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을 만하면 터지는 ‘황산 테러’어떻게 막나
  • 노진섭 기자 (no@sisapress.com)
  • 승인 2016.04.14 18:41
  • 호수 13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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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들 “사회병리·정신의학적 접근으로 풀어야”…국내 화상 전문 병원, 전국 4곳뿐

4월4일 오전 서울 관악경찰서에서 한 30대 여성이 경찰관 4명에게 황산을 뿌린 사건이 발생했다. 이마·뺨·손 등에 2도 화상을 입은 경찰관 중 2명은 병원 치료 후 퇴원했고, 다른 1명은 얼굴·목·가슴 등에 3도 화상을 입고 입원 치료 중이다. 이들을 치료한 한강성심병원(화상 전문 의료기관) 관계자는 “화학물질에 의한 화상은 2주일 정도 지켜봐야 하는데 그 후에도 상처가 심하면 피부 이식 수술을 고려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화학약품을 범죄에 악용하는 이른바 ‘황산(염산) 테러’가 끊이지 않고 있다. 1999년 대구의 한 골목에서 괴한이 뿌린 황산을 뒤집어쓴 당시 여섯 살이던 김태완군은 3도 화상을 입고 치료를 받던 중 결국 숨졌다. 지난해에만 8월 충남 보령, 9월 경기 광주, 12월 서울 용산에서 황산과 염산을 뿌린 사건이 줄줄이 이어졌다. 헤어진 여자친구에게 염산을 뿌리고, 한의사에게 불만을 품어 염산을 투척하고, 검찰청 형사조정실에서 한 교수가 황산을 뿌리는 등 화학약품을 범죄에 사용하는 의도와 장소, 신분도 다양해지고 있다.

4월8일 화공약품 판매처가 밀집된 서울 중구 한 시장의 모습과 미국에서 부식성 화학약품에 사용하는 경고 그림(아래 삼각형). ⓒ 시사저널 고성준

황산과 염산은 pH(수소이온) 농도 1에 해당하는데, 위에서 분비되는 위산과 같은 강산(强酸)이다. 물이 7로 중성인데, 이 물을 기준으로 7보다 숫자가 낮으면 산성이 강하고, 높으면 알칼리성이 강한 것이다. 식초가 5로 약산성에 해당한다. 황산과 염산은 국내외 산업 현장에서 흔히 사용하는 화학약품이다. 이덕환 서강대 화학과 교수는 “특히 황산은 세계적으로 가장 많이 사용하는 화학물질”이라며 “건설 현장 등에서 대규모의 청소나 세척 작업에 염산과 황산을 사용한다”고 말했다.


온라인 오픈마켓·약국에서 염산 구입 가능

황산과 염산은 수영장·화장실·욕실·귀금속·철강 등을 세척할 목적으로 우리 주변에서 많이 이용하는 물질이다. 서울 강동구의 한 세차장 업주는 “대다수 세차장에서 차량에 묻은 시멘트 물을 지울 때 염산이나 빙초산(pH 2의 강산)을 희석해 사용한다”고 말했다. 김 양식장에서 불법으로 활용하는 사례도 있다. 지난해 9월부터 전북 군산에서 공업용 염산 2000리터 이상을 김 양식장에 살포한 한 업자가 3월 해경에 적발되기도 했다. 염산을 사용하면 김발에 잡티가 제거되고 김에 윤기가 흘러 상급품으로 속여 팔아 수익을 낼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기자는 4월5일 화공약품점이 몰려 있는 서울 중구 일대를 돌아봤다. 이번 ‘경찰서 황산 테러’ 사건 때문인지 대다수 상점에서는 염산을 구하는 기자에게 주민등록증 제시를 요구했다. 화학물질관리법에 따르면, 황산과 염산은 유해화학물질로 분류되므로 이를 판매하는 자는 유해화학물질 영업 허가를 받아야 한다. 또 구매자의 주민등록증 확인 등 인적 사항을 기록하고 보관해야 한다. 만일의 사고에 대비하기 위한 방침이다. 한 화공약품점 업자는 “(염산 농도) 35% 이상은 실험용이어서 판매 기록을 남겨야 한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유통 방법에 대한 제재는 없어서 약국이나 온라인 오픈마켓을 통해 일반인이 염산을 구할 수 있다. 일반인이 염산을 사려는 이유는 화장실이나 타일 청소용이다. 염산과 황산은 단백질을 녹이므로 하수구나 변기 막힌 곳을 뚫거나 욕실 타일 청소에 용이하다. 마트에서 파는 하수구·변기 세척용 상품이 있지만 가격 면에서 염산이 싸다. 한 약사는 “9%로 희석된 염산을 약국에서 살 수 있다”며 “과거에는 구입하는 사람의 인적 사항을 기록하는 독극물 대장이 있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아 누구나 쉽게 염산을 구할 수 있다. 대신 약사가 구매자에게 주의사항을 알려 준다”고 말했다.

환경부는 지난해 11월 대형 온라인 오픈마켓과 ‘유해화학물질의 온라인 불법 유통 근절을 위한 자율관리 협약’을 체결한 바 있다. 희석된 화학약품이라도 피부나 의류에 손상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별 효과가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번 ‘경찰서 황산 테러’ 용의자가 지난해 말 황산을 인터넷에서 구입한 것으로 밝혀졌기 때문이다. 피부 화상은 보통 1도에서 4도까지 단계로 증상 정도를 나타내는데, 화학약품은 2~3도의 심각한 화상을 일으킨다. 현재 입원 치료를 받고 있는 경찰관처럼 피부 이식수술을 고려해야 할 정도다. 황산과 염산이 눈에 들어가면 실명한다. 냄새를 흡입하는 자체로도 장기 손상, 호흡곤란 등을 일으킬 수 있다. 인터넷에는 35% 농도의 염산을 만드는 방법도 나와 있다. 일반인들 사이에서 화학약품에 대한 철저 관리와 규제가 필요하다는 주문이 나오고 있는 배경이다.

그러나 전문가들의 시각은 다르다. 화학약품에 의한 범죄는 화학약품 자체만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병리적 현상에 초점을 맞춰 풀어야 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이번 경찰서 황산 테러의 용의자는 프로파일러(범죄심리분석관)의 심문 결과, 피해망상 증세를 보이는 것으로 전해졌다. 2012년 한의원에서 불안감과 우울증 초기 증세로 한약 처방을 받은 사실도 확인됐다. 지난해 12월 피해망상 때문에 누가 습격할 것 같다고 해서 가스총·황산 등을 구입하기도 했다. 이덕환 교수는 “범죄 수로만 따지면 칼에 의한 것이 훨씬 많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칼 판매를 규제하지는 않는다. 화학약품 판매를 규제하려면 많은 수의 공무원과 막대한 사회적 비용이 드는데, 우리 사회가 감당하기 어렵다”며 “규제만이 능사가 아니라, 이런 화학약품 범죄는 사회병리적 차원에서 원인과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 국민이 경제적·사회적으로 불안하지만 이를 해소할 곳이 없는 게 문제”라고 설명했다.

4월4일 서울 관악경찰서에서 관계자들이 황산 테러 현장을 수습하고 있다. 이날 오전 8시45분쯤 관악경찰서 3층 사이버수사팀 복도에서 전 아무개씨가 해당 팀 박 아무개 경사에게 염산으로 추정되는 액체를 뿌렸다. ⓒ연합뉴스


해외의 ‘독극물통제센터’, 국내엔 전무

취업 포털 커리어가 지난해 직장인 448명에게 ‘직장에서 화병(火病)을 앓은 적이 있는가’를 물었더니 90%가 ‘있다’고 답했다. 이 수치가 2008년에는 83%였다. 화병은 1995년 미국정신의학회에 한국인 특유의 문화 증후군으로 등록된 바 있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화병은 어느 순간 예고 없이 터져 나온다. ‘욱하는 사회’라는 것이다. 허준 한강성심병원 화상외과 교수는 “정신의학적인 측면에서 이런 사태를 바라봐야 근본적인 예방이나 조치가 가능하다”고 강조했다.

사실 어린아이나 소방관을 포함한 일반인이 화상을 입었을 때 찾아갈 화상 전문 병원이 마땅치 않은 실태도 이번 기회에 짚어봐야 한다. 전국에 화상 전문 병원은 4곳(서울 2곳, 지방 2곳)뿐이고, 화상을 치료할 전문의도 30명에 불과하다. 허준 교수는 “사실 대다수 의사는 의대에서 화상 관련 교육을 2시간 받을 뿐이어서 화상 치료에 서툴다”며 “화상 전문 병원은 적어도 각 도에 한 곳은 있어야 하지만, 정부의 규제가 심해서 화상 센터를 운영하던 병원마저 센터를 폐쇄하는 현실”이라고 지적했다.

지난 1월 경기도 부천에 있는 한 휴대전화 부품업체의 근로자 4명이 메틸알코올을 흡입해 실명 위기를 맞은 사고가 발생했다. 고용노동부에 따르면, 이들은 알루미늄 절삭 과정에서 고농도의 메틸알코올 증기를 흡입했고, 혼수상태에 빠졌다. 보호 장비 미착용 등 안전불감증이 불러온 참사였다. 이처럼 우리 주변에는 화학약품에 의한 범죄와 안전사고가 흔히 발생하지만 이와 관련된 예방과 조치를 전담하는 기관이 없다.

미국·일본 등 외국에는 ‘독극물통제센터(PCC)’가 있어서 화학약품을 포함해 건강에 유해한 모든 물질의 예방·교육·감시 역할을 한다. 불이 났을 때 119를 찾는 것처럼 독극물에 의한 사고가 생기면 외국인들은 PCC에 신고하고, 즉각적인 조치를 받는다. 실제로 미국에서 에탄올 60% 이상이 들어 있는 손 세정제를 마셔 병원 응급실로 실려 가는 10대들이 늘어나는 등의 관련 사건을 PCC가 계속 모니터링해오다, 2014년 한 해에만 1만6000건의 사고가 발생했음을 발표했고, 이에 대한 정부 차원의 대안을 마련하기도 했다. 임종한 인하대병원 직업환경의학과 교수는 “PCC는 후진국에도 인구 200만명당 1개씩 설치돼 있어 해당 지역의 독극물 사고를 예방하고 처리한다”면서 “그러나 국내에는 독극물 모니터링 기구가 한 곳도 없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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