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리더십] 동서 교류 통해 세계사의 흐름 바꾸다
  • 김경준 | 딜로이트 컨설팅 대표 (.)
  • 승인 2016.03.10 20:09
  • 호수 1378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한무제, 흉노 밀어내 유럽까지 연쇄적 민족 대이동 초래

한고조 유방이 한(漢)나라를 건국(B.C. 202년)하면서 제국의 얼개를 만들었다면 한나라 7대 황제인 한무제(漢武帝) 유철(劉徹)은 흉노를 정벌해 북방을 안정시키고 비단길을 개척해 동서 교류의 물꼬를 텄으며 유교를 통치이념으로 채택해 제국 통치의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확립했다. 한무제에 의해 서방으로 이동한 흉노족들이 동유럽에 거주하던 게르만을 서쪽으로 밀어내면서 고대 로마제국의 국경이 불안해졌고 결국 로마 패망의 원인이 됐다는 점에서 본의 아니게 세계사의 흐름까지 바꿨다.

 

중국 최초의 통일제국 진나라는 통일 후 15년 만인 B.C. 206년 초나라 항우에게 멸망했다. 양자강 이남의 풍부한 물자와 인력을 기반으로 거병한 귀족 출신 항우는 초반 주도권을 잡았으나 유방(B.C. 247~ 195)이라는 예기치 않은 복병을 만났다. 변방 하급 관리로 동네 건달들의 우두머리였던 미천한 출신 유방은 항우 휘하의 일개 부대장에 불과했으나 주변에 책사와 장수들을 불러모으면서 세력을 불려 항우군을 물리치고 진나라 패망 4년 후 한나라를 세웠다. 초반 우세를 점했던 항우가 이겼더라면 오늘날 중국인은 한족(漢族)이 아니라 초족(楚族)이라고 불려야 했을 정도로 중국사의 분기점이었던 이른바 초한대전은 후세에 무수한 스토리로 재생산되면서 현재 장기판의 초한전으로 남아 있다.

 

한무제 초상화

 


흉노의 속국에서 대결 정책으로 전환

 

내란을 종결한 한나라는 북방 흉노족이라는 새로운 위협에 직면했다. 당시 흉노는 묵돌선우가 아시아 최초의 유목국가를 수립하고 세를 떨치고 있었다. 한고조 유방은 친히 40만 대군을 이끌고 B.C. 202년 흉노 정벌에 나섰으나 오히려 대패하고 매년 조공을 바치는 치욕적인 화친 조약으로 종결됐다. 이후 60년간 흉노의 속국이나 다름없이 눌려 지내다 한무제가 즉위(B.C. 141)하면서 대결 정책으로 전환한다. 단순한 방어 차원이 아니라 흉노 근거지를 정벌하는 적극적 공격 작전을 위한 12년의 준비 기간을 거쳐 B.C. 129년 위청과 곽거병을 장수로 내세운 대대적 공격에서 대승을 거둔다. 흉노는 고비 사막 너머로 패주했고, 내친김에 한무제는 화근을 없애버리기 위해 서역의 국가들과 동맹을 맺고자 장건을 파견한다. 13년 만에 귀국한 장건의 정보에 기초해 서역 국가들을 대상으로 정벌과 동맹을 병행하며 결과적으로 한나라 판도를 서역으로 확대함으로써 동서 교역로인 비단길이 열리게 됐다.

 

한편 흉노가 중국 북방에서 밀려나 서쪽으로 이동하면서 도미노 현상과 같은 연쇄적인 민족 대이동이 일어났다. 흉노의 중앙아시아 이동으로 이 지역의 대월지 부족들이 남쪽으로 밀려나 인도의 쿠샨 왕조가 성립됐다. 계속 서진한 흉노 일파가 중부 유럽까지 진출하면서 야만족 게르만을 압박하자 서쪽 로마 방면으로 게르만 대이동이 일어나면서 로마 국경이 교란됐다. 군비 지출 증가에 내정의 혼란이 겹친 로마는 A.D. 476년 멸망했다. 서양에서 훈(Hun)으로 불린 흉노는 5세기 아틸라 왕 당시 유럽 최강의 군대였고, 흉노 일파인 마자르는 후일 훈의 나라인 헝가리(Hungary)를 수립해 오늘에 이른다. 한무제의 정벌로 흉노족이 서쪽으로 이동하면서 파생된 연쇄 이동은 유라시아 대륙의 역사를 바꾸는 단초를 제공했다. 한무제의 정복 사업은 계속돼 남쪽의 월국에 이어 동쪽으로는 조선을 침략해 멸망시키고 요동과 한반도에 한사군을 설치(B.C. 108)했다.

 

한무제 동상

 

 

한무제, 유학을 통치이념으로 공식 선포

한무제는 당대의 대유학자 동중서의 건의를 수용해 유학을 통치이념으로 공식 선포했다. 한나라를 건국한 건달 출신 유방은 고담준론을 일삼는 유학자들에게 우호적이지 않았고, 도교의 자유분방함에 호감을 느꼈다. 진나라가 법가사상에 기반한 엄격한 통치 방식으로 반감을 키우면서 붕괴한 배경도 작용해 전설의 삼황오제를 섬기는 황제 신앙과 도교 신앙을 결합해 만들어진 황로학(黃老學)을 통치의 근간으로 삼았다. 그러나 무속과 자유분방함의 결합은 혼란기를 수습하는 이른바 힐링에는 적절했으나 느슨하고 치밀하지 못해 안정기의 통치이념으로는 부족했다.

 

이런 배경에서 주나라 전통을 계승하고 천자 중심의 천하 질서를 근간으로 하는 신흥 학문 유학은 강력한 권력을 추구하던 한무제의 취향에 들어맞았다. 공자 이후 350년간 제자백가들의 주장 중 하나에 불과했던 유학은 공식적 국가 통치이념으로 격상됐고 이때부터 2000여 년 동안 중국은 물론 동아시아 지역 정치사상의 중심으로 자리 잡았다. 한무제는 중국 최초로 ‘기원을 세우다’는 의미의 연호인 ‘건원(建元)’을 사용했고, 후일 정복한 국가들에 단일 연호를 강요해 중국 중심의 단일 문화권으로 편입시키려 노력했다.

 

한무제의 대외 팽창 정책은 커다란 성공을 거뒀다. 북방을 안정시키고 서역으로 확장하면서 국제 교역로를 개설했고, 남과 동으로의 정복 사업도 성공했다. 그러나 이는 막대한 재원을 필요로 했고, 더욱이 궁전과 왕릉 등 천자의 위엄을 나타내기 위한 대규모 건설 사업까지 추진해 국가 재정은 극도로 궁핍해졌다. 재정난을 타개하기 위해 소금과 철의 민간 매매를 금지시키고 국가 전매 사업으로 전환해 관련 분야 상인들의 이익을 국가로 귀속시켰고, 오늘날의 물류 산업을 국가 산업으로 전환시키는 균수법(均輸法)을 시행했다. 초기에는 군수물자에 적용했으나 점차 상인들이 취급하는 일반 물품으로 범위를 확대해 경제에 대한 국가의 개입도를 높여 재원을 확충하려 했다. 그러나 민간 경제를 무리하게 국가 주도로 전환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고, 그에 따라 재정난과 경제적 어려움이 지속됐다. 게다가 후계를 둘러싼 고질적인 내분에 외척과 환관들의 발호가 시작돼 한무제는 대외 정복 사업을 통해 높아진 명성과는 달리 대내 통치는 성공적이지 못했다.

 

한무제는 본의 아니게 서양 역사의 아버지 헤로도토스에 비견되는 중국 역사의 원조 사마천(B.C. 145~86)을 탄생시켰다. 흉노에게 패배하고 투항한 장수 이릉을 변호하던 신하 사마천에게 궁형(宮刑)을 내렸고, 치욕적으로 관직을 물러난 사마천은 가업인 역사 편찬에 전념해 총 130권의 <사기(史記)>를 저술했다. <사기>는 이후 중국 역사 서술의 전범이 됐고 중국은 물론 동양의 역사관과 서술 방식 전반에 큰 영향을 미쳤다.

 

한무제는 54년간 재위하면서 진시황과 한고조가 출발시킨 통일제국의 골조에 영토 확장, 통치이념과 제도 확립이라는 건물을 완성해 중국이 세계 제국으로 발전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