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습기 단기간 집중적 사용한 사람 피해 커”
  • 박태균 | 고려대 생명과학대 연구교수 (sisa@sisapress.com)
  • 승인 2016.05.04 11:39
  • 호수 13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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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가 된 가습기 살균제, 한국 내에서만 판매
© 시사저널 이종현

비극적인 가습기 살균제 사건은 ‘한국에서 일어난 세계 최초의 바이오사이드 사건’이다. 바이오사이드란 생물학적 독극물을 말한다. 이 사건은 2011년 봄 국내의 한 대형병원에서 젊은 임산부들 사이에 원인 불명의 폐 손상 사망 사례가 속출하면서 외부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임산부·어린이 등을 포함한 142명이 폐 섬유화로 숨을 쉬지 못하는 고통에 시달리다가 숨졌다. 살아남은 사람은 폐 이식 수술 등을 통해 겨우 생명을 유지하고 있다.

2011년 4월25일 오전 10시 질병관리본부 역학조사과로 한 통의 전화가 걸려올 때만 해도 사건이 일파만파로 확대될 것으로 예상한 사람은 없었다. 신고전화의 발신자는 서울아산병원 감염관리실. “최근 두세 달 새 중환자실에 중증 호흡곤란 증세를 보이는 임산부 폐렴 환자가 잇따르고 있다. 이 중 한 명이 숨졌다”는 내용이었다. 사망자는 출산 직후의 젊은 여성이었다. 호흡곤란이 심해 산소호흡기를 장착했지만 증상이 호전되지 않고 보름 만에 숨졌다.

옥시, 황사 등 여러 원인 거론하며 본질 희석

보건 당국이 원인 불명의 ‘괴질’을 잡기 위해 파악에 나섰다. 그해 5월 질병관리본부·서울아산병원 의료진을 중심으로 합동 역학조사팀이 꾸려졌다. 역학조사팀은 파라쿼트 등 농약 중독이 원인일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봤다. 피해자의 대다수가 농약 사용과는 무관한 어린아이와 젊은 여성이었기때문이다. 바이러스·세균으로 인한 폐렴 등 병원체의 감염이 원인일 가능성도 희박하다고 예상했다. 특정 지역의 환경오염 탓으로 보기도 힘들었다. 피해자의 분포가 일정지역에 머물지 않고 전국적이어서다.

옥시 측은 최근까지 “폐 손상의 원인이 봄철 황사일 수 있다”고 주장했다. 새로운 내용은 아니다. 2012년에 피해자가 민사소송을 제기했을 때 옥시 측의 법적 대리인인 ‘김앤장’이 서면으로 밝힌 내용을 되풀이한 것이다. 폐 손상을 일으키는 요인이 오만가지인 것은 맞다. 황사도 포함된다. 가습기 소독제 피해자가 봄 황사 철에 많이 나온 것은 사실이지만, 피해자가 전국적으로 연중 발생했다는 점에서 옥시 측의 주장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황사가 기관지염 등 기존 호흡기 질환자의 증상을 악화시킬 순 있지만 폐 섬유화까지 일으킨 사례도 아직 없다. 옥시 측은 황사 외에도 폐 질환을 일으키는 원인을 여럿 언급했다. “레지오넬라균이 원인일 수 있다”며 감염성 질환 카드를 꺼낸 적도 있다. 가습기 살균제에 대한 집중 공격을 희석시키기 위해 의도적으로 ‘전선’을 확대시켰다는 비판이 적지 않다.

역학조사팀은 폐 질환의 원인이 실내에 있을 것으로 예측했다. 피해자의 주류인 임산부·아이가 대부분 집에서 생활한다는 것이 그렇게 본 근거였다. 피해자의 방 안을 살피던 역학조사팀의 눈에 가습기가 들어왔다. 한 달쯤 후 역학조사 결과가 발표됐다. 사건의 ‘주범’은 가습기가 아니라 가습기 살균제라고 콕 집어서 지목했다. 가습기 살균제를 사용하면 원인 불명의 폐 질환에 걸릴 위험이 가습기 살균제 없이 생활하는 사람의 47.3배에 달한다는 조사 결과를 증거로 제시했다. 가습기 살균제와 폐 질환 사이에 분명한 인과(因果) 관계가 있다고 판정한 것이다.

2013년 7월 국회에서 열린 가습기 살균제 피해 구제 관련법 공청회에 피해 어린이가 의료기를 부착한 채 참석했다. © 연합뉴스

가습기 살균제가 폐 질환의 원인이라고 밝힌 역학조사팀은 2011년 발표 당시 칭찬보다 공격을 더 많이 받았다. ‘성급했다’ ‘근거가 부족하다’ 등 비판이 쏟아졌다. 실험동물을 이용한 독성 연구를 생략한 채 역학조사 결과만으로 ‘최종 판정’을 내린 것도 도마에 올랐다. 가습기에서 나오는 수증기의 입자 크기가 커서 가습기 살균제 유해 성분이 모세 기관지를 지나 폐포(肺胞)까지 침투할 수 없다는 반론도 나왔다. 그러나 나중에 실제 방 크기의 공간에서 실험을 해보니 가습기 살균제 성분은 극미한 에어로졸 형태로 공기 중을 떠다녔다. 폐포말단까지 들어갈 수 있는 크기였다.

가습기 살균제가 시판된 것은 1994년부터다. 그 후 우리 국민 800만여 명이 사용했다. 2011년에 와서야 환자가 발생한 이유, 또 이 중 500여 명에게만 증상이 나타난 이유, 그리고 한국 말고 다른 나라에선 피해가 없었던 이유 등 여러 의문이 제기됐다. 그러나 가습기 살균제로 인한 피해는 2011년 이전에도 발생했을 것이지만 아무도 모르고 지나쳤을 뿐이란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실제 2001년과 2006년에도 비슷한 사례가 있었고, 2001년 이전엔 전자의무기록이 없어 피해 사실 자체가 묻히고 말았다는 것이다.

2011년에 피해가 외부에 알려진 것은 그 해 겨울 날씨가 유독 추워서 실내에서 가습기 사용이 증가한 데다, 2009년 신종플루의 여파로 대중의 위생 의식이 높아져 가습기 살균제의 사용량이 늘어났기 때문으로 추정했다. 가습기 살균제 이용자 중 500여 명에게만 피해가 확인된 것은 개인의 유전자나 알레르기 등과 연관된 것으로 추정된다. 가습기 살균제 피해 사고가 유독 한국에서만 발생한 것은 전 세계에서 우리나라만큼 가습기를 열성적으로 사용하는 나라가 없고, 특히 문제가 된 가습기 살균제가 한국 내에서만 판매됐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가습기 살균제로 인한 사망자 4명 중 1명이 4세 이하의 영·유아였다. 남아의 치사율은 42%, 여아는 70%에 달했다. 어린이·임산부에 피해가 집중된 것은 임산부가 아기와 같은 방에서 함께 자는 경우가 많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다른 방에서 잔 아빠에겐 피해가 거의 없었다. 백도명 서울대 보건대학원 교수는 “피해자 중엔 한 주에 7일 모두 가습기를 사용하거나 하루에 11시간 이상 쓴 사람이 많았다”며 “가습기를 장기간 사용한 사람보다는 단기간이라도 집중적으로 쓴 사람에서 피해가 컸다”고 말했다. 가습기 살균제의 첫 노출이 4세 이전이거나 가습기 살균제의 공기 중 농도가 1㎥당 800㎍ 이상일 때 사망에 이른 경우가 많았다. 살균 성분으로 PHMG(폴리헥사메틸렌구아디닌)를 사용한 제품 때문에 피해를 입은 사람이 80%이상이었다. PHMG는 최다 사망자를 낸 옥시의 가습기 살균제 성분이다. 세퓨(덴마크 기업 제품)와 아토오가닉의 제품에 사용된 PGH(염화에톡시에틸구아디닌)에 의한 피해 사례는 42건, 사망자는 14명(정부의 1∼2차 조사 결과)으로 조사됐다. PHMG·PGH는 살균제·부패방지제로 사용하는 화학물질이다. 살균력이 뛰어난 데다 물에 잘 녹아 가습기 살균제의 재료로 널리 사용됐다. 피부독성·경구독성은 다른 살균제보다 상대적으로 낮지만, 스프레이 형태로 뿌리면 폐에 흡입돼 폐 손상을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이 화를 불렀다.

가습기 살균제를 처음 제조한 SK케미칼(1994년 당시 유공)의 ‘가습기메이트’란 제품은 2001년부터 애경이 판매해왔다. 가습기메이트는 가습기 살균제 중 두 번째로 많이 팔린 제품이다. 주원료는 CMIT/MIT(클로로메틸이소치아졸리논/메칠소치라졸리논)이다. 정부의 1∼2차 조사에서 접수된 피해 의심사례 중 CMIT/MIT를 원료로 하는 제품을 사용한 후 피해를 본 사람은 178명, 사망자는 39명이다. 이사건은 현재진행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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