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게’ 일해도 생산성은 ‘높다’
  • 최정민│프랑스 통신원 (sisa@sisapress.com)
  • 승인 2016.02.16 15:01
  • 호수 13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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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가 ‘슈퍼 갑’인 프랑스…고용 시장 경직은 문제로 지적돼
2013년 3월 프랑스 파리에 있는 푸조 본사 앞에서 공장 폐쇄에 반대하는 노동자들이 시위를 하고 있다. © EPA연합

퇴근길 지친 몸으로 구입한 물건을 봉투에 담는 고객과 계산대에 편안하게 앉아서 고객을 바라보는 직원. 영화의 한 장면이 아니다. 전형적인 프랑스 마켓의 저녁 풍경이다. 프랑스 마켓에서 ‘갑’은 손님이 아니라 직원이다.

비단 마켓만이 아니다. 어딜 가나 직원이 먼저다. 프랑스 식당은 아무 때나 밥을 주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점심시간은 낮 12시에서 오후 2시, 저녁 식사 시간은 오후 7시에서 오후 10시로 정해져 있다. 이 시간을 제외한 시간은 재료 준비와 주방휴식 시간이다. 아무 때나 밥을 먹으려면 맥도날드나 샌드위치 가게, 또는 중국 식당을 찾아가야 한다. 택시를 탈 때도 운전자의 조수석은 기사 휴식 공간이다. 4명이 아닌 이상 조수석을 비워둔다. 성인 3명이 탑승해도 나란히 뒷좌석에 앉아야 한다. 관광의 도시 파리라 해서 관광객에게 ‘특전’을 기대한다면 오산이다. 1년에 700만명 이상이 올라간다는 에펠탑. 그곳 2층 전망대에 설치된 벤치들 중에는 ‘직원용’에만 난방기가 설치돼 있다. 심지어 직원이 없는 경우엔 ‘고객’이 앉지 못하도록 줄로 막아놓는다. 직원의 휴식 공간을 보장하기 위해서다. 직원의 권익을 철저히 보호한다.

시간당 평균 생산성 유럽연합 평균보다 높아

프랑스 특유의 노동자 중심 문화는 외국계 기업과 마찰을 일으키기도 한다. 2013년 미국의 타이어 전문 생산업체인 ‘타이탄 인터내셔널’의 모리스 테일러 회장은 프랑스인의 노동문화에 대해 “하루에 3시간밖에 일하지 않으며, 정부나 노조 모두 수다만 떤다”고 돌직구를 날려 화제가 됐다. 모리스 회장은 말뿐이 아니었다. 협상 중이던 타이어 공장 인수 계획까지 백지화해버렸다. 이에 대해 프랑스의 우파 일간 ‘르 피가로’는 프랑스 근로자의 평균 노동 시간과 생산성을 들며 조목조목 반박했다.

르 피가로가 인용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자료에 따르면, 2011년 프랑스 근로자는 주당 41.2시간을 일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웃나라 독일의 41.9시간과 영국의 42.8시간보다 적은 것은 사실이지만, 법정 근로 시간인 주당 35시간은 초과한 노동량이었다. 그리고 이렇게 ‘적게’ 일하지만 시간당 생산성에서는 37유로의 유럽연합(EU)과 41.4유로의 미국보다 높은 45.4유로를 기록했다. 2014년에도 프랑스는 미국에 뒤지긴 했으나 벨기에·룩셈부르크·아일랜드와 함께 선두 그룹에 속했다.

프랑스에서 노동자의 목소리가 큰 것은 노조가 강하기 때문이 아니다. 실제로 프랑스인의 노조 가입률은 평균 8%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국공립 기업의 경우 15%까지 올라가긴 하지만, 사기업의 경우 5%밖에 되지 않는다. 노조 가입률이 70%에 이르는 북유럽의 스웨덴이나 20%대에 이르는 이웃나라 독일에도 훨씬 못 미치는 수준이다. 그럼에도 노조의 행동에 ‘힘’이 실리는 이유는 프랑스인 모두 스스로를 노동자라고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폭력을 엄단하는 프랑스에서 과격한 시위가 종종 벌어지는 이유도 이러한 배경때문이다. 법적으로 처벌받을지는 몰라도 여론은 무언(無言)의 지지를 보내기 일쑤다. 지난해 발생한 에어프랑스 간부 폭행사건의 경우에도 대통령은 국가 이미지 실추를 우려했지만, 54%의 프랑스 국민은 폭력을 벌인 노조의 입장을 이해했다.

반골 기질이 있는 데다 노동자라는 인식이 더해져 프랑스는 파업과 시위가 잦고 길다. 1995년 연금 및 사회보장제도의 개혁안에 반발해 일어난 파업과 시위는 장장 4주간이나 이어졌다. 파업에 대한 프랑스 국민들의 피로감이 극도에 이르렀던 2003년, 우파 정부의 라파랭 총리는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거리가 아니다”고 일갈했다. 이 표현은 프랑스 정치사의 격언으로 회자됐고 파업과 시위의 기세가 한풀 꺾이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다시 불을 지른 것은 정부였다. 2005년 도미니크 드 빌팽 총리가 ‘해고’가 용이한 ‘최초 고용 계약법(CPE)’을 들고나온 것이다. 프랑스의 노동법에서 고용계약의 경우 CDI라고 하는 ‘무기한 정규 계약’이 원칙이다. 계약직에 해당하는 ‘기간제 계약(CDD)’도 존재한다. 그러나 CPE처럼 마음대로 해고할 수 있는 계약은 아니다. 노동 시장 유연화를 위해 최초고용 시 2년간 자유롭게 해고할 수 있다는 내용을 담은 이 법안은, 노동자나 노조보다 예비 노동자의 분노를 불러왔다. 바로 대학생과 청년이 들고일어난 것이다.

강한 ‘노동자 인식’ 때문에 파업·시위 잦아

프랑스 파리 에펠탑에 마련된 직원용 히터 의자. © 필자 제공

68혁명 이후 37년 만에 소르본 광장의 상점들이 시위대에 의해 파괴되고 전소됐으며 최루탄 연기가 대학가에 가득 찼다. 여론까지 돌아선 이 법안은 결국 철회됐고, 추진 당사자인 드 빌팽 총리는 사퇴와 함께 대권의 꿈까지 내놓아야 했다.

노동자 중심의 문화이니만큼 고용 시장이 경직돼 있는 것은 사실이다. 오죽하면 2014년 프랑스 출신의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장 티롤 교수마저도 프랑스 고용 시장의 유연화를 조언했을까. 프랑스의 금융전문가이자 경제 평론가인 마크 파오렌티노는 프랑스의 노동자가 너무나 ‘과보호’돼 있다고 경고한다. 프랑스에도 비정규직이라고 할 수 있는 계약직이 존재한다. 현재는 11% 수준이며, 임금이나 사회보장에서도 정규직과 똑같은 대우를 받는다. 또한 정규직을 대체하기 위해 비정규직을 고용하는 것도 엄격하게 금지돼 있다. 임금에 차별을 뒀을 경우에는 6개월 이하의 징역이나 3750유로의 벌금에 처해질 수 있다.

노동자 중심의 환경에 부작용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일하는 사람이 ‘갑’이다 보니 서비스가 나빠지는 경우가 발생한다. 여행전문 사이트의 조사를 인용한 CNN의 보도에 따르면, ‘세계 최악의 공항’에 관한 조사에서 파리의 보베 공항이 유럽의 최악의 공항으로 선정됐다. “지구상에 지옥이 있다면, 파리 보베 공항일 것”이라는 여행 전문가의 악평을 달았다. 그 이유에 대해 이 여행 전문가는 “이 공항엔 의자도 없지만 친절한 직원도 없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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