가리고 달려든다. 마치 오디션 전성기 시절 모든 방송사들이 일제히 오디션 제작에 달려들었던 모습을 다시 보는 듯하다.

 

이 창대한 현재를 연 출발점은 MBC의 <나는 가수다>였다. 임재범·이소라·윤도현·박정현·김범수 등으로 출발한 프로그램은 폭발적인 인기를 모았다. 방영 첫해인 2011년에 <나는 가수다> 관련 음원 수입만 500억원대로 추산될 정도였다. 프로그램의 인기가 과열되면서 김건모·옥주현·적우 등이 심각한 피해를 입기도 했다. <나는 가수다>에 어울리지 않는다며 대중이 집단 공격에 나섰기 때문이다. 그럴 정도로 사람들은 <나는 가수다>에 열광했다.

 

KBS는 이 신드롬에 <불후의 명곡>으로 가세했다. <나는 가수다>의 살벌했던 경쟁구도를 완화하고 예능성을 조금 더 살린 포맷으로 지금까지 순항 중이다. 그 후 케이블·종편에서 <히든싱어> <너의 목소리가 보여> 등 히트작을 냈다. 그러던 중 음악 경연 트렌드를 열었던 MBC가 2015년 4월에 <복면가왕>으로 다시 한 번 대박을 치며 이 트렌드를 광풍(狂風)으로 발전시켰다. JTBC의 <투유 프로젝트-슈가맨>(<슈가맨>)을 거쳐 <듀엣가요제> <신의 목소리> <판타스틱 듀오>가 동시 출격하는 데까지 도달했다. 여기에 <슈퍼스타K> 등 오디션 프로그램들까지 감안한다면, 지금 우린 가히 음악 경연의 홍수 속에서 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렇다 보니 당연히 겹치기 논란이 터졌다. <신의 목소리>에 출연하는 박정현·거미·윤도현·김조한 등은 모두 <나는 가수다> 고정출연진이었다. <복면가왕>에선 <나는 가수다>에 국카스텐으로 출연했던 하현우로 추정되는 인물이 현재 ‘음악대장’으로 장기집권 중이고, 그 전엔 역시 <나는 가수다> 출신의 김연우가 ‘화생방실 클레오파트라’로 가왕(歌王) 자리에 오르기도 했다. <듀엣가요제>의 솔지·민경훈·루나·강균성 등은 모두 <복면가왕>에 나왔었다. 거미는 <나는 가수다> <불후의 명곡> <복면가왕> <슈가맨> <신의 목소리>에 모두 등장해 경연을 펼쳤다. 심지어 <신의 목소리>와 <듀엣가요제>는 진행자가 가수 성시경으로 동일인이다.

 

음악 경연 프로그램의 인기는 음악의 몰락이 그 원인이었다. 2000년대는 아이돌 시대였고, 특히 비(非)아이돌 가수들의 설 자리가 완전히 사라졌다. 그에 대한 반발이 극심해진 시점에 절묘하게 찾아온 프로그램이 바로 <나는 가수다>였다. 이 프로그램은 ‘실업자’ 신세가 된 중견 가수들을 가왕으로 밀어 올렸다. 보는 음악의 시대에 나타난 가창력의 반란, 이 구도는 아직까지 유효하다.

 

경연 프로그램을 통한 가수들의 재발견도 이어졌다. 스타급 가수가 아니었고 <나는 가수다>에서도 ‘광탈’(광속 탈락)했던 김연우는 복면 착용이라는 극약처방을 하고서 마침내 가왕에 등극했다. 아이돌이긴 하지만 핫스타급은 아니었던 솔지나 루나도 경연을 통해 디바로 우뚝 섰다. 국카스텐 하현우는 경연 프로그램이 아니었다면 노래 잘하는 밴드 싱어에 그쳤을 것이다. 가수 은퇴 위기까지 몰렸던 황치열과 더원은 경연 프로그램을 통해 일약 한류스타로 거듭났다. 경연이 노래 잘하는 가수들에게 생명줄이 된 것이다.

 

SBS 의 박정현후난TV 의 황치열 ⓒ MBC·SBS·후난TV

 


음악 경연, 결국 음악을 위한 극약처방인 셈

 

한국 대중음악사의 명곡들을 재조명하는 역할도 맡고 있다. 예컨대 <복면가왕>의 ‘음악대장’을 통해 우린 신해철의 <라젠카 세이브 어스> <일상으로의 초대> 그리고 더크로스의 <돈크라이> 등을 재발견할 수 있었다. 특히 <불후의 명곡>과 <슈가맨>이 잊힌 명곡들을 꾸준히 발굴해주고 이 과정에서 편곡자의 위상이 과거 그 어느 때보다도 강화됐다.

 

하지만 너무 경연에 특화된 가수들만 조명 받는다는 건 문제다. ‘지르기’와 ‘현장 선동’에 능한 가수들이 훌륭한 뮤지션으로 각인돼서다. 그러다 보니 노래와 서커스의 경계가 희미해진다. 음악 스타일도 조용히 시작해 터뜨리면서 끝내는 것으로 정형화된다. 경쟁이라는 긴장구도 속에선 가수가 서로를 공격하는 검투사의 역할을 하게 된다. 이런 구도에 익숙해지면 음악을 감상하는 감수성이 왜곡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음악 경연 프로그램 광풍이 부는데도 정통 음악 프로그램은 여전히 찬밥 신세인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음악 경연 트렌드는 분명히 우려할 만하다. 음악 감수성은 경연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음반을 통해 그 음악세계에 온전히 젖어드는 경험을 통해 깊어진다. 그런 점에서 음악 경연 트렌드는 아이돌과는 또 다른 자극성으로 우리 대중음악을 오도할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대안이 없다는 것이다. 음악 경연을 없애면 대중이 음악 감상을 하게 될까. 오히려 중견가수들이 실업자 신세이던 시절만 다시 도래할지도 모른다. 그나마 음악 경연이라는 포맷이라도 있기에 가창력과 다양한 명곡들이 조명 받는 요즘이다. 대중이 귀를 열고 음악에 집중하는 것도 경연의 긴장 때문이다. 지금 시대에 음악 경연은 결국 필요악, 음악을 위한 극약처방인 셈이다. 현실적인 대안이 없기 때문에 한국의 가왕들은 당분간 경연 전문 가수로 프로그램들 사이를 오갈 전망이다. 바야흐로 메뚜기 국민가수의 시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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