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해자도 모르는 협상, 도대체 어느 나라 외교부냐
  • 조해수 기자 (chs900@sisapress.com)
  • 승인 2016.01.06 15:14
  • 호수 13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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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위안부 합의 발표 후폭풍…피해자 청구권 소송에도 영향 미치나
2015년 12월28일 한·일 외교장관 회담이 열린 서울 종로구 중학동 주한 일본대사관 앞 위안부 소녀상 너머 뉴스 전광판에 일본군 위안부 협상 타결 소식이 전해지고 있다. © 연합뉴스

“조선의 딸로 곱게 자란 것밖에 죄가 없는데 위안부를 만든 일본은 아직까지 오리발을 내밀고, 우리 정부는 오히려 우리를 두 번 세 번 죽이고 있다.”

12월30일 열린 2015년 마지막 수요집회(제1211차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정기 수요집회)에서는 울음에 가까운 절규가 터져 나왔다. 12월28일 타결된 한·일 위안부 문제 협상 이후 처음으로 열린 수요집회는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 관계자, 대학생과 청소년 등 참가자 1000여 명과 수많은 취재진으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집회는 2015년 세상을 등진 9명의 일본군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의 추모제까지 더해져 어느 때보다 엄숙했다. 정부에 등록된 일본군 위안부 피해 할머니 238명 중 남은 생존자는 이제 46명밖에 없다. 구슬픈 대금 연주를 시작으로 고(故) 이효순 할머니의 아들이 준비한 ‘어머니께 보내는 편지’와 각계각층의 추모사가 이어졌다. 이효순 할머니의 “날 잊지 말고 내 원한이 풀릴 때까지 기억해달라”는 유언에 화답하듯 20여 명의 이화여고 학생들이 집회에 참석해 <벗이여 해방이 온다>와 <솔아솔아 푸르른 솔아>를 부르고 ‘할머니 힘내세요’라는 피켓 퍼포먼스를 하기도 했다.

추모제의 비통함은 곧 한·일 위안부 문제 협상에 대한 분노로 바뀌었다. ‘진상규명, 사실 인정, 공식 사죄, 법적 배상’이 적힌 피켓과 함께 “한·일 위안부 협상은 졸속 합의, 굴욕적 야합의 결과물”이라는 구호가 메아리쳤다. 영하의 날씨와 고령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집회에 참석한 이용수·길원옥 할머니는 “끝까지 일본에 공식적인 사죄와 법적인 배상을 요구할 것이다. 귀가 먹었으면 귀를 뚫고, 눈이 멀었으면 눈을 뜨게 하겠다. 238명 모두의 한을 풀어주기 위해 끝까지 싸울 것”이라며 “우리 정부는 피해자가 없는 협상을 진행했다. 협상 전에 아무것도 우리에게 알리지 않았다. 그래놓고 외교부 차관이 뻔뻔하게 위안부 피해자들 앞에 나타났다. 외교부는 도대체 어느 나라의 외교부냐”고 울분을 토했다.

외교 능력도 국제 정세 판단도 미흡

실제로 이번 한·일 위안부 문제 협상은 ‘번갯불에 콩 볶는 듯’ 급작스레 이뤄졌다. 이는 박근혜 정부의 미숙한 외교 능력과 국제 정세에 대한 잘못된 판단에 기인하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대일(對日) 강경 노선을 고집하다 대일 협상력을 스스로 잃어버린 것은 물론 미국의 동북아 안보 전략에 반하는 움직임을 보임으로써 대외적인 입지도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박근혜 정부는 출범 초기 강공 일변도의 대일 외교를 펼쳤다. 2013년 2월 일본이 ‘다케시마의 날’ 행사에 중앙정부 인사를 처음으로 파견하자 박 대통령은 3·1절 기념행사에서 취임 후 첫 대일 메시지로 “일본은 역사를 올바르게 직시하고 책임지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며 일침을 놓았다. 2013년 말 아베 일본 총리가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했을 때에도 “국제사회의 보편적 가치와 기준, 인류사회의 양심에 맞지 않는 행동을 반복한다면 일류국가로 평가받을 수 없다”며 대일 강경 노선을 견지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박근혜 정부는 아베 총리의 수차례에 걸친 정상회담 요청에 대해 ‘일본 정부의 진정성 있는 사과와 책임 있는 조치’를 전제하며 불가 입장을 반복해왔다.

그러나 박근혜 정부의 대일 강경 정책은 한·일 국교 정상화 50주년을 맞는 2015년 급변하기 시작했다. 박 대통령은 그해 6월 미국 워싱턴포스트와 가진 인터뷰에서 “위안부 문제에 있어 상당한 진전이 있었으며 현재 협상의 마지막 단계에 있다”고 발언하며 연내 타결을 강조했다. 이에 발맞춰 11월2일 3년 6개월여 만에 한·일 정상회담이 열리면서 위안부 문제의 조속한 타결에 합의했다. 해가 바뀌기 두 달도 채 남지 않은 시점이었다. 여기에 박 대통령에 대한 명예훼손 혐의로 기소된 일본 산케이신문 서울지국장이 12월17일 무죄를 선고받고, 같은 달 23일 헌법재판소가 한일청구권협정에 대한 헌법소원을 각하한 것 역시 위안부 문제의 연내 타결에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또한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견고한 한·미·일 3국 동맹이 필요했던 미국으로선 박근혜 정부의 대일 강경 정책이 탐탁할 리 없었다. 실제로 2015년 2월 웬디 셔먼 당시 미국 국무차관은 “동북아 지역에서 민족감정이 여전히 악용되고 있다. 정치 지도자가 ‘과거의 적’을 비난함으로써 값싼 박수를 얻는 것은 어렵지 않다. 과거의 적을 비난하는 것은 도발”이라며 일본의 손을 들어주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미국 측의 이런 입장 역시 한·일 위안부 문제 협상 조속 타결의 배경이 됐을 것이라는 분석이 제기되고 있다. 결국 2년여 간 지속된 박근혜 정부의 대일 강경 정책은 ‘빈 수레만 요란했던 셈’이다.

2015년 12월28일 윤병세 외교부장관과 기시다 후미오 일본 외상이 서울 종로구 도렴동 외교부 청사에서 외교장관 회담을 마치고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 시사저널 박은숙

“한·일, 사법부 판결 존중하면 과거사 해결”

이번 한·일 위안부 문제 협상의 가장 큰 문제점으로 지적되는 것은 일본 정부가 위안부 강제 동원에 대한 법적 책임을 명시하지않았다는 데 있다. 이번 협상에서 한·일 양국 정부는 위안부 문제를 “최종적으로 불가역적으로 해결했다”고 합의했다. 법적책임에 대한 논쟁은 더 이상 없다는 점을 못 박은 것이다.

이와 같은 일본의 입장은 단순히 위안부 문제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아시아태평양전쟁희생자 한국유족회는 “일본 위안부 협상은 일제 식민 지배하에 일어났던 아시아태평양전쟁 전후 처리에 관한 문제들이다. 위안부 피해는 강제 동원 피해의 상징적 문제인 것이다. 여기에는 군인·군속, 노무자, 사할린 강제 억류자, 원폭 피해자 등 전후 처리에 관한 산적한 현안들이 포함돼 있다”면서 “아베 총리는 군 위안부뿐만 아니라 일제 강제 동원을 인정하고 한국 노무자 미수금 문제, 우키시마 호 폭침 사건 등을 해결할 대책을 내놓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와 같은 주장에 대해 일본 측은 항상 한일청구권협정을 방어책으로 내놓고 있다.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일본 외상은 12월28일 공동기자회견 후 일본 기자들과 만나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과 관련한 입장 변화는 없다”면서 한일청구권협정에 따라 위안부 문제 등에 대한 일본정부의 법적 책임은 완전히 끝났다고 밝힌 바 있다. 1965년 체결된 한일청구권협정 제2조 1항을 보면 ‘양 정부는 물론 법인을 포함한 국민의 재산·권리·청구권에 관한 문제가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된 것이 된다는 것을 확인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한일청구권협정으로 ‘개인 청구권’ 역시 소멸됐다는 것으로, 이번 협상에서 나온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이라는 문구 역시 한일청구권협정에 기인한 것이다. 그러나 한일청구권협정은 애초부터 ‘실체가 없는 신화’에 불과하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1965년 한일기본관계조약은 한·일 양국 간에 의사의 일치를 보지 못한 실질적 불일치 부분과 형식적 처리상에 근본적인 문제점을 남겼다. 이와 관련해 일본 기업을 상대로 한 강제 징용 피해자들의 청구권 소송을 대리하고 있는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의 최봉태 변호사는 “삼권분립이 된 법치주의 국가에서 조약이나 협정의 최종적 해석 권한은 외교 당국이 아닌 사법부 특히 최고법원에 있다”면서 “일제 피해자들의 지난 40여 년간 한·일 사법부 법적투쟁이 남긴 최대의 성과는 한일청구권협정이 피해자 구제에 어떠한 법적 장애물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밝혔다는 점이다”고 강조했다. 한·일 양국의 최고법원이 개인의 청구권이 여전히 유효하다는 점을 인정했다는 것이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2007년 4월27일 일본 최고재판소의 니시마쓰 판결이다. 최고재판소는 중국인 강제 노역자들이 전범 기업인 니시마쓰건설을 상대로 한 손해배상 재판과 관련해 “1972년 중일선언(‘중화인민공화국 정부는 중·일 양국 국민의 우호를 위해 일본에 대한 전쟁 배상청구권을 포기한다’)에도 불구하고 피해자들이 기업을 상대로 청구할 수 있는 손해배상 청구권은 여전히 유효하다”며 자발적 해결을 권고했다. 이와 관련해 최 변호사는 “국제인도법상 중대한 위법행위인 일본군 위안부나 강제 동원 피해에 대해 일본 정부의 책임을 강제하지 않은 것은 비판받을 수 있으나 새로운 입법 등에 의해 정부가 자발적으로 보상하는 것은 아무 문제가 없다는 것이 확인됐다”면서 “이는 일본 사법부가 개인 청구권이 여전히 살아 있다는 것을 인정한 판결”이라고 설명했다. 이에 발맞춰 우리나라 대법원도 2012년 “청구권협정 협상과정에서 일본 정부는 식민 지배의 불법성을 인정하지 않은 채 강제 동원 피해의 법적 배상을 원칙적으로 거부하였으므로 이와 관련한 개인의 손해배상 청구권은 소멸되지 않았다”고 밝혔다. 대법원의판결은 개인 청구권이 살아 있다고 본 일본 최고재판소와 동일할 뿐만 아니라 일본 측이 자발적으로 이행하지 않고 있는 것에 대해 강제성까지 부여한 것이다.

2015년 12월30일 서울 종로구 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린 ‘1211차 수요집회’에서 참가자들이 일본 정부의 공식 사죄를 촉구하고 있다. © 시사저널 최준필

일본, 피해자 분할 전략으로 법적 배상 최소화

2015년 9월8일 일본 최고재판소가 한국인 원폭 피해자 1세대들에게 치료비를 지급하라고 판결한 것도 궤를 같이하고 있다. 치료비는 손해배상의 출발점이다. 일본 피폭자지원법은 사회보장적 성격뿐만 아니라 국가 보상적 성격을 띠고 있다는 점을 감안할 때, 보상청구권이 한일청구권협정에 의해 소멸되지 않았다는 것을 전제로 치료비 지급 판결을 내린 것으로 볼 수 있다. 최 변호사는 “일본 정부가 (일제 식민 지배 당시) 우리나라의 한센병 환자들에게 보상을 해주고 있다. 이 역시 개인 청구권이 살아 있다는 것을 일본 정부 스스로가 인정하는 것”이라면서 “그러나 일본군 위안부 문제등에 대해서는 한일청구권협정을 들먹이며 이중적인 플레이를 하고 있다. 일본 정부가 피해자 분할 전략을 쓰고 있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위안부 문제나 원폭 피해자, 한센병 환자, 강제 징용자들의 법적 보상 문제는 큰 틀에서 같은 범주에 있다는 것이 법조계의 중론이다. 원폭 피해자들의 손을 들어준 일본 최고재판소의 판결은 위안부 배상문제와 직결될 수 있다는 것이다. 모두 일제 식민지 당시의 불법성에 관한 개인의 손해배상 청구권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는 단지 우리나라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관한 한·일 양국 간의 해결책은 중국에 있는 위안부들에게도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최 변호사는 “중국이나 필리핀 등 해당 정부의 관심이 약한 국가의 피해자들에 대한 인도적 지원과 자료 공유 등은 필수적이며 진상규명을 위한 국가 간의 협력도 중요하다”며 “일본 정부는 위안부 문제 등 과거사 청산을 위한 회담에서 비밀주의를 주장하며 피해자들에 대한 정보공개나 참여를 제한하고 있다. 이는 개인의 법적주체성을 부정하는 것으로 일본의 법치주의와 민주주의의 미성숙을 잘 보여준다”고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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