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 방송에 선전포고한 손안의 ‘한 입 콘텐츠’
  • 하재근 | 대중문화 평론가 (.)
  • 승인 2015.12.24 19:08
  • 호수 13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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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마트핑거 콘텐츠’와 ‘스낵 컬처’ 등 웹 플랫폼 기존 방송 플랫폼 위협

9월3일, 대한민국 톱 MC 중의 한 명인 강호동의 신작 예능이 발표됐다. KBS를 퇴사한 후 최고의 주가를 올리고 있는 나영석 PD와 함께 하는 <신서유기>였다. 이 작품에는 강호동뿐만 아니라 예능·드라마·대중가요 등 각 부문에서 정상의 자리에 서 있던 이승기도 출연했다. 거기에 이수근, 은지원까지 가세하며 과거 <1박 2일> 전성기 시절의 베스트 멤버가 꾸려졌다. 이 정도라면 어느 지상파 방송사의 주말 예능 편성이라고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수준이었다.

하지만 <신서유기>는 기존 방송사에서 방영되는 작품이 아니었다. 지상파는커녕 케이블TV나 종편에서조차 방영되지 않았다. <신서유기>는 ‘네이버TV’라는 인터넷 서비스를 통해 짧은 동영상 형태로 공개되는 프로그램이었다. 바로 이 점이 업계에 충격을 줬다. 최고의 스타들이 지상파가 아닌 케이블TV로만 가도 뉴스가 될 상황인데, 방송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인터넷 동영상으로 신작을 발표한 것이다.

이것은 패러다임 전환의 신호탄으로 여겨졌다. 언젠가 인터넷이 기존 방송사들의 영역을 침범할 것이라 생각됐지만, 그 언젠가가 정확히 언제가 될지는 아무도 몰랐다. 그리고 나영석 PD의 신작이 웹 플랫폼을 통해 발표되는 순간은 그 ‘언제’가 바로 지금, 여기 닥쳐왔다는 신호탄이 됐다.

ⓒ 시사저널 이종현

<신서유기> 광고 매출만 대략 25억원

이미 한국콘텐츠진흥원은 2015년 초 올해의 문화 트렌드로 ‘스마트핑거 콘텐츠’를 꼽았다. 스마트핑거 콘텐츠란 인터넷에 접속한 스마트 기기를 통해 손가락 하나로 클릭해 감상하는 콘텐츠를 뜻한다. 인터넷을 통해 대중문화 콘텐츠를 감상하는 형태가 대중문화계의 새로운 주류가 될 것이란 예측이었다. <신서유기>로 그 예측은 현실이 됐다.

<신서유기>는 당초 목표이자 손익분기점이었던 2000만 조회 수를 훌쩍 뛰어넘어 국내 조회 수만 5200만 건을 기록하는 대기록을 세웠다. 물론 이것이 기존 방송사들을 완전히 대체할 정도의 숫자는 아니다. 방송사들의 주말 예능 프로그램은 여전히 범국민적인 화제를 만들어낸다. 하지만 중요한 건 가능성을 확인했다는 데 있다. 방송사를 통하지 않고서도 인터넷만으로 스타급 연예인들의 프로그램 활동이 가능하다는 그 가능성 말이다. <신서유기>는 중화권에서도 인기를 끌어 새로운 한류 플랫폼의 가능성까지 열었다. 클릭 1회당 3~4원이었던 온라인 영상 광고 단가는 <신서유기>에서는 25원으로 올라갔다. 한국 네이버TV와 중국 QQ닷컴을 통해 나온 정식 조회 수가 1억 건 정도이기 때문에 클릭 광고 매출만 대략 25억원으로 추정된다. 여기에 PPL 광고 수입까지 있다.

이제 방송업계는 인터넷을 진지하게 바라보기 시작했다. 인터넷 시장은 그동안 막연히 크다고 인식됐지만 뭔가 실체가 보이지 않는 원시림 같은 느낌이었다. <신서유기>는 바로 그 미지(未知)의 공간에 깃발을 꽂고 길을 열었다. 앞으로 더욱 많은 사람이 그 길로 갈 것이고, 통행인이 많아질수록 길은 더욱 넓어질 것이다. 당장 나영석 PD부터 인터넷을 통한 차기 작품 활동을 적극적으로 고려하고 있다는 말이 흘러나온다. 백상예술대상에서 최고의 상인 대상을 받은 PD가 인터넷으로 신작을 발표하는 시대가 성큼 다가온 것이다.

스마트핑거 콘텐츠의 약진은 그것이 짧고 재미있기 때문에 가능했다. 나영석 PD는 <신서유기> 제작발표회장에서 이렇게 말했다. “딱히 의도적인 장치를 사용하지 않고 재미만을 생각했습니다. 한 회에 10분짜리 클립 5개를 내보낼 생각입니다. 짧은 시간 가볍게 자신을 내려놓고 편하게 즐기셨으면 합니다.”

만화도 드라마도 소설도 이젠 ‘한 입 사이즈’

기존 방송사들의 프로그램처럼 한 시간 단위가 아닌 10분 단위로 끊어진 영상을 재미 위주로 만들어 공개하겠다는 이야기였다. 이렇게 짧고 재미있는 콘텐츠를 ‘스낵 컬처(Snack Culture)’라고 한다. 스마트핑거 콘텐츠 신드롬의 핵심은 바로 스낵 컬처에 있다. 마치 과자를 집어먹듯 가볍게 즐길 수 있는 문화라는 뜻이다. 스낵 컬처 붐은 사실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인터넷 보급과 함께 서서히 전개됐던 것이 스마트폰과 맞물려 대폭발을 일으킨 것뿐이다. 모든 사람이 스마트폰을 들고 다니며 손가락 조작으로 가볍게 콘텐츠를 즐길 수 있게 돼서다.

이 손가락 조작으로 선택되는 ‘스마트핑거 콘텐츠-스낵 컬처’의 조합은 대중문화산업의 지형을 흔들고, 한국인의 생활문화를 바꿀 정도로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 바야흐로 문화 콘텐츠를 과자처럼 즐기는 시대로 진입했다. 이것은 외국에서도 나타나는 현상이다. 스낵 컬처라는 말 자체가 2007년 미국의 IT(정보기술) 전문 잡지인 ‘와이어드’에서 처음 사용됐다. 당시 이 잡지는 “미디어뿐 아니라 다양한 영역에서 ‘한 입 사이즈’로 구성된 포맷이 중요한 문화 코드가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한 입 사이즈란 짧은 시간에 간편하게 볼 수 있는 분량이란 뜻이다.

스낵 컬처 현상의 징후는 PC통신 시절에 이미 나타났다. 기존의 문학작품처럼 진지하거나 무겁지 않은 통신문학이 등장한 것이다. 간단하고 재미있는 이야기들을 맞춤법까지 무시해가며 에피소드 나열 형식으로 올린 게시물들이 인기를 끌었다. ‘귀여니’라는 인기 통신문학 작가가 탄생했고, 통신 연재를 원작으로 영화  <엽기적인 그녀>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그 이후부터 인터넷에선 가볍고 자극적인 콘텐츠들이 주류를 이뤄왔다.

그 대표적인 것이 웹툰이다. 웹(web)과 만화(cartoon)를 합친 말로, 인터넷에 게시되는 만화를 일컫는 웹툰이 인기를 끌면서 만화 가게와 만화 대여점 전성시대는 종말을 고했다. <순정만화> <미생> <마음의 소리> <은밀하게 위대하게> 등의 성공으로 이제는 웹툰이 대중문화 생태계의 중심이라는 말까지 듣게 됐다. 웹툰이 드라마나 영화의 원작이 되면서 대중문화계 기획자들이 웹툰 시장에 집중했기 때문이다. KT경제경영연구소는 국내 웹툰 시장이 2013년 1500억원 규모에서 2015년에는 약 2950억원 규모로 성장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스낵 컬처 웹툰은 또 다른 스낵 컬처로 연결된다. 웹툰이 10분 미만의 모바일 영화로 제작되면서 동영상 스낵 컬처로 변신하기 때문이다.

소설도 스낵 컬처의 또 다른 영역으로 포섭됐다. 앞서 언급했던 PC통신 문학은 이제 웹소설로 진화했다. 네이버 웹소설 서비스는 2013년 이후 총 36억 회가 넘는 조회 수를 기록했다. 2000년에 웹소설 사이트로 창업한 ‘조아라’는 2014년 70억원 이상의 매출을 달성했다. 네이버에서만 한 해 1억원 이상 수익을 올린 작가가 7명 이상 나왔다. KT경제경영연구소는 2015년 웹소설 시장을 400억원 규모로 예상했다. 이제는 시(詩)도 한두 문장으로 짧아져 인터넷으로 보다 보니 하상욱 시인 같은 SNS(소셜 네트워크 서비스) 스타 시인이 등장했다.

웹드라마도 인기다. 보통 한 회당 제작비 2000만원 내외에 10~15분 정도 분량으로 제작되는데 2010년 처음 선보인 이후 답보 상태였던 조회 수가 최근에는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중이다. 100만 건 정도는 뉴스도 안 될 정도다. 아이돌그룹 엑소(EXO)를 내세운 <우리 옆집에 엑소가 산다>는 1700만 건, 동방신기 유노윤호가 주인공으로 등장한 <당신을 주문합니다>와 산다라박·강승윤의 <우리 헤어졌어요> 등은 1300만 건을 기록하며 화제를 모았다. 해외에서도 인기를 끌어 <방과 후 복불복>은 중국 포털 사이트 ‘소후닷컴’에서 조회 수 1000만을 돌파했다.

요즘엔 오히려 아이돌들이 웹드라마 제작에 적극적이다. 점점 이런 작품이 많아지면서 웹드라마만의 독특한 제작 문법도 발달하고 있다. TV가 아닌 스마트폰을 통해 보는 것이고, 이동 중이나 쉬는 시간을 이용해 잠깐잠깐 볼 때가 많기 때문에 그에 맞는 기법이 필요해서다. 나영석 PD도 <신서유기>를 제작할 때 스마트폰 시청을 고려해 자막을 TV 프로그램보다 단순하게 만들었다고 했다. 한국에서 이런 인터넷 영상에 대한 제작 노하우를 확립하면 또 다른 한류로도 연결될 수 있다.

기업에서도 홍보를 위해 웹드라마 제작에 나섰다. 삼성이 만드는 웹드라마 의 출연진이 쇼케이스 행사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 연합뉴스

디지털 제작 집단까지 만든 CJ E&M

이런 스낵 컬처들은 기업 홍보에도 활용된다. 삼성의 웹드라마 <최고의 미래>는 조회 수 1000만을 돌파했고, 속옷 브랜드 비비안이 조인성을 내세워 만든 웹드라마 <시크릿 하우스 메이트>도 화제를 모았다. 웹드라마는 아니지만, 아모레퍼시픽은 소녀시대 윤아를 내세운 ‘꽈당’ 영상으로 주목을 받았는데, 이렇게 짧고 재미있는 영상을 모은 네이버TV가 요즘은 인기를 끈다. 네이버TV는 기존 방송 프로그램도 3분 정도 길이로 잘게 잘라 스낵 컬처로 서비스한다. 2014년 네이버TV의 총 재생 횟수는 13억 건이었지만, 2015년 들어서는 10월에 이미 48억 건을 돌파했다. 이런 흐름 속에서 CJ E&M이 나영석 PD를 내세워 제작한 <신서유기>를 방송사가 아닌 네이버TV라는 인터넷 플랫폼을 통해 웹 예능으로 선보인 것이다. CJ E&M은 ‘tvN go’라는 디지털 제작 집단도 만든 상태다.

네이버와 다음카카오 등 포털 사이트는 스낵 컬처에 더욱 힘을 싣고 있다. 앞으로 좀 더 많은 네티즌이 스마트폰을 통한 스낵 컬처 감상에 시간을 쓸 것이다. 이건 기존 미디어를 접할 시간이 짧아진다는 이야기다. 지상파 방송사는 이미 케이블 채널과 종편이라는 위협을 만났지만, 진정한 위협은 이제 시작일지도 모른다. 스낵 컬처로 중무장한 인터넷이 기존 방송 플랫폼을 통째로 위협하면서 대중문화의 새로운 플랫폼으로 떠오르고 있기 때문이다. 올해 <신서유기>는 그 시작이었고, 내년엔 더욱 많은 화제의 웹 예능, 웹드라마가 탄생할 것으로 전망된다. 플랫폼 전쟁은 이미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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