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D는 실패에 대한 책임 묻지 말아야”
  • 박혁진 기자 (phj@sisapress.com)
  • 승인 2015.11.26 21:13
  • 호수 1363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연매출 20%의 연구·개발 비용이 6조원 잭팟 터뜨린 힘…한미약품 R&D센터 르포

한미약품이 지난 11월5일과 9일, 총 6조원 규모의 신기술을 다국적 제약회사에 수출하는 계약을 맺었다고 발표했다.

잇따른 신기술 개발에 힘입어 한미약품 주가는 올해 초 10만원에 불과하던 것이 11월20일 현재 80만원까지 올랐다. 업계에서는 이런 성과의 배경에 지속적인 R&D(연구·개발)가 있다고 말한다.

시사저널은 한미약품의 발전을 견인하고 있는 R&D센터를 직접 방문해, R&D 투자가 우리 기업에 어떤 메시지를 던지는지 취재했다.

경부고속도로 기흥IC 인근에 위치한 한미약품 R&D(연구·개발)센터. 신도시 건설 현장 한가운데 홀로 서 있는 8층 직사각형 모양의 R&D센터는 외벽이 유리로 돼 있어, 얼핏 R&D센터라기보다는 여의도에 있는 증권회사 건물처럼 보인다. 가까이 다가가 건물 윗부분에 빨간 글씨로 돼 있는 ‘한미약품 연구센터’라는 간판을 보고서야 이곳이 R&D센터(이하 연구센터)임을 알 수 있었다. 이날 연구센터를 찾은 기자가 가장 먼저 들른 곳은 권세창 연구센터 소장의 집무실. 보통 회사 대표의 사무실이 건물 꼭대기 층에 위치하는 것과 달리 권 소장의 사무실은 1층에 자리 잡고 있었다. 연구센터 입구에서 그의 방까지는 불과 서른 걸음 안팎. 권 소장에게 배치가 특이하다고 말하자 다음과 같은 대답이 돌아왔다.

6월8일 미국 보스턴의 보스턴컨벤션센터에서 열린 제75회 미국당뇨학회 연례회의에서 한미약품은 월 1회 투여하는 당뇨 신약 ‘에페글레나타이드’의 임상시험 중간 결과를 공개한 바 있다. 한미약품은 5개월 뒤인 지난 11월5일 이 기술을프랑스 제약회사 사노피에 5조원 규모의 가격에 팔기로 계약을 맺었다. ⓒ 연합뉴스

“특이하죠? 전에 소장으로 있던 이관순 한미약품 사장이 있을 때 만든 1층 사무실을 지금도 이용하고 있어요. 이 사장님이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센터의 모든 책임을 내가 짊어지고 간다는 의미에서 1층에다 사무실을 만들어놨다고 합니다.”

소장실이 1층에 있다 보니 직원들은 소장이 특별한 용무가 있어 위층 연구실로 가지 않는 한 소장과 마주칠 일이 없어 보였다. 1층에는 소장실을 비롯해 연구센터 지원팀, 자료실, 휴게실, 수면실 등이 있었다. 연구센터 측은 수면실만 개인 프라이버시 보호 차원에서 공개할 수 없다고 했을 뿐, 나머지 시설은 모두 기자에게 공개했다. 깔끔한 휴게실이 눈에 띄었다. 커피를 비롯한 간단한 다과 등이 상시 비치되어 있었다. 이회철 연구지원팀장은 “업무 특성상 밤을 새우는 경우도 있어 수면실을 1층에 배치했다”고 말했다.

2층부터 8층까지는 연구센터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연구실이 자리 잡고 있다. 3층과 4층은 각각 합성신약연구팀과 바이오신약팀의 연구시설이며, 나머지 층에는 동물실험실, 독성실험실 등이 자리 잡고 있다. 연구센터 곳곳을 둘러보니 최근 한미약품이 글로벌 제약사들을 상대로 6조원 규모의 신기술을 수출할 수 있었던 이유를 어렴풋이나마 느낄 수 있었다. 연구·개발 효과를 극대화시키기 위해 사무실 배치까지 꼼꼼하게 신경 쓴 회사와 연구소 측의 배려가 느껴졌다.

한미약품 연구센터 ⓒ 시사저널 이종현

사무실 배치도 R&D 효과 극대화 지향

연구센터를 직접 안내한 권세창 소장은 “연구센터가 처음 문을 열었던 2004년에는 다섯 개 층만 쓰고 나머지 6~8층은 벤처연구팀에 임대를 줄 생각이었다”면서 “그러나 연구·개발 투자가 늘어나면서 2년 만에 8개 층 전체를 다 쓰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이 건물 안에서 임상 전 단계까지 모든 연구 과정을 원스톱으로 끝낼 수 있다”며 “속도가 생명인 R&D에서 이것은 중요한 경쟁력”이라고 말했다.

한미약품은 5년 전 연구센터 건물 바로 옆에 3800㎡ 규모의 부지를 제2연구센터 건설을 위한 용도로 매입한 바 있다. 제1연구센터에서 뿌린 씨앗을 거두기도 전에 새로운 연구센터 부지를 매입했다는 것은 한미약품이 R&D 분야에 어느 정도 의지를 가지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라고 할 수 있다. R&D 투자의 핵심은 시설을 늘리는 것만이 아니다. 더 중요한 것은 사람에 대한 투자다. 현재 한미약품 연구소에서 일하는 인력은 총 150명 정도인데, 이 중 20% 정도는 회사의 지원으로 해외에 연수를 나가 있다고 한다. 연수생 비율은 현재만 그런 것이 아니라 항상 이 정도 비율을 유지하고 있다. 사람에 대한 투자가 R&D의 첫걸음이라는 원칙을 꾸준히 지켜가고 있는 셈이다. 한미약품의 잭팟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연구센터에 대한 한미약품의 자부심은 권 소장의 말에서도 잘 묻어난다. 권 소장은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한미약품은 단언컨대 세계에서 가장 R&D 하기 좋은 회사”라고 말했다. “연구원의 한 사람으로서 제약기업에서 한미약품만큼 R&D 하기 좋은 기업은 전 세계에서 없을 것입니다. 사실 연구센터의 시설만 보면 우리보다 나중에 건축한 회사들이 낫겠죠. 하지만 투자, 커뮤니케이션, 협업 체계, 연구원 의식 수준 등 모든 면에서 신속하게 R&D를 할 수 있는 여건을 갖추고 있습니다. 글로벌 임상 약을 만들 수 있는 바이오플랜트를 만든 것도 한미약품이 가진 장점입니다. 바이오플랜트 공장이 인근 평택에 있기 때문에 다양한 임상을 진행할 수 있습니다.”

한미약품이 R&D에 쏟아붓는 비용도 국내 다른 제약사들과는 확연하게 차이가 난다. 현재 한미약품은 1년 매출액의 20% 정도를 R&D 비용으로 사용한다. 이는 글로벌 제약회사가 R&D에 투자하는 비율과 비슷한 수준이다. 권 소장은 “글로벌 제약회사와 절대적인 금액은 비교할 수 없겠지만, 매출 대비 투자 비율로 따지면 비슷한 수준”이라며 “현재 국내 다른 제약사들은 1년 매출액 중 10~15%를 R&D 비용으로 사용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 정도도 많이 올라온 수준이고 꾸준히 늘어나고 있다”며 “R&D의 중요성을 점점 절감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71쪽 표 참조>

올해는 R&D 효과가 가장 뚜렷하게 나타났다. 한미약품이 올해 체결한 기술 수출 계약 총액은 7조5600억원 규모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11월5일 세계 5위 제약사인 프랑스 사노피와 자체 개발 중인 지속형 당뇨 치료제 관련 기술 ‘퀀텀 프로젝트’에 대한 라이선스 아웃 형태의 5조원 규모의 계약을 한 것이다. 나흘 후인 9일에는 미국 글로벌 제약사인 얀센과 1조원 규모의 기술 수출 계약을 체결했다. 뿐만 아니라 연초에는 일라이릴리·베링거인겔하임 등과도 기술 수출 계약을 맺었다.

한미약품 연구센터 권세창 소장 ⓒ 시사저널 이종현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 힘

업계에서는 한미약품 R&D를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도 존재하는 것이 사실이다. 이번 계약이 성사되기 전까지만 해도 천문학적 R&D 비용을 투자하는 것에 비해 제대로 된 결과물이 나오지 않는다는 비판이 그것이다. 권 소장의 설명대로 제약 신기술이라는 게 아무리 좋은 기술도 적절한 시간에 내놓지 못한다면 아예 물거품이 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한미약품에도 이런 전례들이 있었다. 대표적 사례가 2013년 개발하던 C형 간염 신약이었다. 당시 한미약품은 중남미에서 임상2상까지 진행하며 출시를 앞두고 있었다. 하지만 임상2상 도중 갑자기 중단 결정을 내렸다. 글로벌 제약사인 길리어드가 같은 기간, 하루 한 알 복용으로 C형 간염 치료가 가능한 신약인 ‘하보니’를 내놓았기 때문이다. 개발 중인 제품을 다른 회사에서 내놓은 만큼 더는 연구·개발의 의미가 없어졌다고 판단해 회사 측은 뒤도 안 돌아보고 연구를 접었다. 권 소장은 “우리가 개발하던 것보다 더 복용이 간편한 신약이 출시됐으니 더 이상 돈과 시간을 투자할 이유가 없었다. 그보다 더 나은 약을 개발하는 데 투자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이관순 사장 역시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다. 이 사장은 지난 11월19일 서울 리츠칼튼호텔에서 열린 ‘한국제약산업 공동 콘퍼런스(KPAC) 2015’ 개막 기자간담회에서 “(R&D는) 좋을 때보다 힘들 때가 많다”며 “연구원들의 상상력, 연구원들의 역량이 극대화하도록 지원은 많이 해주고, 실패한 과제에 대해서는 절대 책임을 묻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이 대표는 “최선을 다하되, 실패할 때 책임을 묻지 않는 회사의 문화가 연구·개발에 중요하다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이처럼 임성기 한미약품 회장을 비롯한 경영진 모두가 실패에 대해 책임을 묻지 않는 분위기는 연구원들이 창의적 연구를 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되고 있다.

실패에 대한 비판들이 있었지만, 한미약품은 R&D 투자를 멈추지 않았다. 한미약품이 적자를 기록하던 해도 있었지만, 해당 연도에도 R&D 예산을 깎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고 한다. 실제로 적자를 봤던 2010년과 2011년이 한미약품 입장에서는 정체기라고 할 수 있었지만, 신약 개발을 1년 늦추면 가치가 절반으로 뚝 떨어진다는 신념으로 R&D를 확대했다.

한미약품의 R&D 역사가 어제오늘 일이 아니라는 것은 과거 언론 기사를 검색해보면 쉽게 찾을 수 있다. 다음은 2007년 2월 한 경제신문에 실린 한미약품 연구센터 관련 기사 중 일부분이다.

‘지난 2004년 건립된 기흥 연구센터는 한미약품 R&D 네트워크의 심장부로서 신약 개발을 비롯한 핵심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는 평가다. 기흥 연구센터에서는 신물질 신약 개발, 바이오의약품 개발, 개량 신약 개발, 고난이도 원료의약품 개발 및 이와 관련된 약리독성 분석·연구를 수행 중이다. (중략) 한미약품은 지속적인 R&D 능력 향상을 위해 앞으로도 국내외 고급 연구 인력을 적극 유치하고 연구·개발 시스템을 글로벌 수준에 맞춰 생명공학을 기반으로 하는 세계적인 신약 개발 전문 회사로 발돋움하겠다는 목표다.’

영업 출신 아닌 연구소 출신을 사장에 임명

한미약품의 인사(人事) 역시 철저하게 R&D 중심으로 돌아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현재 한미약품의 대표이사인 이관순 사장은 연구센터 소장 출신이다. 그가 2010년 11월 한미약품 대표이사가 됐을 때만 해도 연구센터 출신이 제약회사 대표가 되는 것은 극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제약업계 관계자는 “복제약을 주로 파는 우리 제약업체의 특성상 영업 출신들이 대표이사가 되는 경우가 90% 이상이었는데, 연구원을 대표이사로 앉힌 것은 파격이었다”며 “이것 하나만 봐도 회사가 무엇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알 수 있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해서 임성기 회장이 연구센터의 연구에 이래라저래라 간섭하는 스타일도 아닌 듯했다. 기자가 권 소장에게 “임 회장이 연구소에 얼마나 자주 방문하는가”라고 묻자 “1년에 한 번 정도”라고 답했다. 임 회장이 연구·개발을 중요하게 생각하지만 지나친 간섭은 하지 않는다는 의미로 들렸다. 권 소장은 통상적으로 3개월에 한 번 임 회장과 이 사장을 만나 연구 결과를 보고하지만, 급하게 결정해야 할 사안이 있으면 곧바로 사장과 회장에게 보고하도록 의사결정 구조가 단순화돼 있어 빠른 결정을 돕고 있다고 한다.

한미약품이 R&D에 대해 장기적이고 집중적인 투자를 하는 것은 제약업체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기업 전체에 던지는 메시지가 적지 않다. 회사가 어려울 때 R&D 비용을 가장 먼저 줄인다는 농담이 있을 정도로 R&D의 중요성을 외면하고 있는 것이 한국 기업들의 현실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꾸준한 R&D가 회사에 어떤 결과물을 가져다주는지 한미약품은 보여주고 있다.

언론을 비롯한 외부에서 이번 기술 수출에 대해 큰 관심을 보이고 있는 것과 달리 한미약품 연구센터의 분위기는 차분했다. 삼삼오오 모여 떠드는 연구원들은 어디에도 없었으며, 그저 책상 앞에서 컴퓨터를 들여다보거나, 실험실에서 실험에 열중하고 있었다. 슬리퍼를 신은 연구원, 후드티의 모자를 뒤집어쓴 연구원 등 복장은 다양했지만, 표정은 하나같이 진지했다. 그들에게 회사의 ‘잭팟’은 마치 남의 일인 것 같았다. 실제로 그렇기도 했다.

이회철 팀장은 “최근 주식이 대박이 나서 직원들도 큰돈 좀 만졌겠다”는 기자의 농담에 “연초에 주식이 10만원에서 20만원대로 훌쩍 뛴 적이 있었는데, 직원들은 그때 다 팔았어요. 지금까지 회사 주식 가지고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걸요”라고 웃으며 말했다. 이 팀장은 “우리사주 주식으로 예전에 받은 것들이 있었는데, 10만원을 넘어서면서 대부분 팔기 시작했다”며 “주식이 지금처럼 80만원을 넘을 것이라고 예상한 사람은 없었다”고 덧붙였다. 정작 자신이 하는 연구가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몰랐던 그들은 이날 역시 자신도 예측할 수 없는 또 다른 잭팟을 위해 연구실에 앉아 있었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