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피디의 방송수첩] 50분짜리 드라마를 허(許)하라
  • 박진석 | KBS PD (.)
  • 승인 2015.12.10 17:41
  • 호수 13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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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고논리’ 개입된 63분 분량 드라마가 완성도에 주는 부정적 효과

또다시 드라마 제작을 마치고 휴지기(休止期)에 들어갔다. 바로 다음 아이템을 기획하고 있다는 점에서 완전히 놀지는 못하지만, 일단 휴지기라고 하자. 어쨌건 등반 전문가용의 두툼한 패딩 점퍼를 끼고 스태프 버스를 타고 있지는 않으니까 말이다. 그래서 어떤 큰 프로젝트를 마치고 난 여느 직장인처럼 ‘못 본 드라마나 몰아서 볼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 시기이기도 하다.

그렇게 해서 지나간 드라마들을 쭉 훑어보면, 불과 한두 달 TV 리모컨을 잡지 않은 듯한데도 수많은 드라마가 쏟아져 나와 있다. 매주 20여 편의 드라마가 꼬박꼬박, 그것도 매일 혹은 일주일에 두 편씩 말이다. 출생의 비밀과 로맨스의 깊이와 나라의 건국 같은, 아무튼 자신들에겐 너무나 중요한 일들의 진도를 착실히 빼왔고 누군가는 라이벌을 몰락시킬, 혹은 치명적 과거를 숨길 그런 음모를 짰거나 혹은 밝혀내고 있다.

ⓒ 시사저널 임준선

그중에 하나를 고른다. 밀린 것들을 보려면 총 12개다. 한 편당 광고 빼고 63분 정도 되는 드라마를 따라잡으려면 12 곱하기 63, 적어도 756분을 꼬박 달려야 한다.

드라마 하나는 길다. 평일 밤 시간대 지상파 미니시리즈는 광고나 앞뒤 타이틀, 다음 편 예고를 제외한 실제 길이가 63분 전후다. 편성표를 기준으로 하면 70분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기대감이 큰 특별기획 드라마라거나, 또 다른 이유에서 방영 초반에 80분으로 늘려서 내보내는 경우도 부지기수이고, 뜨거운 호응이나 과열된 경쟁으로 중반 이후에도 얼마든지 10분 정도는 늘려서 방영하는 연장 편성을 한다. 지상파 방송 3사 드라마국장이 모여 ‘우리 최소한 70분을 넘기는 과열 편성은 하지 말자’는 신사협정을 논의하는 것도 몇 년을 주기로 흔히 보는 풍경이다. 매주 126분을 털어내는 드라마라. 도대체 어떤 무궁무진한 이야기가 그렇게 많아서 그럴까. 시청자들이 즐기기에는 그 정도의 길이가 딱 적절하기 때문일까.

당연히 그렇지 않다. 학문적 연구를 토대로 치밀한 시장 조사를 한 것도 아니다. 간단히 말해 지상파 방송은 그냥 광고를 붙이는 법이 그렇게 돼 있기 때문이다. 전체 프로그램 길이의 10분의 1 길이로 광고를 붙여서 팔 수 있다는 규칙 때문에 이런저런 길이로 맞추어보니 지금의 70분이 그나마 제일 적절하다는 판단을 내린 것뿐이다. 각 나라마다 드라마 시장의 작동원리가 다르기에 단순 비교하기는 뭣하지만, 미국이나 일본이 대략 40분과 50분 사이에 한 회를 끝내는 것에 비해서는 확실히 길다.

비단 ‘한국 드라마’만의 문제는 아니겠지만 힘차게 초반을 다져놓은 스토리들이 중·후반부에서 맥이 빠지는 경우를 종종 본다. 아이디어의 고갈, 기획 부족, 사전 집필은 고사하고 사전 제작마저도 힘들 만큼 밭게 돌아가는 제작 상황, 제작사 혹은 연출자와의 충돌, 그 외에도 여러 가지 수많은 이유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한 에피소드가 너무 길다는 건, 극의 밀도와 템포를 흩트릴 수 있는 요소인 건 분명하다. 적어도 매회 45분인 경우를 상상해보면 감초 배역들의 엉뚱한 해프닝, 청춘남녀의 뮤직비디오성 데이트, 맥락에 비해 너무 긴 노래방 신이 나오는 빈도는 낮아질 것이라 단언한다.

매주 126분 남짓의 이야기를 ‘생산’한다는 점은 작가 말고 오히려 제작진에게 더 중요한 문제일 수 있다. 속도 대비 완성도로 따지면 다른 어떤 나라와 비교해도 뒤지지 않는 실력과 전문성을 가진 것이 한국 드라마 스태프들이다. 그런 그들이 아침 7시에 출발해 쉬지 않고 꼬박 새벽 2~3시까지 찍어대도, ‘촬영한다’는 뜻에서가 아니라 공산품을 ‘찍어내듯’ 한다는 측면에서 찍어대도, 대체로 하루 촬영일 동안 만들어낼 수 있는 방송 분량은 평균 15분 전후다. 영상적 완성도에 집중하는 연출자라면 ‘생산 효율’은 더 떨어진다.

방송 당일까지 그날 방송 분량 촬영하기도

설령 ‘이야기의 신(神)’이 작가에게 축복을 내려 매주 대본이 밀리지 않고, 연출자가 완성도에 대한 욕심을 어느 정도 버리고, 제작진 모두가 7일 내내 4시간 이하의 수면만 취하며 꼬박꼬박 촬영을 하고, 어떠한 돌발적 외부 요인마저 없다 하더라도, 산술적으로 방송 분량에 맞출 수가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리고 작가의 마감이 늦어지거나, 제작진과 배우가 육체적 한계에 도달하는 건 상수에 가깝다. 또 현장에서 돌발 상황이라는 변수(연출부 막내의 재채기에서부터 촬영 현장 인근의 민원 발생까지)는 언제나 일어난다.

그렇기에 모든 미니시리즈의 경우 방송 당일까지 그날 방송 분량을 촬영하는 사태가 벌어진다. 그런 사태가 몇 회 때 오느냐의 문제일 뿐이다. ‘주연배우의 링거 투혼’이라는 기사가 홍보 대행사의 펜 끝에서 나오는 과장된 보도자료라면 차라리 얼마나 좋으랴. 이쯤 되면 노동 시간을 얼마나 초과했느냐를 논할 단계가 아니라, 과연 촬영 분량 중 스태프 전원이 온전히 이성을 유지하고 있던 분량은 얼마나 되는지가 궁금할 지경이다.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서는 시스템의 약점을 뛰어넘는 초인적인 노력, 아니 ‘투혼’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이런 제작 현장이 어쩌면 한국의 경쟁 사회를 압축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정상 유지를 위해 비정상적 노력을 경주해야 하는 우리 현실 말이다. 만약 50분물로 주간 1회 방영되는 드라마라면 적어도 현장에서 ‘투혼’이라는 단어가 등장할 일은 없을 것 같다. 완성도가 올라갈 확률도 높아지고.

좋은 드라마란, 흡인력 있는 이야기, 밀도 있는 감정의 묘사, 연출적 완성도 등 그런 것들을 통해 ‘인간다움’에 대한 어떤 통찰을, 혹은 위안을, 지친 몸을 TV 앞에 누인 시청자에게 던지는 것이라 믿는다. ‘방송 사고는 내면 안 된다’는 잔인한 마감을 앞두고 육체적·정신적 한계에 도전하는 것이 아니라 말이다. 적어도 이러한 노정(路程)에서 ‘주당 2회, 회당 63분 전후, 16~24부작 편성’이라는 현실이 유일무이한 길은 아닐 것 같다.

*지금까지 좋은 글을 써주신 박진석 KBS PD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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