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상현실’은 이제 현실이다
  • 김회권 기자 (khg@sisapress.com)
  • 승인 2015.11.25 12:30
  • 호수 13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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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스타 2015’에 불어닥친 VR의 거센 폭풍 현장 직접 체험해보니…

“그런데 정말 무섭지 않을까요?”
“여자분도 하시는데요, 뭘. 그리고 가만히 보고 계시면 엄청난 미인도 나옵니다.”

소니컴퓨터엔터테인먼트(SCEK) 관계자의 말에 기자는 살짝 안심했다. VR(Virtual Reality), 가상현실을 기반으로 한 게임은 소니가 이번 ‘지스타 2015’(11월12~15일 부산 벡스코에서 개최된 국제 게임쇼)에 내놓은 야심작이다. 영화에서나 볼 법한 미래형 게임을 미리 체험할 수 있다는 생각에 살짝 긴장까지 됐다. 소니 부스는 이 VR 기기를 한 번 경험해보겠다는 사람들로 지스타 기간 내내 대기자가 장사진을 이뤘다.  

“어떤 게임을 하시겠어요?” 선택지는 5개였는데 과감히 호러 장르를 골랐다. 타이틀명은 ‘키친’. 지스타보다 앞서 개최된 다른 나라의 게임쇼에서 ‘키친’을 해본 사람들은 모두 멘털이 붕괴됐다는, 바로 그 게임이었다. E3나 도쿄게임쇼 등 해외 게임쇼에서 시연에 나선 외신기자들을 유튜브에서 웃음거리로 만든 바로 그 게임이다. 비명을 지르는 건 예사였다는 둥, 어떤 사람은 도중에 손을 들어 HMD(헤드셋 마운트 디스플레이, 머리에 착용하는 고글형 디바이스)를 벗겨달라고 애원했을 정도였다는 둥, 각종 미확인 소문도 이미 들었던 터다. 평소 공포영화의 예고편조차도 실눈을 뜨거나 보지 않는 기자지만, 그래도 VR을 제대로 체험해보려면 ‘공포물’이 낫겠다 싶었다. HMD를 머리에 씌우며 “괜찮다” “문제없다”고 말하는 소니 관계자의 말을 믿어야 했다.

ⓒ 지스타조직위원회 제공

눈앞에 다가오는 여자의 모습에 식겁해 

드디어 시작했다. 눈앞에 피로 얼룩진 낡은 싱크대가 보인다. 여긴 어딜까. 두리번거려보니 내 양쪽 어깨 뒷부분까지 보인다. 가상세계에 들어와 있는 내 모습은 생각보다 어색하지 않고 현장감과 몰입감이 느껴진다. 부엌의 모양새지만 마치 음침한 지하실의 감금 장소 같은 곳에 난 묶여 있다. 시선을 아래로 향하니 내 두 손은 끈으로 결박됐고, 내 몸은 의자에 고정돼 있다. 바닥에 쓰러져 있던 한 남자가 눈에 들어온다. 그가 꿈틀대더니 나에게 걸어온다. 그리고는 다시 싱크대에 있는 칼을 가지고 와 급하게 내 손목을 묶은 끈을 풀어주려고 한다. 칼을 들고 올 때는 흠칫 놀랐다.  

그런데 내 옆에 검은 그림자가 휙~하니 들어온다. 정체를 드러낼 듯 말 듯 하던 그림자가 갑자기 남자의 등에 매달렸다. 여자지만 미인이 아니다. 마치 일본 공포영화 <링>에 나오는 사다코와 닮은 여자가 내 눈앞에 있다면? 그녀는 날 풀어주려던 그 칼을 뺏어 날 구해주려던 그 남자의 가슴을 찌른다. 칼이 가슴을 뚫고 나올 정도로, 그것도 여러 번 난도질한다. 난 내 눈앞에서 벌어지는 이 광경을 의자에 묶인 채로 가만히 보고 있다. 이거 단지 게임일 뿐인데, 묶여 있는 게임 속 내 모습과 마치 일치가 된 듯 그 자리에 얼어붙어버렸다. 소니 관계자가 이야기한 ‘미인’은 아마도 곧 날 죽일 것 같은 이 여자지 싶었다. 

스포일러 방지를 위해 이쯤에서 더 이상의 내용을 설명하지 않더라도 VR이 주는 현실감은 상당했다. 정말 식겁했고 어디서 뭐가 튀어나올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에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가상세계에서 헤매다’는 표현이 이만큼 어울리는 경험은 없었다. ‘그래봤자 가상현실인데’라는 마음가짐은 이미 이 기계가 주는 공포감에 굴복한 채 패배감으로 바뀌어버렸다. 

이번 지스타 2015의 대박 아이템은 VR이었다. 이전에는 맛볼 수 없는 가상현실이 단연 인기를 끌었다. “VR은 게임의 미래”라는 찬사가 쏟아졌다. 소니 부스는 말할 것도 없었고 페이스북이 2조원이 넘는 자금을 투입해 인수한 오큘러스의 ‘오큘러스 리프트’를 써보기 위한 게임 덕후(광팬 혹은 마니아)들의 줄이 길게 늘어섰다. 가상현실 맛보기를 위해 2~3시간을 허비하는 것은 예사였다.

부산에서 목도한 가상현실에 대한 호응. 이처럼 VR은 지금 오랜만에 다시 호황을 누릴 준비를 하고 있다. VR을 일단 정리해보면 CG(컴퓨터그래픽)로 만들어낸 3D 영상 등을 이용해 사용자가 몰입하고 더 현실적으로 체험하게끔 만든 기술이다. 소니뿐만 아니라 삼성·마이크로소프트·구글·페이스북 등 IT(정보기술)에서 꽤 유명하다는 기업들은 현재 VR의 새로운 장비(HMD)를 개발하고 관련 벤처기업 등을 인수하면서 이 분야를 뜨겁게 달구는 중이다. 비단 게임이 아니더라도 VR은 응용 가능한 영역이 많다. 최근 뉴욕타임스는 VR을 이용해 뉴스를 전달하는 시도를 하고 있다. 콘텐츠 영역을 넘어 저널리즘에서도 새로운 표현 방식으로 주목을 받는 게 VR이다. 그만큼 다양한 영역에서 우리 삶을 바꿀지도 모를 디바이스가 본격적으로 펼쳐진 게 이번 ‘지스타 2015’였다.

앞서 오랜만의 호황이라고 표현한 것은 과거에도 ‘붐’이 있었기 때문이다. VR의 시작은 놀랍게도 꽤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1960년대 미국 유타 대학에서 개발한 HMD에서 처음 시작됐다. 이후 세계적인 붐이 한 번 일어났는데 그때가 1990년대였다. 하지만 사업 중단으로 곧 시들해졌다. 주된 이유는 당시의 VR이 ‘가상현실’이라고 부르기엔 부끄러운 경험밖에 제공할 수 없어서였다.

HMD에 탑재된 프로세서와 모션 센서 처리 기능이 당시에는 떨어졌으니 제공하는 3D 영상도 현실감을 주기에 턱없이 부족했고 움직임도 둔했다. 그로부터 20년 이상 지난 지금 나오는 최첨단의 VR은 1990년대의 그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향상됐다. 비디오게임산업이 발전시킨 고화질의 영상이 만들어졌다. HMD에 딸린 센서는 이제 머리의 방향과 움직임에 따라 실시간으로 부드럽게 화면을 펼쳐준다. 여기에 헤드폰을 장착하면? 완벽한 VR 몰입 준비가 끝나는 셈이다. 

“엔터테인먼트 그 이상의 가치를 보여줄 것”

“직접 써야만 알 수 있다. 가상현실을 경험해보지 못한 이는 절대로 그 느낌을 알지 못한다.” 초대 오큘러스코리아 지사장을 지냈던 서동일 볼레(VoleR) 대표가 설명하는 가상현실의 매력은 ‘경험’이다. 인류의 삶이 좀 더 윤택하게 바뀔 수 있도록 해주는 게 VR의 힘이라고 그는 말한다. “여행을 가기 힘든 노인, 놀이기구를 탈 수 없는 이들이 실제 경험보다는 덜해도 훨씬 저렴하고 위험하지 않게 80%의 경험이라도 얻을 수 있다. 단순히 엔터테인먼트 면으로만 VR을 생각할 게 아니다.” 

개발사도 그런 점을 강조한다. 요시다 슈헤이 SCE 월드 와이드 스튜디오 사장은 일본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VR에 관해 이야기하면서 자신이 본 동영상을 이야기했다. 바깥 구경을 하지 못하는 고령의 할머니를 위해 손녀가 오큘러스의 HMD를 씌워준다. 할머니의 눈앞에는 구글의 스트리트뷰로 본 고향의 풍경이 펼쳐졌다. 이제 곧 삶을 정리해야 하는 할머니는 자신이 나고 자란 곳의 광경을 보며 눈물을 흘렸다. 요시다 사장이 강조하는 부분도 서 대표와 비슷하다. “에피소드에서 볼 수 있듯이 VR을 통해 개인적인 체험을 리얼하게 겪을 수 있다. 평소에 만날 수 없는 사람도 만나는 서비스가 가능하다.”

이처럼 새로운 미래로 칭송받은 VR이라 그런지 우리 정부도 갑자기 투자에 나선 상황이다. 미래창조과학부는 내년 VR 분야 디지털 콘텐츠 예산을 94억원에서 122억원으로 증액했다. 문화체육관광부도 내년 전체 게임산업 예산 443억원 중 42억원을 처음으로 융·복합 콘텐츠, 즉 VR에 지원하기로 했다. 두 개의 부처가 동시에 예산을 늘린 데는 콘텐츠 플랫폼 환경이 앞으로 VR로 빠르게 넘어갈 것이라는 예측이 바탕이 됐다. 

“3D TV 기억하시죠? 몇 년 전만 해도 그걸로 난리였지만 지금 누가 집에서 3D TV를 보나요?” 3D TV 이야기를 꺼낸 한 게임업계 관계자는 VR의 대중화가 쉽지 않을 거라고 전망했다. 폐쇄형 공간에서 HMD를 써야 하는 조건의 특성상 공개된 곳에서는 할 수 없는 만큼 결국 집안 한구석에서 즐겨야 하니 확장성의 한계가 명확하다는 것이다. “VR은 AR(Augmented Reality)로 가는 전 단계일 가능성이 크다.” 

AR은 ‘구글 글라스’를 떠올리면 이해하기 쉽다. 고글로 외부를 차단해야 하는 불편함이나 부자연스러움이 AR에는 없다. 사용자가 보고 있는 실사 영상에 여러 정보를 제공하며 정보를 주고받기 때문에 격리감도 없고, 그러다 보니 하나의 디바이스로 확장성도 크다는 게 장점이다. 영국의 게임 전문 투자업체인 디지캐피털은 2020년 VR의 시장 규모를 300억 달러로 예측했다. 그러면 2020년의 AR 시장은? 무려 1200억 달러다. 

2015년 부산에서 각광받은 VR이지만 아무리 훌륭해 보이는 시스템도 결국 시장의 ‘검증’ 없이는 그 미래를 모르는 일이다. VR의 도래는 예견돼 있지만 기대만큼 새로운 먹거리 시장으로 커질지, 3D TV처럼 잠깐 스쳐가는 미풍이 될지는 알 수 없다. 일단 2016년 소니는 플레이스테이션4의 VR 게임 타이틀을 10개 이상 내놓겠다고 했다. 그때의 성적이 가늠자가 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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