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피디의 방송수첩] “발연기? 아이돌은 죄가 없다”
  • 박진석 | KBS PD (.)
  • 승인 2015.11.26 21:22
  • 호수 13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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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판권’의 현실이 가져온 아이돌 가수들의 드라마 진출에 대한 논란

몇 달 전 한 음악 채널에서 방영한 힙합 오디션 프로그램을 재미있게 봤다. 두 번째 시즌이었는데, 역시 시즌1의 대결 구도를 가져왔다. ‘자기 판이 아닌 곳에 끼어들어온’ 아이돌 가수와 ‘힘겹게 꿈을 키우고 있는’ 힙합씬 래퍼들의 대립각이다. 아무래도 다소 연출이 있었겠지만, 실제로 래퍼들은 대중문화 권력인 아이돌 소속사에 대해 비판을 하고 싶었을 터다. 물론 그게 부조리함에 대한 지적이 아니라 아이돌 멤버 한 개인에 대한 인신공격으로 보이는 경우가 왕왕 있었지만.

이를 보며, 드라마 캐스팅과 관련한 해묵은 논란을 떠올렸다. 아이돌 가수를 드라마 주요 배역으로 캐스팅한다는 것에 대한 논란이다. 나 역시도 아이돌이 출연한 드라마의 공동 연출이었던 적이 몇 번 있었기에 사실 이런 질문들이 새삼스럽기는 하다. 하지만 시청자들에게는 여전히 ‘아이돌 가수를 왜 캐스팅하느냐’는 질문이 유효한 것 같다.

아이돌 연기자가 ‘발연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황정음(오른쪽 사진)과 임시완(왼쪽 위 사진)은 연기자로 자리를 굳혔고, 혜리 역시 ‘생각보다 잘한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 tvN·MBC 제공

제일 큰 질문은 역시 ‘왜 전업 연기자를 캐스팅하지 않고 아이돌 가수를 캐스팅하는가’일 것 같다. 캐스팅에서 좀 더 스타성이 있는 사람을 택하려는 것은 대중문화 상품에서 당연한 속성이다. 그런데 아이돌 캐스팅은 거기에 더해 좀 다른 측면의 성격도 가지고 있다. 바로 2차 판매 시장에서의 경쟁력 높이기다. 물론 이 말 자체가 어떤 아이러니를 내포하고 있다.

아이돌이 출연하면 가격 오르는 건 사실

드라마를 상품으로 보았을 때, 프로그램 내적으로 가장 완성도를 높일 수 있는 것은 대략 다음과 같다. 완성도 높은 대본, 공들인 제작 기간과 전문적 제작 능력, 그리고 시청자의 공감을 끌어낼 배우들의 명연기. 개개인의 재능 차이는 있겠지만 대체적으로, 전업 연기자에 비하면 아이돌 가수들의 연기력이 다소 떨어지리라는 것이 통념이다. 전문적이지 않은 연기자를 캐스팅한 것이 드라마의 상품 가치를 높인다는 불편한 결론이 되는 것이다. 왜일까. 한국 드라마 2차 판매 시장의 독특한 속성 때문이다.

드라마를 사업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본방의 광고 수익 이후에는 해외 판매나 VOD로 추가 수익을 얻기 마련이다. 일본에서는 이미 ‘한류’가 식어가는 상황이지만, 여전히 아시아 지역은 한국 드라마가 무시될 수 없는 시장이다. 그런데 아시아 시장에서 한국 드라마의 편당 금액을 산출하는 과정을 보자. 여전히 아이돌 가수의 출연 여부는 가격 결정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 중 하나다. 이른바 ‘K-Pop 열풍’이라는 것에 어느 정도 과대 포장과 거품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것 자체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가 없다. 어쨌거나 허울에 기댄 것이든, 합리적인 판단에 따른 것이든 아이돌이 출연하면 조금이라도 가격이 올라간다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이런 엄연한 현실이 있기에 제작사는 아이돌 캐스팅을 적극적으로 고려하게 된다. 시청률은 하늘이 내리는 것이라고 말하는  데 비해, 편당 수출 금액은 아이돌 출연 여부라는 명쾌한 조건으로 결정되는 것이니까 투자 위험은 확실히 줄어든다. 제작의 최전선에 있는 연출자나 방송사 내에서 이 프로그램을 총괄하는 프로듀서도 무시할 수 없는 부분이다. 제작비 조달과 손익분기점을 넘기는 문제는 드라마의 내적 완성도를 추구하는 것 못지않게 절대로 간과할 수 없다.

어찌 되었건 제작사가 안정적으로 유지되어야 스태프들도 노동에 대한 정당한 가치를 받을 수 있을 테고, 방송사 드라마국 입장에서도 수익을 내는 것이 스스로의 존재가치를 증명하기 위한 중요한 당면 과제이니까. 얼핏 생각할 때는 아이돌 가수를 캐스팅하는 것은 아이돌 팬덤이 시청률을 끌어올릴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 아니냐고들 하는데, 제작 일선에서 더 실감하는 것은 이러한 2차 판매 문제다.

아이돌이 싫은 게 아니라 ‘발연기’가 싫은 것

다만 일선에서는 고민을 갖게 마련이다. 특히 아이돌 캐스팅은 극의 완성도를 해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2차 판매는 2차 판매일 뿐, 결국 연출자의 입장에서 가장 중시할 것은 본방으로 이 드라마를 즐길 시청자에게 부끄럽지 않은 드라마를 만드는 것이니까. 물론 요즈음은 소속사에서 연습생 시절부터 각자의 성향과 재능, 희망사항에 따라 다양한 분야의 ‘부전공’을 만드는 추세라고 알고 있다. 팀에서 가장 인기 있는 멤버라고 무작정 연출자에게 프로필을 내밀지 않는다는 뜻이다. 다만 ‘본업’인 앨범 활동과 병행하게 될 경우, 아이돌 캐스팅은 그 한계가 명확하게 드러난다.

이제까지 촬영 현장에서 만나본 아이돌 가수들은 모두 모범생 같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긍정적이고, 연기에 대한 궁금증과 욕심도 있으며, 신인 연기자에 비하면 카메라 울렁증도 없고, 무엇보다 프로로서 성실했다. 자세에서든 외모에서 배어 나오는 분위기든, 또래의 젊은 연기자와 비교해 부끄러울 것이 없었다.

다만 드라마 제작이라는 것이 소속사가 바라는 이상적인 조건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기에, 때로는 앨범 활동과 병행하는 경우가 있다는 게 문제다. 아이돌은 팀 단위로 움직이기 때문에 드라마 연기에만 온전히 시간과 노력을 할애할 수가 없다. 그러다 보니 연기력이나 배역 비중에서 일정 선 이상을 뛰어넘을 수 없다는 한계가 분명히 존재한다. 같이 일했던 어떤 아이돌 멤버는 결국 본디 있던 해외 스케줄을 조절할 수 없어 드라마 촬영 스케줄을 소화하지 못했고, 그 탓에 극중 비중을 대폭 축소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결과에 대해선 지금도 아쉬움이 남는다. 물론 당사자의 아쉬움은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결론을 말하자면 ‘아이돌 가수 캐스팅 논란’이라는 현상은 사실 아이돌만의 책임이 아니다. 받아들인 연출자와 프로듀서의 책임이 더 크다. 요즈음도 많은 드라마에 전·현직 아이돌이 출연하고 있지만, 아이돌이 연기를 한다는 것 자체가 비난받을 것은 아니다. 시청자는 아이돌이 싫은 게 아니라 ‘발연기’가 싫은 거니까. 모든 배우는 자신이 소화할 수 있는 비중과 성향을 갖기 마련인데 그에 맞지 않는 배역에 캐스팅된다면, 그리고 제작진과 충분한 교감이 이뤄지지 않는다면 ‘발연기’를 하게 된다. 연출자는 배역을 잘 소화할 만한 재목을 캐스팅하는 선구안(選球眼)과 분명한 방향으로 연기 디렉팅을 하며 완성도를 높여야 할 책임이 있다. 그러니 독자 여러분, 앞으로 어떤 아이돌이 ‘발연기’를 하거든 연출자를 욕하시라. 아이돌은 죄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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