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문명을 헬레니즘 세계로 확장
  • 김경준 | 딜로이트 컨설팅 대표 (.)
  • 승인 2015.12.24 18:51
  • 호수 13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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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드로스, 페르시아 점령…동서 융합과 다문화 정책 펼쳐

그리스 세계의 맹주였던 테베와의 전투에서 승리하고 코린토스 동맹을 결성해 새로운 지배자로 떠오른 필리포스는 치국(治國)에는 성공했지만 제가(齊家)에는 실패해 허망하게 죽었다. 그는 조강지처 왕비이자 알렉산드로스 왕자의 생모인 올림피아를 버리고 부하인 아탈로스의 딸 에우리디케와 결혼했다. 결혼식 피로연에서 사돈이 된 아탈로스가 필리포스 왕통의 적자 탄생을 기원하는 축배를 제안했고, 격분한 알렉산드로스가 술잔을 집어던졌다. 이 광경을 본 만취한 필리포스가 칼을 빼서 아들을 찌르려다 넘어지자 알렉산드로스는 “유럽에서 아시아로 건너가려 하면서 침상 하나 건너지 못한 자의 꼴을 보라”고 소리쳤다는 일화가 전해질 정도로 일촉즉발의 험악한 분위기였다.

올림피아가 아들 알렉산드로스를 데리고 고향인 에페이로스로 돌아가버리자 필리포스는 전 왕비의 남동생인 에페이로스 왕을 달래기 위해서 자신의 딸과 결혼시키려 했으나, 필리포스는 결혼식 당일 식장에 입장하다가 마케도니아의 귀족 젊은이에게 살해됐다. 살인자는 체포돼 처형됐지만 배후는 미궁에 빠진 가운데 올림피아와 알렉산드로스는 신속하게 마케도니아로 돌아와 권력을 장악했다. 20세에 왕위에 오른 알렉산드로스는 부왕 암살의 죄목으로 반대파를 대대적으로 처형하고 새 왕비와 어린 왕자도 죽여서 후환을 없애버렸다.

B.C. 4세기 그리스 회화를 로마 시대에 모자이크로 만든 작품, 페르시아와 이수스 전투에서 싸우는 알렉산드로스. ⓒ Wikipedia

알렉산드로스, 테베를 패망시키고 그리스 평정

마케도니아 왕실의 내부 혼란은 수습됐지만 대외적으로는 사면초가였다. 패권자 필리포스가 암살당했다는 소식에 그리스 전역은 환호했고 즉각 행동에 나섰다. 북동쪽의 트라키아, 서북 방면의 일리리아를 포함해 코린토스 동맹의 그리스 폴리스들이 반기를 들기 시작했고, 테베와 아테네는 반(反)마케도니아 세력들을 규합했다. 알렉산드로스는 남쪽의 테살리아가 반란을 일으키자 서둘러 남하해서 제압했고 뒤이어 테베와 아테네를 공격해 항복을 받아냈다. 트라키아와 일리리아에서 일어난 반란을 도나우 강 건너까지 진격해 평정하는 와중에 페르시아는 그리스의 자국 공격을 사전에 무력화시키려고 아테네를 비롯한 주요 폴리스에 은밀히 사절을 보내 원조를 제공하고 있었고, 공교롭게 알렉산드로스가 일리리아 전투에서 전사했다는 풍문까지 돌았다. 이에 고무된 테베가 다시 반란을 일으킨 후 인근의 마케도니아 부대를 공격해 승리하면서 궁지에 몰린 알렉산드로스는 일리리아에서 군대를 이끌고 테베까지 400㎞를 2주 만에 주파해 공격에 나섰다. B.C. 335년 9월 초, 격렬한 공방전 끝에 함락된 테베는 도시 전체가 폐허가 되면서 6000명이 학살됐고, 살아남은 주민 3만명은 모두 노예가 됐다. 테베를 패망시키고 그리스 전역을 평정한 알렉산드로스는 부왕 필리포스를 이어 그리스의 지배자로 공인받았다. 1년에 걸친 전쟁에서 그는 탁월한 전술 능력, 대담한 결단력, 신속한 행동 등 군사적 역량을 선보였고, 이는 이후 페르시아 원정의 실전 연습이 됐다.

당시 오리엔트의 지배자 페르시아는 오늘날 이집트에서 시리아, 터키, 이란에 걸친 넓은 영토의 풍요로운 제국이었다. 다민족을 포용하는 개방 정책과 관대한 통치로 반란도 없이 안정을 유지했으나, B.C. 4세기에는 연이은 내분으로 약화된 상태였다. 특히 B.C. 401년 페르시아 왕의 동생이 왕위를 탈취하려고 반란을 일으켰을 때 그리스인 용병 1만명이 1년 동안 내전에 참가했고, 이들을 통해서 강국 페르시아가 실제로는 결속이 느슨한 약체라는 사실도 알아챘다.

또한 아테네의 문필가 이소크라테스(B.C. 436~338)는 그리스의 빈곤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페르시아가 지배하는 아시아를 정복해야 한다고 주장해 지지를 얻었다. 이런 배경에서 좁고 척박한 마케도니아를 기반으로 그리스 맹주 자리를 차지한 필리포스나 알렉산드로스 입장에서 페르시아 정복이라는 기치를 내걸어 내부 결속을 다지고 리더십을 확보하려는 방향은 자연스러운 귀결이었다.

알렉산드로스, 과음 후 고열 시달리다 사망

알렉산드로스는 B.C. 334년 보병 3만명, 기병 5000명으로 원정에 나섰다.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왕은 소아시아를 방어하기 위해 4만명의 군대를 편성해 헬레스폰토스 해협 근방의 그라니코스에서 맞붙었다. 서전에서 패배한 페르시아는 60만 대군을 동원해 B.C. 333년 11월 페니키아 해 북안에 위치한 이수스에서 일전을 벌이지만 다시 대패하고 말았다. 이수스 전투의 승리로 지금의 터키에서 이집트에 이르는 권역이 알렉산드로스의 수중에 들어왔다. 절치부심한 페르시아는 2년 후인 B.C. 331년 10월1일 티그리스 강 상류의 가우가멜라에서 기병 4만명에 보병 1만6000명, 전차 200대와 코끼리 15마리까지 동원해 결전을 벌이지만 참패로 끝난다. 다음 해인 B.C. 330년 7월 페르시아 왕이 신하에게 살해되면서 아케메네스 왕조의 페르시아는 공식적으로 소멸했다.

오리엔트의 지배자가 됐지만 만족하지 않은 알렉산드로스는 B.C. 326년 여름 인도 서부 인더스 강안까지 진출했다. 그러나 출발지에서 1만8000㎞를 떠나온 병사들의 피로도가 높아지고 전투력은 저하돼 결국 회군해 B.C. 324년 여름 페르시아 영토였던 수사로 돌아왔으나 다음 해인 B.C. 323년 여름 술좌석에서 과음한 후 고열 증세에 시달리다 병세가 악화돼 7월13일 32세에 숨을 거둔다. 동서양의 역사에 빛나는 정복자 알렉산드로스는 젊은 나이에 맞은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신화에 버금가는 영웅적 삶을 완성했다.

그리스와 이집트, 터키, 시리아, 이란에 걸친 정복자 알렉산드로스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 후계자가 없었기에, 필리포스가 기반을 닦고 알렉산드로스가 거대 제국을 이룬 마케도니아는 불꽃처럼 일어났다 순식간에 사라졌다. 알렉산드로스 사후 제국은 부하 장군 간의 50년 치열한 전쟁을 통해 3개로 분할되면서 그리스와 소아시아에는 카산드로스 왕조의 마케도니아, 메소포타미아에는 셀레우코스 왕조의 시리아, 이집트에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들어섰다. 이들은 로마가 지중해를 통일하는 B.C. 1세기 무렵까지 존속하면서 알렉산드로스의 정치적 이념이었던 동서 융합과 다문화 정책을 계승했고 헬레니즘 세계가 형성됐다. 그리스어가 중동과 이집트에서 국제어로 사용되기 시작했고, 당시 세계에서 가장 앞선 문명권이었던 그리스, 페르시아와 이집트가 통합되면서 학문·예술·문화 등 모든 면에서 비약적 발전을 이뤘다. 그리스의 철학·수학·과학에 바빌로니아의 천문학, 이집트의 기하학이 융합되면서 인류 지식의 새로운 지평이 열렸다. 고대 그리스의 폴리스 문명은 아테네·스파르타·테베의 패권에 이어 등장한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가 동방 원정에 성공하면서 오리엔트와 북아프리카 전역에 걸쳐 헬레니즘 문명으로 발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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