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관용 회고록] 盧·YS·DJ 여야 최고 수뇌부 합작품이 된 수서 비리
  • 박관용│前 국회의장 (정리=김현일 대기자)
  • 승인 2016.03.17 19:12
  • 호수 13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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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S와 정태수 ‘특수 관계’가 한보금융 특혜 씨앗 돼

박관용 YS 초대 비서실장은 정치자금에 대해선 “시대가 그랬다”며 말을 아낀다. 비단 박 실장뿐 아니라 여야를 막론한 상당수 정·재계 지도급 인사들의 한결같은 생각이다. 여기엔 필요악을 넘어 ‘필수악(必須惡)’이었다는 인식과 함께 여기서 누구도 자유롭지 않았다는 현실이 작용한다. 나아가 불법임이 엄연한데 공연히 평지풍파를 일으킬 이유가 없지 않으냐는 생각이 자리하는 것이다. 하지만 역사의 정리라는 측면에서 이는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다. 

 

1992년 2월 불거진 수서 비리 사건은 정치권력이 한데 어우러진 검은돈 거래의 대표적 사례다. 노태우 대통령과 김영삼(YS) 민자당 대표, 제1야당 평민당의 김대중(DJ) 총재 등 당대 최고 지도층이 직접 연루됐고, 권력 비리에 대한 국민적 저항이 본격적으로 분출됐던 사건이라는 점에서 이만한 연구 자료는 더 이상 구하기도 어렵다. 특히 여권의 ‘돈 잔치’에 ‘숟가락 하나’를 얹었다가 한통속으로 매도되고, 정치적 곤경 타개를 위해 자신도 간여된 사건의 규탄을 위한 군중대회를 개최했던 DJ 처지는 차라리 희극이다. DJ는 이원배 의원이 한보 건을 ‘물어오자’ 가장 신임하는 권노갑 총재특보가 ‘요리’토록 했다. 대통령과 여당 대표가 OK를 한 사안이니만큼 눈 한번 감아주면 목돈이 생기기에 안심하고 끼어들었는데 그게 아니었던 것이다. 언론이 음모를 까발리자 다급해진 청와대는 사건을 틀어막기 위해 총력 대응을 넘어 차제에 골치 아픈 YS 견제와 DJ 망신 주기로 활용했다.

 

1995년 8월 주요 경제인들을 청와대로 초청, 환담하는 김영삼 대통령. 재벌 돈을 안 받겠다고 공언한 대통령의 여유가 읽힌다. 그러나 청와대 입성 전 수천억 원을 신세졌고, 특히 한보 정태수 회장 관련 원죄는 YS의 발목을 잡았다.

 


김태식 실장 “DJ에게 불똥 튈까봐 내가 총대”

 

“평민당 당무회의는 수서연합주택이 신청한 민원을 접수키로 했다. 이는 국회 건설위에 제출된 동일 내용의 청원에 대한 동의와 같은 얘기다. 제1야당이 손을 들어줌에 따라 말 많던 수서 문제는 막을 내리는 듯했다. 공당이 공식 의결한 사안을 개인의 뇌물수수로 엮으려 하고, 그러다 안 되니 공갈죄로 집어넣으려 했다. 대법원이 무죄 판결을 내린 것은 당연했다.” 

 

수서 비리 사건 당시 구속 기소됐던 김태식 당시 평민당 총재비서실장의 말이다. 그는 한보건설 간부로부터 3000만원을 받은 혐의로 검찰 수사를 받았었다. 김 실장이 비록 무죄로 풀려났다지만 업자의 돈을 받음으로써 당의 명예를 실추케 한 것은 분명했고, 따라서 다음 총선에 얼굴을 내밀지 못하는 건 상식이다. 그러나 김 실장은 김대중(DJ) 총재의 전폭적 지원 아래 국회의원에 당선됐고 당의 핵심 직책인 사무총장·원내총무가 됐다(이후 15·16대 총선에서도 연속 당선돼 국회부의장 역임).

 

“여론이 들끓으니 우리 당에서도 누군가 총대를 메야 하는 상황에 처했다. 하지만 권노갑 총재특보가 걸려들면 총재에게 불똥이 직접 튀게 마련이니 대변인을 마치고 비서실장으로 있던 내가 뒤집어쓰는 데 적격이었다. 당무위원들에게 2000만원씩 돌린 게 알려지면 그 꼴이 어떻게 되고 이후 사태를 어찌 감당하나.” 

 

김 실장의 ‘모든 당무위원 2000만원’언급은 당의 민원 접수 의결이 ‘거당적(擧黨的)’인 것이며 총재의 지휘 아래 이뤄졌다는 말과 통한다. 자신은 ‘끼워 팔기’ 내지 ‘꼬리 자르기’의 산물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DJ 총재가 그다음 총선 때 김 실장의 전주 선거구를 방문해 “나를 대신해 고생한 사람”이라며 치켜세운 것을 포함한 미스터리 상황 전개의 해답도 이런 데서 찾을 수 있다. 평민당 최고지도부에 ‘입금’된 크기는 미지수다. 그저 야당의 입을 막는 게 화급한 상황에서 ‘손이 크기’로 유명한 정 회장이 통상의 관행을 훨씬 넘는 베팅을 했을 소지는 다분하다. 그럼에도 DJ가 수서 비리 규탄 군중집회를 개최한 것은 아이러니다. 이와 관련해 DJ로서는 훨씬 많이 챙기고

 

특혜를 밀어붙인 청와대와 여당이 자신에게 덤터기를 씌우고 망신 주는 것을 묵과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는 해석이 압도적이다. DJ 특유의 ‘오리발’ 수법이라고 치부할 게 아니라 역공만이 궁지 탈출의 유일한 대안이었다는 얘기다.


한보 정 회장이 여권과 얼마나 밀착됐고 검찰이 어느 정도 ‘협조적’이었나 하는 것은 그가 3개월 만에 병보석으로 풀려나 활개 친 사실에서도 입증된다. “구치소에서 나온 정 회장이 여성 2명을 대동하고 서울 근교 D 골프장에 나타났다. 한국 사회를 벌집 쑤시듯 만든 사람이 몇 달 만에 풀려난 것도 이상하지만 병보석으로 나왔다는 정 회장이 보란 듯이 골프장에 모습을 드러냈으니…. 목격자의 귀띔을 받은 청와대는 아연실색, 정 회장에게 ‘자숙’을 당부했다. 정 회장의 위세는 그 정도였다.” 박 실장과 당시 정치자금 전말을 주고받던 청와대 출입기자 K씨의 증언이다.

 

3개월 만에 병보석 출소한 정태수는 골프장에


YS가 대표로 있는 민자당 최고회의도 수서 특혜 민원을 의결했었다. 그러나 사태가 비화되자 기조실장이 당일 회의록을 찢어버린 것을 아는 사람은 다 안다. YS는 ‘한 식구’인 검찰이 상황을 잘 추슬렀기 때문에 6공 최대 권력형 비리로 불리는 수서 사건에서 벗어나긴 했다. 그러나 한보 정 회장과의 잘못된 만남은 YS의 발등을 찍었다. 자신의 집권 중 차남 현철이 구속되는 광경을 바라봐야 했고 치적 전체에 씻을 수 없는 오점을 남겨야 했다.

 

정 회장은 10여 년이 흐른 후 YS에게 150억원을 줬다고 폭로했다. YS가 자신과 같은 아파트에 사는 김명윤 민자당 고문 집에 와서는 만나자고 수시로 연락했다고 주장한다. “돈이 없어 죽을 지경이라며 도와달라고”했다는 것이다. 돈을 준 시기와 관련해선 대통령 후보가 된 초기라고 말해 그 150억이 수서 비리 로비와는 일단 무관한 듯싶다. 다만 당 재정위원으로 있으면서 수시로 돈을 보태줬기 때문에 수서 사건 당시도 ‘거저’가 아니었음은 분명하다.

 

YS가 대통령 후보가 되기 전까지 민자당 공식 자금 루트는 민정계를 대표한 박태준 최고위원이었다. “민정계의 견제가 만만치 않아 YS는 주로 경남고 동창 등 PK 출신 기업인들이 보내주는 자금으로 버텼다. 홍인길 비서가 여기저기서 염출해 오기는 했지만 씀씀이에 비하면 ‘푼돈’이었다. 그러나 1992년 5월 대선 후보가 되고 지지율이 오르자 상황이 급변했다. 돈이 밀려들었다. 기본 단위는 10억이다. YS는 바빠졌다. 재벌들이 후보를 직접 대면해야 돈을 내놓겠다니 별도리가 없었다. YS는 지방 유세 중에도 야간에 틈을 내 그들을 만나는 강행군을 했다. 100억 단위만은 직접 만나줘야 했고, 그 이하는 홍 비서가 대신하는 경우도 있었다. 특히 박태준 최고위원이 탈당한 이후엔 공조직 자금까지 직접 수수해야 하니 더 바빠졌다.”

 

“YS는 박 최고위원의 탈당 등이 청와대의 비협조 내지 방해 때문이라며 청와대를 압박했다. ‘두고 보자’는 으름장도 흘렸다. 놀란 청와대는 그제야 노 대통령의 자금을 관리해온 ‘금융계 황제’ 이원조 의원을 붙여줬다. 이 의원은 재벌들 일정을 정해 YS를 만나도록 했고 때론 자신이 직접 수금해서 복심을 통해 YS 측에 전달했다.”

 

“재벌들의 ‘헌금’ 보관과 출납은 홍 비서가 총괄했고, 손주환 정무수석을 통해 내려오는 청와대 지원 자금은 선대위 재정을 담당하던 당 사무총장이 관장했다. 대선 경비와 관련해 1조원, 1조원 이상 등으로 분분한 것은 다원화된 자금 파이프 때문이다. 250개 지역구에 다 쓰지도 못할 정도로 자금을 내려보냈는데 바삐 돌아가는 와중에 언제 그 돈을 헤아리고 있을 수 있나. 대충 짐작할 뿐이지만 그것도 확실치 않다.” 박 실장을 비롯한 민주계 인사들이 말하는 1992년 대선 자금 회고담이다.

 

YS가 대통령 재임 중 재벌 돈을 받지 않았다지만 청와대 입성 전 물가 수준까지 감안하면 500억원 정도가 되는 150억원을 줬다는 한보 정 회장 주장도 있고 보면 모든 전비(前非)가 씻기는 것은 아니다. 정 회장이 부도 처리에 대한 앙갚음으로 부풀렸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으나 은행장들을 동원해 5조원이 넘는 돈을 끌어 쓴 사실 등에 비추어 괜한 얘기는 아닐 듯하다. 이런 것들이 개인 축재와 무관한 YS가 DJ와 대비돼 일단 평가받지만 점수를 깎이는 요인이다. 박 실장은 “예전에야 그렇다치고, 주변관리만 잘했더라도…”라며 아쉬움을 토로했다.

 

 

1991년 수서 비리, 1997년 금융특혜 사건의 장본인 한보 정태수 회장. 입이 무거워 ‘자물통’ 별명을 가진 그였지만 한보가 부도 처리되자 YS에게 150억원을 줬다고 폭로했다. ⓒ 시사저널 임준선

1991년 1월 서울시가 수서·대치 택지 개발 예정지구를 특정 연합주택조합에 특혜 분양키로 하면서 여론이 들끓었다. 청와대 지시로 수사에 나선 검찰은 당시 이태섭·오용운·김동주 등 여당(민자당) 의원 3명과 이원배·김태식 등 야당(평민당) 의원 2명, 장병조 청와대 문화체육비서관, 이규황 건설부 국토계획국장 등 8명의 정·관계 인사를 뇌물수수 혐의로 구속했다. 수서 로비를 총지휘한 정태수 한보(韓寶) 회장은 배임증재 등 혐의로 구속됐다. 

 

수서 비리 사건은 규모 면에서 6년 후 터진 한보금융비리 사건에 한참 뒤진다. 5명의 여야 의원이 받은 뇌물이 도합 5억2000만원에 지나지 않는다. 한보금융특혜 사건 당시 드러난 불법 여신은 단군 이래 최대라는 5조원을 상회한다. 그럼에도 수서 비리 사건을 검은돈이 얽힌 권력형 비리의 대표로 꼽는 이유는 관련자의 면면과 사건 전개 과정 등 죄질이 고약하고 정·재계의 어두운 구석을 망라하기 때문이다. 거기에 1991년 수서 사건은 1997년 한보금융특혜의 ‘전초적’ 성격도 있어서다. 

 

수서 비리에는 대통령과 YS 민자당 대표, DJ 평민당 총재 등 당대 최고 정치지도자들이 직접 관여됐다는 점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또 ‘범(汎)정치권’이 검은돈을 받고 특혜 분양을 거부하는 서울시장(고건)을 윽박지르다가 그마저 여의치 않으니 서울시장을 갈아치운 후 새 서울시장으로 하여금 도장을 찍게 했다는 점도 그렇다. 노 대통령은 정태수 회장을 네 차례 청와대 안가(安家)로 불러 모두 150억원을, YS도 정 회장으로부터 ‘상당액’을 받은 것으로 돼 있다. DJ가 받은 액수도 불분명하다. 다만 이원배 의원은 정 회장으로부터 개인 몫 2억3000만원 외에 따로 받은 2억원을 권노갑 총재특보에게 전달했다고 진술한 바 있는데 정 회장이 가장 신경 썼던 야당 입을 막기 위해 ‘야당은 여당의 10분의 1’이라는 평소의 ‘관행’을 깼다는 후문이고 보면 DJ에게 입금된 액수는 대충 짐작된다. 만약 제대로 수사가 이뤄지고 법대로 처리됐다면 당시 한국 최고지도자(특혜 분양 청원 수용을 의결한 민자당 김종 필·박태준 최고위원 포함)들 모두가 온전치 못했을 것이라는 상상도 가능하다. 

 

사실 국회의원 5명이 뇌물죄로 구속된 것만도 결코 작지 않은 사태인데도 실체와는 비교 자체가 부끄러울 만큼 왜곡·축소된 것이다. 그런 점에서 흔히 하는 ‘꼬리 자르기’ 내지 ‘덮기’라는 단어로는 한참 부족하다. 차라리 ‘본격적 은폐’ 수사라는 말이 적확하다. 검사 10명으로 구성된 특별수사팀에 출두한 인사들 이름만 열거해도 뭔가 큰 성과가 나올 것 같았다. 김용환 정책위의장을 비롯한 여당 핵심 의원 2명, 이상배 행정수석 등 전·현 청와대 수석 3명, 홍성철 전 청와대비서실장과 권영각 전 건설부 장관, 권노갑 평민당 총재특보 등이 불려갔다. 허가 압력에 맞서다 목이 잘린 고건 전 서울시장과 후임 박세직 시장은 물론이다(고 시장은 훗날 청와대가 협조 공문까지 보내왔고 그래도 버티자 몇몇 수석들이 직접 허가를 종용했다고 폭로한 바 있다). 이종남 법무부 장관까지 1990년 8월 당정회의 당시의 관련 발언 내용에 대한 경위서를 썼으니 진실을 규명하려는 수사 의지가 대단한 것처럼 비치기는 했다. 

 

하지만 정반대였다. 여러 거물들에 대한 수사는 국민들을 현혹시키기 위한 시늉에 불과했다. 청와대에선 비서관 한 명 달랑 구속되고, 여당에선 건설위 오용운 위원장과 수서를 지역구로 하는 이태섭 의원과 목소리 큰 김동주 의원을 잡는 데 그쳤다. 이원배 의원이 2억원을 받아 건넸다고 분명히 진술한 권노갑 특보는 “뇌물로 볼 수 없다”는 이유로 제외됐고 김태식 총재비서실장이 평민당 ‘대표’로 구속됐다. 주무 부서인 서울시 관계자가 단 한 명도 걸려들지 않고, 건설부 안팎에서 제일 유능하고 청렴한 것으로 정평 난 이 국장이 구속됐으니 혀를 내두를 만했다. 송사리만 건져 올리는 등 이 거창한 수사를 착수 12일 만에 신속히 끝내고, 황당한 수사 결과를 국민 앞에 내놓은 검찰의 수사 역량과 후안(厚顔)은 가히 금메달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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