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관용 회고록] 전두환·노태우 처벌은 여론 의식한 결정
  • 박관용│前 국회의장, 정리=김현일 대기자 (.)
  • 승인 2016.02.04 11:29
  • 호수 13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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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 부담 때문에 피하던 YS도 결국…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 처리와 관련, 김영삼(YS) 대통령의 당초 구상은 처벌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당시 정국 상황이, 좀 더 엄밀하게는 여론이 YS의 마음을 바꾸게 했다.” 1995년 전·노 두 사람 구속 당시 YS 정치특보였던 박관용 전 국회의장의 회고다. 여론 추이를 예의주시하다 일단 결심이 서면 주저하지 않고 무섭게 몰아붙이는 YS 스타일이 여지없이 드러난 대표적 드라마라는 얘기다. 1995년 한국 사회뿐 아니라 전 세계 언론이 주목한 두 전직 대통령 구속 사태의 중심에는 이렇듯 ‘여론’이 있었다.

 

“수석회의에서 전·노 두 사람 문제에 대한 논의가 없지는 않았으나 YS 의중이 분명했기 때문에 그 이상의 논란은 없었다. 스스로를 군사(軍事)정권에 대치되는 문민(文民) 시대 기수를 자임하며 그에 대한 자긍심이 대단한 YS였지만 ‘현실’은 현실이었다. 민정당 등과 3당 합당으로 정권을 잡은 그의 집권 세력 내부에 군과 관련 있는 인사들이 상당했고. YS는 이런 현실을 현실로 수용한 것이다(‘좌파 스파이’라는 오해까지 받은 김정남 교육문화수석 정도가 부당성을 지적한 것으로 돼 있으나 대통령의 생각이 분명했으므로 1995년 여론이 비등할 때까지는 초반의 기조가 유지됐었다). 

 

전격적인 하나회 숙정으로 군을 평정·장악한 후 발표한 ‘5·13 특별담화’는 그 종합판이다. 특별담화는 신군부가 권력을 잡게 된 12·12 사태를 ‘쿠데타적 하극상’이라고 규정하면서도 전·노 두 사람에 대한 평가는 역사에 맡기자며 전직 대통령을 처벌할 수 없다는 입장을 확실히 했다. 이후 12·12로 지휘권을 뺏겼던 정승화 전 육군참모총장 등이 두 사람을 군 형법상 반란 및 내란 목적 살인 혐의로, 5·18 피해자들이 전·노를 비롯한 33명을 내란 및 내란 목적 살인 혐의로 각각 검찰에 고소했을 때 검찰이 취한 자세에는 YS의 시각이 그대로 투영돼 있다. 검찰은 12·12를 명백한 군사반란이라고 판단했지만 불필요한 국력 소모 우려를 이유로 기소유예 처분했다. 또 5·18 내란과 관련해서는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논리로 관련자들을 불기소 처분했다. YS가 전·노 두 사람을 포함한 전직 대통령들을 청와대 오찬에 초청했던 것도 이런 배경에서다. 

 

당시 비서실장이던 내가 전직 대통령들을 마중했고 말 상대가 됐었다. 전 전 대통령은 새 청와대 본관에는 처음 와본다며 이것저것을 물었고 노 전 대통령은 그럴 때마다 난감해했다(청와대 본관은 전 전 대통령 퇴임 3년여 후인 1991년 신축된 것으로, 그의 ‘처음 와본다’는 말에는 자신이 대권을 안겨준 노 전 대통령이 단 한 차례도 부르지 않은 비정함을 꼬집는 가시가 들어 있던 것). 전 전 대통령이 YS의 초청에 거듭 감사를 표함으로써 이날 오찬장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는데, 전 전 대통령은 노 전 대통령이 청와대를 떠나자 경내를 더 둘러보겠다며 남은 뒤에도 YS에 대한 덕담을 더해 YS와 전 사이는 언제냐 싶을 정도로 원만해 보였다.”

 

법정에 선 전 국가원수들 (1996년 8월 선고 공판). 천문학적 비자금 실체가 드러나자 여론은 들끓었고 ‘12·12 및 5·18’ 책임자 단죄로 이어졌다. ⓒ 사진 공동취재단

 


여론 악화되자 YS, 180도 급선회

 

이처럼 YS의 입장이 확고했음에도 ‘돌발 사태’가 처벌 쪽으로 상황을 몰아갔다는 게 박 전 의장의 설명이다. 여기서 돌발 사태란 ‘노태우 비자금 사건’을 말한다. YS의 집권 3년 차인 1995년 7월 검찰이 ‘성공한 쿠데타’라는 논리로 전·노 등에 대한 불벌(不罰) 의지를 공표했음에도 석 달 후 터져 나온 ‘노태우 비자금’ 흑막으로 인해 대통령은 새로운 ‘현실’을 수용해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것이다(야당 박계동 의원이 폭로한 자료가 원체 구체적인 데다 비자금을 전담해온 이현우 전 청와대 경호실장이 한 개의 인감으로 비자금 전체를 관리해왔기 때문에 천문학적 비자금 전모가 금세 드러났다. 따라서 노 전 대통령은 빠져나갈 구멍이 없었다).

 

“YS로서도 더 이상 기존 입장을 고수하기 어려웠다. 가뜩이나 기왕의 검찰 수사 결과에 대한 불만 여론이 고조돼 있는 상황에서 돌출한 ‘노태우 비자금’은 불에 기름을 부은 격이 됐다. 헌법재판소의 ‘검찰의 공소권 없음 처분은 부당하다’는 재정까지 나왔으니(일각에선 헌재의 이 같은 결정에도 여론과 ‘노태우 비자금’ 폭로가 큰 영향을 끼쳤다고 분석) YS가 소급입법, 특히 국가원수의 처벌을 위한 소급입법 제정의 무리함을 절감하면서도 5·18특별법 제정 수용을 시사하는 성명을 발표(11월24일)한 것은 불가피했다. 사태가 원체 심각했으므로 정책의 급선회에 따른 이견이나 청와대 내부 진통도 크지 않았다. 민정계의 불만을 어루만지고 할 계제가 못 됐다. 또 일단 궤도 수정 방침이 정해지자 전·노에 대한 단죄는 매섭게 진행됐다.”

 

이런 중대 사안이 180도 방향을 바뀐 배경에는 그 무렵의 정국 상황이 자리한다. 무엇보다 YS에 대한 국민 지지율이다. 당시(임기 3년 차 기준) 지지율은 20%로 역대 대통령 최하위. 임기 초반 하나회 숙청, 금융실명제 실시 등으로 역대 최고치인 90%까지 상회하던 지지율이 급전 추락한 데는 현철씨의 국정 농단 시비 등도 작용했으나 ‘5·18 관련’이 무엇보다 컸었다. 그 반전을 위해서라도 기존의 입장을 뒤엎는 논리 개발과 더불어 ‘구속’이라는 극약 처방이 필요했던 것. 실제 전·노 구속·수감 이후 YS 지지율은 급상승, 2배가 넘는 41%를 기록했다. 역시 여론을 잘 읽는 YS였고, 그가 이후 전·노 두 사람을 ‘밟는 데’ 앞장선(?) 게 우연이 아니라는 진단이다.

 

“전직 대통령 구속은 어떤 이유로라도 국가적 비극이다. ‘노태우 비자금’ 사건 등 당시 상황이 그렇고, 따라서 YS로서도 달리 선택할 여지가 없었지만….” 의회주의자인 박 전 의장의 아쉬움 섞인 독백이다. 전·노 두 사람을 감옥에 보내고 사형 선고까지 받게 만든 YS는 이듬해인 1996년 2월 군사정부의 체취를 아주 털어낸다는 명분하에 민주자유당 당명을 ‘신한국당’으로 개명했다. 

 

하지만 대가는 톡톡히 치렀다. 두 달 후 실시된 제15대 총선에서 YS의 여당은 무참히 깨졌다. 선거 전 165석이 139석으로 쪼그라들면서 여소야대 정치 지형을 낳았다. 한때 정계의 주류를 이뤘던 군 출신과 TK(대구·경북)는 별개가 아니었고, 그 반발의 중심 세력이 김종필 총재 주도의 자민련에 대거 가세한 결과였다. 단기적으로는 김대중(DJ) 대통령 집권을 가능케 했고, 중·장기적으로는 TK와 PK(부산·경남) 갈등 구조를 고착시키는 계기가 된 것이다. 전·노 구속은 명분과 현실의 괴리가 무엇인지, 어떤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지 등을 여실히 말해주는 산 역사다.

 

 

나라 체통 깎고 혼란 더하는 빗나간 ‘대통령 문화’  
 

YS에 의해 감옥에 갔던 전·노 두 전 대통령의 YS에 대한 감정이 어떨지는 굳이 말할 나위가 없다. 우리 눈에 익은, 전직 대통령들이 함께하는 자리에서의 어색하고 냉랭한 모습은 약과다. YS는 전·노 두 사람이 충분히 알아들을 만한 거리에서 “저그들은 대통령도 아니다. 죽어서도 국립묘지에도 못 간다. 그런데 왜 불렀노” 하며 노골적으로 모욕을 안기는가 하면 전 전 대통령이 와인을 더 주문하자 혼잣말처럼 하기는 했지만 “청와대에 술 처먹으러 왔나” 하는 막말 수준의 언사도 서슴지 않았다(이명박 대통령 초청 오찬). 이에 전·노 측은 YS가 ‘체’만 했지 국정을 제대로 못 챙겨 국가 부도(IMF) 사태를 불러왔다고 매도했다. 이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선 게 DJ다. YS의 영원한 정적인 DJ는 전 전 대통령이 1980년대 초의 어려운 나라 경제를 살려냈다는 말로 YS의 심기를 건드렸다. 그러자 전 전 대통령은 DJ가 10차례나 전직 대통령들을 청와대에 초청했다면서 국가 원로의 조언에 귀 기울일 줄 아는 DJ야말로 진정한 지도자라고 받았다. ‘전직 국가원수를 위할 줄 아는 범절 있는 인물’이라는 얘기는 YS를 빗댄 것이다. 북한 핵실험이 실시된 직후인 2006년 10월, 노무현 대통령이 전직 대통령들을 청와대에 초청했을 때 YS가 작심한 듯 “역사의 죄인인 DJ와 노 대통령은 국민 앞에 사죄해야 한다”고 일갈한 것이나 이를 DJ가 정면으로 치받고, 전 전 대통령이 “국가위기 상황에서 우리끼리 다투면 되겠느냐. 그만 좀 하라”고 거든 일화 등은 딱한 대통령 문화의 단면이다. 그 시정에 국민들이 나설 여지는 없는지에 대한 고찰과 함께 노무현 전 대통령의 투신 자살, 이명박 전 대통령 주변에 대한 집중 수사 등 후임 대통령 치하에서 반복되는 씁쓸한 장면들은 나라 체면과 발전을 위해서도 숙고할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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