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관용 회고록] “하나회 영관 장교까지 손보려던 게 아니었다”
  • 박관용│前 국회의장 정리=김현일 대기자 (.)
  • 승인 2016.02.18 15:43
  • 호수 13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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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장관·육군총장이 밀어붙이고, 호의적 여론에 YS 고무

“육군참모총장 김진영 대장 해임·전역, 기무사령관 서완수 중장 해임·전역. 후임 육군총장 김동진 대장, 기무사령관 김도윤 소장.” 1993년 3월8일 청와대 발표에 많은 사람이 귀를 의심했다. 올 게 왔구나 하면서도 아연했다. 한 시절 한국을 주름잡던 하나회 숙청의 신호탄이었다. 전개 양상으로만 보면 김영삼(YS) 신임 대통령에 의한 전격 ‘친위 쿠데타’였다. 군 최고 지휘관을 자르면서 공식 참모 조직과 일언반구 협의가 없었다는 점에서 그렇다.

 

“김진영 육군총장을 바꿉니다. 즉시 시행해요. 후임은 김동진 연합사령관으로 하고. 서완수 기무사령관 후임은 김도윤 참모장으로 합니다. 차질 없도록 하시오. 불만 세력의 반발이나 동요가 없도록 군을 잘 장악하고. 대통령의 엄명에 권영해 국방부 장관도 놀란 표정이었다. 대통령 당선자 시절 YS와 여러 차례 만나며 군 관련 조언을 해온 권 장관이었지만 이렇게 ‘기습적’으로 나올 줄은 몰랐던 모양이다.” 당시 대통령과 국방부 장관 면담 자리에 배석했던 박관용 비서실장의 회고다.

 

“나 역시 이런 속전속결은 상상 못했다. 그 자리에서 처음 듣는 것이었다. 이날 아침 등청한 대통령이 내게 지시를 했다. 국방장관을 7시 반까지 청와대에 올라오도록 하라고. 대통령은 앉자마자 권 장관에게 ‘장성들은 언제 바꿀 수 있나’라고 물었고 ‘통수권을 행사하시면 언제든지 가능하시다’는 답변이 끝나자마자 육군총장과 기무사령관 교체를 지시한 것이다. 그뿐이 아니었다. 후임자까지 지명했다. 철통보안 속에 치밀하게 준비해왔다는 말이다.”

 

1993년 4월26일, 3군 지휘관 회의를 주재하는 김영삼 대통령. 불과 한 달여 사이에 하나회 핵심인 육군참모총장과 기무사령관을 우선으로, 수방·특전 사령관과 육군 1·2·3 군사령관 및 군단장·사단장들을 강제 전역시킨 대통령의 표정엔 자신감이 넘친다. 대통령 오른쪽은 하나회 숙청을 주도한 권영해 국방부 장관, 김동진 신임 육군총장. ⓒ 연합뉴스

 


비서실장·국방비서관도 따돌리고 전격 결행

 

역시 YS다운 일 처리였다. 그의 강기(剛氣)와 독한 면이 여지없이 발휘된 거사(擧事)가 아닐 수 없다. YS의 치밀함은 최고 참모인 비서실장과 실무 책임자인 국방비서관(김희상 장군)마저 철저하게 배제한 데서도 나타난다. YS는 목을 자르려는 김 총장과 박 실장이 부산중학교 동기동창으로서 친밀한 사이임을 꿰고 있었던 것이다. 비서실장조차 낌새를 못 챘으니 3·8 조치 다음 날 수석회의를 주재하면서 “깜짝 놀랐제” 하며 득의양양할 만했다.

 

“대통령직인수위원(1분과) 시절 많은 사람을 만나면서 군 개혁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를 물었다. 그때 여러 사람으로부터 들은 게 하나회 척결이다. 하나회가 군을 망쳤다면서 그 폐해를 말하는 이가 많았다. 당선자를 독대한 자리에서 ‘군 내부 하나회에 문제가 많은 것 같습니다’라고 보고하니까 ‘나도 듣고 있다. 그러니 이 문제는 공식 자리에서는 거론하지 않도록 하라’고 했다. 때문에 대통령에게 뭔가 계획이 있다고 생각했지 이처럼 빨리 손을 쓸 줄은 몰랐다.” 박 실장은 대통령이 공식 참모 조직을 통하지 않은 대신 사적 채널을 통해 관련 상황과 정보를 수집했다고 전한다. YS에게는 절친한 김윤도 변호사가 이끄는 비선 조직과 군 출신으로 이뤄진 별개의 군 관련 정보 창구가 있었는데 1군사령부 방첩대장 출신의 예비역 중령 A씨를 비롯한 예편 장교들로 구성돼 있다는 것. YS는 8일의 ‘거사’ 이틀 전인 3월6일 이들 비선 참모들과 우선 제거 대상과 방법, 사후 조치 등을 최종 점검했다. “YS는 정말 무서운 사람이다. 총장 경질 얼마가 지나 대통령에게 물러난 김진영 장군을 위로하는 자리를 갖겠다고 보고한 후 함께 식사를 했다. 이 자리에서 그가 물었다. ‘해임 며칠 전에도 나에게 무한한 신임을 보였는데 닷새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고. 그래서 ‘정치인 속을 군인인 니가 어떻게 알겠느냐’고만 얘기해줬다.”

 

YS가 비선 조직만을 가동, 철저한 보안 속에 하나회 숙청을 밀고 나갔다는 사실은 김희상 국방비서관의 증언과 일치한다. “김진영 총장은 본인이 차기 합참의장이 된다고 내심 믿고 있었다. 숙청되리라고는 꿈도 꾸지 않았다. 불과 닷새 전인 3월3일 국방보고회에서 대통령은 군 지휘부의 노고를 치하했다. 대통령 비서실장이 친구인 데다 대통령이 칭찬을 아끼지 않으니 김 총장으로서는 그럴 만했다. 보고회가 끝난 후 김 총장을 만났을 때 그의 말 속에는 합참의장으로서의 포부 등이 담겨 있었다. 육·해·공 3군의 중장 이상이 참석한 3일의 보고회가 군 지휘부를 방심케 하는-방심하지 않았더라도 다른 도리가 없었겠지만-미끼였던 셈이다. 어쨌든 군 지휘부가 ‘허’를 찔린 국방보고회는 그런 점에서도 의미가 큰데 사실 내가 국방보고회 개최를 처음 건의했을 때만 해도 대통령은 시큰둥했다. 다른 참모들도 군에 대한 대통령의 인식을 알아서인지 반대 의견을 냈다. 그래서 ‘3월6일 육사 졸업식장에서 전군 지휘관들을 만나게 되는데 최고통수권자가 얼굴도 모른다는 것은 어색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처음 들어선 문민정부의 대통령이 군 수뇌부들의 인사와 충성 맹세를 받는 모습은 다수 국민에게 안도감을 줄 것’이라고 재차 건의했다. ‘문민 출신 대통령이 군을 제대로 장악할 수 있나 하는 국민의 의구심을 털어내는 데도 도움이 된다’는 명분이 대통령의 맘을 움직였던 듯하다. 그래서 4일에 국방보고회를 개최키로 했는데 ROTC 임관식이 겹쳐 3일로 조정됐었다. 이런 자리에서 대통령의 칭찬이 쏟아졌으니 김 총장이 오판을 할 만했다.”

 

육군총장 경질 전 격려 오찬으로 낌새 못 채게


총장 경질 바로 다음 날인 9일 김진영 총장 이임·전역, 김동진 신임 총장 취임식이 계룡대에서 열렸다. 기무사령관의 경우는 원체 전격적으로 이뤄지는 바람에 후임 사령관으로 승진한 김도윤 참모장은 별 두 개를 단 채(사령관은 중장 보임 자리) 현직에 앉는 일이 벌어졌다. 이어 이후 9월 정기 인사 때까지 수십 명의 고위 장성이 옷을 벗는 사상 초유의 대대적 숙군(肅軍)작업이 진행됐다. 불똥은 하나회 소속 장군들은 물론 영관 장교들에게까지 튀었다. 이와 관련해 박 실장이나 김 국방비서관은 “YS의 당초 구상이 하나회 영관 장교들까지 손대려는 게 아니었다”고 증언한다. 

 

당시 중앙일보가 특종 보도한 “3성 장군 이상 하나회 예편 조치” 등이 말해주듯 하나회 수뇌부 정리가 당초 계획이었다. 이필섭 합참의장을 포함, 대통령의 권위에 도전할 만한 군부대 지휘권을 가진 수방·특전 사령관 등의 퇴출은 청와대의 입장에선 불가피한 측면이 없지 않다(안병호 수방사령관, 김형선 특전사령관은 4월2일 퇴임). 그러나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1·3 야전군 사령관과 2작전사령관은 4월8일 교체됐고 그 일주일 후 남은 하나회 출신 군단장·사단장들이 줄줄이 강제 전역 조치됐다(이때 살아남은 합참작전국장 이충석 소장은 7월9일 간부회의 회식 석상에서 ‘대통령이 군을 함부로 대한다’며 술병을 던지면서 폭언을 했다가 바로 다음 날 보직해임됐고, 대통령의 하나회에 대한 불쾌감과 의심을 자극해 그나마 한직으로 물러나거나 진급에서 배제됐던 하나회 장성들의 강제 전역으로 이어졌다). 

 

주돈식 당시 정무수석은 “YS는 대통령 후보 시절 이미 숙군의 청사진을 갖고 있었다”, 김정남 청와대 교육문화수석은 “대통령이 (군의 반발 내지 쿠데타를 우려해) 밤잠을 설칠 정도였다”는 말로 대규모 숙청이 예고됐음을 시사하는데 박 실장 등은 약간 다르다. 박 실장은 “YS의 30년 군사독재에 대한 반감이 컸던 것은 사실이고 따라서 하나회 수뇌부를 군에서 축출하는 계획은 분명했지만 영관급마저 불이익을 받게 하는 그런 것은 아니다”라고 단언하고 있다. 하나회에 깊은 반감을 가졌던 권영해 국방부 장관과 김동진 육군총장이 하나회 싹을 자른다는 오기로 칼을 휘둘렀고, 그에 대한 호의적 여론이 YS가 권·김을 감싸게 만들면서 가속화됐다는 것이다(30년 군사 독재에 시달려온 다수 국민들에다, 150여 하나회 장교들이 한국군을 쥐락펴락하는 상황에 절대 다수 장교가 반감을 가진 게 현실이었기에 하나회 숙청에 대한 여론이 좋음은 당연했다).

 

육군참모총장 해임 명령 하루 만인 1993년 3월9일 전역하는 김진영 육군대장. 같은 날 군복을 벗은 서완수 전 기무사령관은 자신의 정식 인사 발령장도 보지 못했다고 했다.

 


쫓아낸 김 총장을 국회의원 후보로 영입 시도

 

“육군총장과 기무사령관을 경질한 대통령은 후속 조치를 국방부 장관에게 일임했다. 하나회라면 진저리를 치는 권 장관과 김동진 신임 육군총장의 일처리가 어떨는지 짐작됐다. 한 육군 대령의 하나회 명단 살포 사건과 하나회 출신 장교들의 대통령 인사에 대한 비판 및 ‘일개 소장’ 출신 권 장관의 무차별 학살에 대한 비난 첩보 등은 권·김의 칼날을 더욱 시퍼렇게 만들었다(군 인사 관례상 국방부 차관은 중장 출신이, 장관은 대장 출신이 맡도록 돼 있는데 권 장관은 예비역 소장). 이건 아니다 싶어 대통령에게 진언했다. ‘하나회 출신이라는 이유로 똑똑한 영관 장교들까지 불이익을 주는 것은 곤란합니다. 선배들이 유능한 초급 장교들을 찍어 입회를 권해 들어갔을 뿐인데 어찌 그들에게 책임을 묻습니까. 이는 온당치 않고 여론도 좋지 않습니다’라고 했더니 대통령도 수긍했다. 나는 바로 다음 날 국방장관과 육군총장을 H 호텔 일식당으로 불러 파악한 문제점을 지적하고 시정을 당부했다. 이에 권 장관은 납득하는 눈치였으나 김 총장이 정색했다. ‘실장님은 군 내부 사정을 잘 모르시는 모양인데 여론을 따질 계제가 아닙니다. 우리한테 맡겨주시면 됩니다’라며 물러서지 않았다. 그러니 더 밀어붙일 계제가 못 됐다. 무리하지 말라고 주문한 뒤 자리를 떴다.” 하나회라면 이를 가는 김 총장 등의 반감과 과욕이 아까운 장교들마저 잃게 만들었고, 그로 인해 군의 정치적 중립을 확인시킨 하나회 숙군이라는 YS의 치적이 상처를 입게 됐다는 탄식이다.

 

김동진 총장이 당대의 소통령으로 불리던 대통령 차남 현철과 같은 경복고 동문이고 실제 김희상 국방비서관을 비롯한 경복고 출신들이 대거 득세함으로써 현철 개입설이 상당한데 현철은 지금도 무관함을 주장한다. 

 

“권 장관이나 김 총장이 현철씨와 자주 접촉했다는 첩보 보고는 많았다. 만나는 것을 직접 목격한 건 아니니 더 이상 말할 것은 아닌데, 아무튼 당선자 시절부터 YS에게 군 문제를 자문한 권 장관이 하나회에 대해 부정적 생각을 깊이 새겨줬고 여론에 민감한 YS의 지지를 받아낸 것은 분명하다.” 

 

당시를 회고하는 박 실장은 하나회 ‘무차별 학살’ 결과로 유능한 장교들의 희생과 함께 다른 부작용도 있었다고 했다. “권 장관을 안기부장에 임명하면서 후임 국방장관을 뽑아야 하는데 적임자를 구할 수 없었다. 대통령이 하달한 인선 기준은 ‘5·16, 12·12에 가담하지 않았고, 하나회 출신과 부정부패자는 안 된다’였는데 여기에 맞는 인물이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러다 나온 게 이병태 국가보훈처장이다. 그의 국가보훈처장 기용도 문민정부 출범 조각 때 보훈처장을 빠뜨린 게 뒤늦게 발견돼 갑자기 옮겨심기 식으로 이뤄진 것인데 국방장관 임명 때도 해프닝이 벌어졌다. 마땅한 장관감을 아직 못 찾았다는 보고를 받은 대통령은 이병태 처장을 임명하겠다고 나섰다. 이경식 경제부총리의 5촌 조카여서 그랬는지 그런대로 좋게 본 모양이었다. ‘이 처장은 하나회 출신이라 곤란하다’고 했더니 ‘괜찮다’고 했다. 아무래도 적임이 아닌 듯해 만류했지만 ‘진짜 하나회라면 왜 중장만 하고 예편했겠나’ 하며 임명을 고집했다. 그 이 장관은 기어이 ‘일산 신도시의 군사전략적 측면’ 발언으로 사달을 냈고, 발끈한 YS는 그를 호칭할 때면 ‘XX’라는 욕설을 빼먹지 않았다.” 

 

인사와 관련해 YS 특유의 고래 힘줄 같은 고집과 ‘시치미 떼기’를 말해주는 일화는 여럿이다. “청와대 비서실장을 그만두고 대통령 정치특보로 있던 1996년 일이다. 15대 총선을 앞두고 YS가 총재로 있는 신한국당은 고전을 면치 못했다(실제 선거 결과 신한국당은 선거 전 165석에서 26석이 줄어 139석으로 여소야대 신세가 됐다).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의 구속 여파로 대구·경북을 중심으로 한 보수표가 이탈하자 YS는 당황했다. 그러자 YS는 김진영을 부산에 출마시켜야겠다고 했다. 3년 전 자기가 쫓아낸 김 전 총장을 데려오라는 얘기다. 정말 YS다운 변신이었다. 황당했지만 지시도 있고 해서 연락을 취했더니 그는 기도원에 들어가 있었다. 기도원 퇴소를 기다릴 때 YS의 전화가 걸려왔다. ‘연락했나’라고 묻기에 ‘이리저리해서 아직 못했습니다’ 했더니 ‘잘됐다. 없던 것으로 하자’고 했다. 나중에 사유를 알아보니 며칠 전 MBC에서 12·12 관련 다큐멘터리가 방영됐는데 한 장면에 ‘김진영 대령’이 험하게 그려졌다는 것이다. 여론을 의식하는 YS는 이 대목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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