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터로 내몰린 아이들
  • 이민우 기자 (mwlee@sisapress.com)
  • 승인 2016.02.18 16:04
  • 호수 1375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무한 경쟁’ 스트레스 위험 수위…“경쟁 탈피 위한 다양한 시도 이어져야”

“힘들고 부끄러운 20년이었습니다. 저를 힘들게 만든 건 이 사회이고 저를 부끄럽게 만든 건 제 자신입니다. 하지만 이제는 괜찮습니다. 더 이상 힘들고 부끄러운 일은 없습니다. 지금은 제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입니다. 20년이나 세상에 꺾이지 않고 살 수 있었던 건 저와 제 주위 사람들에 대한 사랑 때문입니다. 아직 날갯짓 한 번 못한 제가 아까워 잠실대교에서 발걸음을 돌렸고, 제가 떠난다면 가슴 아파할 동생과 친구들을 위해 옥상에서 내려온 게 수차례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너무 힘이 듭니다. 이만 꺾일 때도 됐습니다.”

지난해 12월18일 새벽 4시 무렵. 19세의 한 대학생이 스스로 세상을 등지며 남긴 유서의 일부다. 한 지방의 과학고를 2년 만에 조기 졸업하고 서울대에 입학한 수재였다. 장학금을 받을 정도로 성적도 뛰어났고, 학보사 기자로 활동하는 등 학내 활동에도 활발하게 참여했다. 얼마 전에는 해외여행을 다녀오기도 했다. 아버지는 대학교 강사, 어머니는 중학교 교사였다. 경찰 조사 결과에 따르면 경제적 어려움은 크게 없었다고 한다.

ⓒ 시사저널 이종현

그의 자살 소식은 ‘서울대생’이라는 타이틀과 함께 급속도로 퍼져 나갔다. 유서에 등장하는 단어를 발췌해 ‘수저 계급론’으로 대변되는 불평등한 사회문제에 불만을 품은 자살이라는 성급한 분석도 이어졌다. 하지만 그가 왜 스스로 세상을 떠나면서 “가장 행복한 순간”이라고 했는지는 알 수 없다. 구체적인 자살 원인은 주로 유서나 가족들의 증언, 사망 전 행동 변화 등을 토대로 추정될 뿐이다. 다만 입시 정글에서 ‘승자’로 비춰졌던 그조차도 스스로 ‘불행하다’고 여긴 것은 확실해 보인다.

자살공화국. 한국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자살률 1위라는 불명예를 11년째 이어가고 있다. 한 해 1만4000여 명, 38분당 1명씩 스스로 목숨을 끊고 있다. 한국 청소년들의 사망 원인을 보면 자살이 2009년부터 2013년까지 줄곧 1위를 차지했다. 교육부 조사 결과에 따르면, 최근 2년간(2014~15년) 자살을 생각해봤다는 중·고등학생은 무려 2만1700명에 달했다. ‘자살을 생각해봤다’고 밝힌 청소년 5명 중 1명꼴로 최근 1년 내에 자살을 시도한 적이 있다는 조사 결과도 있다. 아직 꽃도 제대로 피워보지 못한 이들이 스스로 꺾이려는 이유는 무엇일까.


물질적 풍요 속 행복지수는 최저 수준

2014년 한림대 학생정신건강연구소의 자살 원인 조사 결과에 따르면, 청소년 자살자들이 겪었던 고민 중 1위는 성적 문제(26.8%)였다. 때문에 1등만 키우는 입시 위주의 경쟁식 교육 시스템에 변화를 꾀해야 한다는 주장이 지속적으로 제기되는 상황이다.

한국의 청소년들은 물질적 풍요로움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불행하다고 느끼는 경향이 컸다. 2009년부터 어린이·청소년 행복지수를 조사·발표하는 한국방정환재단에 따르면, 지난해 청소년들의 생활과 생활양식(1위), 물질적 행복(2위), 보건과 안전(4위) 항목은 비교 국가 23개국 가운데 상위권을 기록했다. 가족과 친구 관계도 7위로 비교적 양호한 수준을 보였다. 반면 주관적 행복 항목에서는 19위를 기록했다. 그나마 꼴찌를 기록했던 2014년보다 다소 개선된 수준이었다.

스스로 행복하지 않다고 여기면서 초·중·고교생 5명 중 1명꼴로 자살 충동을 느꼈다고 답했다. 스스로 ‘행복하지 않다’고 응답한 학생의 자살 충동 경험 비율은 53.9%로, 행복 집단(16.1%)에 비해 3배 이상 높았다. 특히 자살 충동 경험 비율은 초등학생 14.3%, 중학생 19.5%, 고등학생 24%로 상급학교로 올라갈수록 크게 높아졌다.

학업 스트레스는 높은 반면 학교생활에 대한 만족도는 낮았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에 따르면, 한국 청소년의 학업 스트레스지수(2013년 기준)는 50.5%로, 유엔아동기금(UNICEF)이 조사한 30개국 가운데 가장 높았다. 전체 평균 33.3%보다 17.2%포인트 높은 수치다. 가장 낮은 네덜란드(16.8%)의 3배나 됐다. 반면 한국 청소년의 학교생활 만족도는 18.5%로 전체 평균인 26.7%에 한참 못 미쳤다.

한국 학생들이 유독 행복을 못 느끼는 이유는 무엇일까. 교육단체 쪽에서는 과도한 학업 부담을 꼽고 있다. 청소년인권단체 ‘아수나로’와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이 지난해 8월 발표한 실태조사 결과에 따르면, 초등학생의 85.7%, 중학생의 75.9%, 일반고  학생의 64.4%는 2015년 상반기에 사교육을 받은 적이 있다고 답했다. 특히 중학생과 일반고 학생 절반 이상은 경쟁에서 뒤처지는 것이 두려워 사교육을 받은 것으로 조사됐다. 평일 사교육을 받는 시간은 중학생이 주당 11시간52분으로 가장 길었다. 초등학생과 일반고 학생은 각각 11시간35분, 7시간1분이었다.

상급 학교로 갈수록 학업 부담이 커짐에 따라 수면 시간은 현저히 줄어들었다. 하루 평균 수면 시간은 초등학생 8시간28분, 중학생 7시간16분, 일반고 학생 5시간50분, 특성화고 학생 6시간14분으로 전체 평균은 6시간58분이었다. 중학생의 68.1%, 일반고 학생의 82.7%는 수면 시간이 부족하다고 답했다.

긴 학습 시간에도 불구하고 일반고 학생 49.3%가 자신의 학습 시간이 ‘부족하다’고 느꼈다. 인문계 고교생의 72.8%는 ‘쉬고 있을 때 불안하고 초조하다고 느낀 적이 있다’고 답했고, 85.6%는 ‘학업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밝혔다. 실태조사에 참여한 공현 아수나로 활동가는 “실제로 공부를 많이 하더라도 압박과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경우 좀 더 공부해야 한다고 여기게 된다는 해석이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미국의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부러워할 정도의 높은 교육열은 한국의 학업 성취도를 세계 정상급으로 올려놓았다. OECD가 3년마다 76개국을 대상으로 조사하는 국제학업성취도 비교평가에서 한국은 싱가포르, 홍콩에 이어 3위를 차지했다. 하지만 교육 만족도와 학업 흥미도, 자기주도학습 능력, 투자 시간 대비 효율성 등은 최하위 수준에 머물렀다. 학생들의 행복감과 맞바꾼 결과물치고는 질적 성장을 이루지 못한 꼴이었다.

도시형 대안학교 학생과 교사 등 관계자들이 서울 마포아트센터에서 축제를 벌이고 있다. ⓒ 시사저널 임준선


“경쟁 벗어나니 행복 Up”

서울 송파구 잠실동에 거주하고 있는 김정호군(17·가명)은 지난해 수도권의 한 대안학교로 옮겼다. 그 전까지 일반고에 다녔던 김군의 생활은 4~5개 과외를 받는 동갑내기 친구들과 다를 바 없었다. 성적도 중·상위권으로 서울 지역 대학 입학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하지만 대학교수인 아버지와 여성단체 간부인 어머니의 기대를 채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부모와의 관계는 갈수록 멀어졌고 집에선 말을 하지 않는 상황까지 벌어졌다. 아프다는 핑계로 학교를 빠지기도 했다. 극심한 스트레스에 짓눌려 있던 김군은 몇 차례 극단적인 생각을 떠올리기도 했다.

김군과 그의 부모는 몇 차례 대화 끝에 대안학교를 찾았다. 교과목을 공부하는 시간은 그대로였지만 분위기는 달랐다. 디지털 사진 촬영 수업을 듣고 사진작가가 되겠다는 새로운 꿈도 생겼다. 부모와의 대화도 다시 시작됐다. 김군은 “사진작가가 되겠다고 하자 부모님께서 비싼 카메라와 렌즈를 사주셨다”며 “사진을 통해 사회의 모습을 담고 사람들에게 이야기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말했다.

김군이 찾은 대안학교처럼 경쟁 위주 교육의 폐해를 극복하기 위한 실험들이 계속되고 있다. 1997년 산청간디학교의 개교를 시작으로 곳곳에서 대안교육에 대한 관심이 커졌다. 최근에는 학력을 인정받는 대안학교가 24곳으로 늘어났다. 수백만 원에 달하는 수업료는 교육부의 지원으로 일반고 수준까지 떨어졌다. 학교 성격도 초기 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한 아이들을 위한 공간에서 경쟁 위주의 교육에서 벗어난 제3의 길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또 다른 유의미한 시도도 있다. 한 기업과 녹색소비자연대, 대한체육회 등은 지난해 특별한 체육 프로그램을 도입해 각급 학교를 지원했다. 기존의 승패를 가리는 운동 프로그램을 바꿔 운동 능력이 부족한 아이들도 참여할 수 있는 ‘평등 농구’와 ‘단결 핸드볼’ 종목을 개발했다. 경쟁적인 교육 풍토 속에서 배려와 참여 중심의 프로그램을 통해 학생들의 자기주도적 습관을 형성하기 위한 시도였다.

그 결과는 놀라웠다. 지난 2월3일 발표한 ‘청소년 행복지수 변화’ 결과에 따르면, 프로그램에 참가한 학생들의 행복 및 삶의 만족, 자아존중감 등 정서적 안정감이 이전보다 상승했다. 행복지수는 10.0%, 삶의 만족도는 5.7%, 자아존중감은 1.4%씩 각각 상승했다. 조사를 진행한 녹색소비자연대 서아론 부장은 “입시 위주의 교육을 탈피해 모든 학생이 참여할 수 있는 체육 프로그램의 효과성이 증명된 것은 중요한 의미를 가지며, 향후 서울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 시행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