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쭙잖은 고백, 법정 스님 함자 헐까 걱정”
  • 조철│문화 칼럼니스트 (sisa@sisapress.com)
  • 승인 2016.03.24 21:32
  • 호수 13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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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적 6주기 맞아 <법정 스님이 두고 간 이야기> 풀어낸 고현 조선대 교수

“말빚을 남기고 싶지 않으니 모든 책은 더 이상 출간치 말라.” 2010년 3월11일, 법정 스님은 가까이 있었던 제자들에게 몇 가지 유훈을 남겼는데, 그 끝자락에 위와 같은 말을 남겼다.

 

“그래서 당신의 모든 책은 출판이 금지되어버렸다. 그리고 벌써 6년…. 지금도 몇 십 년씩 지근거리에서 스님께 배웠던 참 제자들 대다수는, 경솔한 처신으로 혹여 스승의 함자를 헐까 두려워 말없이 살아들 가고 있다. 나 또한 그렇게 살았고. 이러저러한 법우들의 염려를 잘 알면서도 결국 기억과 추억이 점점 흐려져간다는 두려움 때문인지, 기어이 어쭙잖은 글을 써서 경량의 허물을 노출하고 말았다.”

 

고현 조선대 교수가 30여 년 동안 법정 스님 곁에서 보고 배운 것들을 풀어냈다. 법정 스님이 몸소 실천해온 무소유와 나눔의 철학, 그리고 감추어진 인간적 모습을 엿볼 수 있는 따뜻하고 생생한 일화들이다. 현대 불교미술 디자인의 개척자로 평가받는 고 교수는 1981년 봄 법정 스님과 맺은 인연을 시작으로 ‘맑고 향기롭게’ 연꽃 캐릭터를 도안했으며, 현재 ‘맑고 향기롭게’ 광주 모임 회장을 맡아 이끌고 있다. “턱밑 배움 경험자로서 기억나는 데까지 사실과 진실을 전해주고 싶었다”는 고 교수는 법정 스님의 나무의자, 산새들의 목을 축여주는 돌물확, 대나무 숲길, 스님의 뒷모습 등 수년에 걸쳐 불일암을 찾을 때마다 화폭에 옮긴 그림들을 함께 담아냈다.

 

ⓒ 수오서재 제공

“아침인데도 이마에 땀이 배고 등줄이 후줄근한 것이 올여름도 야무지게 시작될 모양이다. 몇 걸음 되지 않는 죽림을 지나 돌계단 위에 올라서니 마당 한켠에 아뿔싸, 스님께서 이상한 자세를 하고 계셨다. 가랑이 사이로 머리를 넣은 채 나를 거꾸로 보고 계시다가 순간 자세를 풀고 반가워하셨다. ‘아, 세상을 거꾸로 보고 있는 중이었소. 마침 다로에 물을 올려놨는데 잘 오셨소.’ ‘스님, 어린 시절에나 하던 그런 놀이를 지금도 즐기시나요?’ ‘왜 그러면 안 됩니까? 모양새는 좀 꼴사납지만 어린 시절 느낌과는 전혀 달라요. 지나치게 자기중심적으로 편중되어 있는 고정관념을 치유하는 데 이보다 더 좋은 스승은 없어요.’ ‘네에? 거꾸로 보기를 통해 고정관념을 치유한다고요?’ ‘보는 각도를 달리함으로써 대상에 대한 새로운 면을 인식할 수 있어요. 우리들 인식 속에 들어와 이미 굳어져버린 선입견을 벗어나야 하는데, 내 눈이 열리면 열린 눈으로 보는 세상도 달라 보이지요. 고정관념 지우는 데 이보다 더 좋은 의사는 없어요.’”

 

법정 스님과 ‘맑고 향기롭게’ 모임 만들어


고현 교수는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불교와 인연이 되어 우천(又泉)이란 수계명으로 지난 50여 년 동안 불자의 삶을 살아왔다. ‘불교미술의 현대화, 불교 디자인의 개척화’라는 화두를 안고 대한민국 산업디자인전 초대작가와 심사위원 등으로 활동하면서 일러스트·단청·탱화·디자인 등 국내외에 발표한 200여 회의 작품이 모두 불교를 소재로 한 작품들이었다. 그 인연으로 조선대학교 미술대학 학장과 디자인대학원 원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법정 스님이 ‘맑고 향기롭게’라는 모임을 만들 때도 그 곁에 있었다.

 

“법정 스님이 물었다. ‘내가 예전에 모임 하나 만들고 싶다는 말 기억하시지요? 명칭을 ‘맑고 향기롭게’로 바꿨습니다. ‘나누는 기쁨’도 오래도록 생각해왔는데 의미 전달을 보다 확실하게 하고 싶다 보니 바꾸게 되었는데, 왜 느낌이 별로인가요?’ ‘아닙니다, 스님. 다만 표어나 슬로건에 주어가 빠지면 호소력이 떨어지지 않을까 해서….’ ‘바로 그거예요. 생략된 주어 대신 어떤 주어를 앞에 붙여도 뜻이 통하도록 하는 거예요. 예를 들어 우리들의 ‘정신을’ 맑고 향기롭게, 이 ‘세상을’ 맑고 향기롭게, 우리들의 ‘환경을’ 맑고 향기롭게. 어떤 주어를 앞에 붙여도 뜻이 통하는, 그래서 오히려 구체적으로 담아낼 수 있지 않겠어요? 거기다 진흙탕 속에서도 맑고 향기로운 꽃을 피워내는 연꽃의 생리와 아름다움을 접목시켜, ‘맑고’는 내 자신의 마음을 먼저 맑히고 ‘향기롭게’는 바깥세상을 향한 자비행의 실천으로.’ 법정 스님이 ‘맑고 향기롭게’를 만든 이유가 그랬다.”

 

일기처럼 메모해놓은 스님과의 이야기를 풀다 보니 책 한 권이 됐다는 고현 교수는 <법정 스님이 두고 간 이야기> 속에서 스님과의 만남에서부터 입적할 때까지 아주 작은 에피소드조차 놓치지 않고 기록했다. 번잡한 장소에서 막무가내로 “한 말씀 부탁한다”는 한 여인에게 정말로 ‘한 말씀’이라는 글자만 적어준 스님의 모습이라든가, ‘맑고 향기롭게’ 회의가 끝나고 각자의 차에 타며 차가 없는 이들을 동승시키기 위해 “서대문!” “신촌!” “충무로!” 등을 외칠 때 “영동고속, 강원도!” “강원도 무료야! 없어?” 하는 농담을 날리는 스님의 여유로운 모습은 일반인들은 알기 어려운 내용이다.

 

고현 교수는 책을 출간하기에 앞서 “어쭙잖은 고백이 무소유와 나눔의 삶을 사셨던 스님의 함자를 헐까 걱정”이라며 원고를 퇴고하고도 1년을 망설였다. 하지만 스님의 저서가 절판되고 스승의 존재감과 가르침이 희미해질까 하는 걱정스러움이, 스님의 인간적이고 따뜻한 모습을 다른 이들과 나누고 싶은 마음이, 마지막으로 스님의 격려를 받으며 ‘불교미술 현대화, 불교 디자인 개척화’를 화두 삼아 한평생 살아온 자신의 인생을 자기점검해보고 싶은 마음이 책을 출간하도록 독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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