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인과의 대화] 이웃사촌이 철천지원수로 ‘돌변’
  • 배상훈 | 서울디지털대 경찰학과 교수(프로파일러) (.)
  • 승인 2015.10.22 14:02
  • 호수 1358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층간 소음’ 다투다 살인까지…‘안정’ 아닌 ‘불안’ 된 주거공간

6월14일 오후 6시30분쯤 서울 사당동의 한 빌라 2층에 거주하는 L씨가 바로 아래층에 사는 H씨를 흉기로 찔러 숨지게 했다. 주민들이 모여 반상회를 하는 자리였다. H씨의 어머니도 중상을 입어 수술을 받았다. 당시 H씨와 그의 어머니는 L씨에게 층간 소음에 대해 항의했고 이 과정에서 멱살을 잡는 등 폭력 행위가 있었다고 한다. 가족 앞에서 폭행을 당하자 흥분한 L씨가 집에 있던 흉기를 꺼내와 휘두른 것이다. L씨와 H씨 가족은 1년 반 전부터 층간 소음 때문에 자주 다퉜던 것으로 알려졌다. 층간 소음이 촉발한 이웃 간 갈등이 이웃사촌을 철천지원수로 만든 셈이다.

층간 소음으로 인한 다툼은 어제오늘 얘기가 아니다. 지난해 5월17일에는 서울 창동의 한 아파트에서 아래층에 사는 C씨가 선친의 제사를 지내기 위해 위층을 찾은 J씨를 흉기로 두 차례 찔러 숨지게 했다. C씨는 2011년부터 층간 소음 문제로 윗집과 갈등을 빚어왔다고 한다. C씨는 이날도 J씨 가족의 방문으로 위층에서 쿵쿵거리는 소리가 들리자 항의하러 가다가 엘리베이터 앞에서 마주친 J씨와 말다툼을 벌이다 이같이 끔찍한 사건을 저지르게 된 것이다. 몇 달 전인 6월9일에는 경기도 남양주시의 한 다세대주택에 거주하는 K씨가 층간 소음으로 이웃과 다투다 계단에 불을 지른 일도 있었다.

ⓒ 일러스트 오상민

‘증오범죄’와 ‘분노범죄’

최근 논란이 된 이른바 ‘용인 캣맘 사망’ 사건도 초기에는 이웃 간의 갈등이 원인으로 거론됐다. 사건의 개요는 이렇다. 10월8일 오후 4시35분쯤 경기도 용인 수지의 한 아파트 104동 위층 어딘가에서 시멘트 벽돌 하나가 날아들었다. 이 벽돌은 1층 화단에서 길고양이들에게 먹이를 주고 길고양이 집을 만들고 있던 50대 여성 B씨(101동 거주)를 사망에 이르게 했고, 또 다른 20대 여성 C씨(104동 거주)에게 부상을 입혔다. 피해자들이 벽돌에 맞아 상해를 입은 지점이 외벽으로부터 일정거리 이상 떨어져 있고 큰 나뭇가지가 부러진 방향이나 성상 등을 종합적으로 분석해보면 이 벽돌은 자유낙하에 의해 떨어진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외력에 의해 범죄의 도구가 된 것으로 추정됐다.

이 사건이 언론을 통해 방송되자 이른바 ‘증오범죄’라는 꼬리표를 달게 됐다. 사망한 B씨가 길고양이에게 먹을 것을 주기 시작하면서 최근 들어 아파트 단지에 고양이들이 몰려들었다고 한다. 그런 정황을 놓고 볼 때 고양이가 싫고 더욱이 길고양이들이 자신이 사는 주거지에 떼를 지어 몰려드는 것을 싫어한 누군가가 고의적으로 B씨 등에게 벽돌을 던진 것이라고 언론이나 경찰 등이 추정한 것이다. 즉, 고양이와 그런 고양이들이 모이게 만든 사람에 대한 증오가 벽돌 투척이라는 물리적인 폭력을 통한 범죄 행동을 야기한 것 아니냐는 추측이었다.

사건이 발생한 지 일주일 만에 유력한 용의자가 붙잡혔다. 전혀 예상치 못한 인물이었다. 다름 아닌 해당 아파트의 같은 단지에 거주하는 초등학생이었다. 사건 당일 친구 2명과 함께 옥상에 올라가 낙하 실험 놀이를 하던 중 벽돌 하나를 아래로 던졌다는 것이다. 초등학생들이 벌인 일이라는 것이 사실로 밝혀진다면 경찰과 언론이 그동안 헛다리를 짚은 셈이 된다.

당초 이 사건을 증오 범죄로 분류한 것 자체가 부적절했다. 증오범죄(Hate Crime)의 정의는 ‘소수인종이나 소수민족, 동성애자, 장애인, 노인 등 사회적 약자 계층에게 이유 없는 증오심을 갖고 테러를 가하는 범죄 행위를 일컫는 개념’이다. 증오범죄가 주로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테러라고 볼 때 ‘캣맘’이 사회적 소수자인지에 대해서는 확정할 수 없다. 만약 어떤 한국 사람이 자신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혼혈의 여성에게 단지 피부색이 싫다는 이유만으로 벽돌을 던졌다고 하면 분명 증오범죄일 것이다. 그런데 길고양이에게 먹이를 주는 여성이 사회적 소수자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증오범죄는 사회적으로 형성된 의식 혹은 무의식이 기본 바탕에 깔려 있는 것이다. 이른바 ‘일베’들의 여성에 대한 이유 없는 공격이나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이유 없는 공격 등이 바로 그런 범주에 들어간다. ‘용인 캣맘 사건’이 초등학생들의 호기심으로 인해 별다른 의도 없이 벌어진 일이 아니라 누군가 ‘캣맘’을 겨냥해 저지른 사건이라고 하더라도, 이는 증오범죄라기보다 ‘분노범죄’에 더 가까울 것이다. 증오범죄가 사회적 권력 관계의 표현과 집단성, 대상의 명확성 등을 가진다면, 분노범죄는 타인과의 소통 부재, 낮은 자존감, 개별적 폭발성 등을 가질 것이다. 따라서 증오범죄가 사회 내에서 일종의 정치적인 세력으로 존재하는 반면, 분노범죄는 그와는 반대로 개인의 자아 속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자기 분열과 자기 공격 등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자신에게 향한 분노 외부로 폭발

그런 측면에서 근래 들어 급격히 늘어나고 있는 ‘층간 소음 폭력 범죄’는 분노범죄의 또 다른 유형으로 볼 수 있다. 물론 층간 소음 문제의 원흉 중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존재는 탐욕스러운 건설 재벌과 그들의 공범인 관료와 정치인일 것이다. 그들은 자신을 포함한 소수의 이익을 위해 각종 법 조항들을 동원해 건축 기준(층간·벽간 소음 기준)을 턱없이 낮추면서 건축 면적과 건축 자재 등에서 폭리를 취했다. 여기에다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아파트 투기 열풍이 가장 안정적인 집합 주거공간이어야 할 아파트를 주거용이 아닌 재테크용으로 변질시켰다. 결국 소음 발생으로 인해 극한의 인내를 갖지 않고서는 사람이 살기 어려운 애물단지 공간으로 변해버린 것이다.

거기에 도시 공간의 과밀화, 인구 집중 등에 따라 그 여파가 연립주택, 다가구주택, 주거용 오피스텔 등으로 번져 어디서나 큰 소리 한 번 못 내고 좁은 공간에 갇혀 사는 신세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중에서 최악의 공간은 이른바 ‘고시원’이다. 필자도 학교 앞 고시원에서 두어 달 거주한 적이 있었는데 말이 거주 공간이지 감옥이 따로 없었다. 두 평 남짓한 공간에 책상과 의자가 있고 잠을 자기 위해서는 의자를 책상에 올리고 책상 밑으로 다리를 뻗은 채 담요를 덮고 자야 했다. 벽은 얇은 합성 나무판자 재질로 옆 방 사람이 코라도 골면 잠자기는 애당초 글러버리게 된다. 며칠만 지나면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 좀비가 된다. 그런 공간에서 살아남았다는 것이 지금 생각해도 참 아찔하다.

우리나라 1966~70년대 봉제공장 노동자들의 개미굴이나, 외신에 나오는 방글라데시 노동자들의 쪽방촌이 더 크게 보일 정도이니, 한 달이 멀다 하고 터지는 고시원에서의 살인이나 방화가 이보다 더 발생하지 않는 것이 이상할 정도다. 그곳에 들어앉아 있으면 그 공간만큼이나 자기 자신이 한없이 작아지고 초라해진다. 끝없는 비참함이 몰려든다. 자기 자신에 대한 분노가 극에 달한다. 그래서 그런 공간에는 ‘거울’ 을 붙이지 않는다. 그런 자신의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크나큰 고통이기 때문이다.

‘층간 소음’으로 이웃을 살해한 뒤 도주했다가 검거된 K씨가 2013년 2월13일 서울 중랑경찰서로 들어오고 있다. ⓒ 연합뉴스

그런데 이런 극한의 상태에서 자그마한 소음이라도 귀에 들어오면 그 즉시 미리 준비해둔 칼이나 도끼, 망치를 들고 무작정 그 소음의 원천으로 뛰쳐나가는 것이다. 그 대상이 누구든 간에 초라하고 비참한 나 자신을 모르는 그 누군가를 대상으로 불을 지르고 칼로 찌르고 망치를 휘두른다. 그렇지만 그 분노는 애당초 그 대상을 향한 것이 아니다. 분노는 사실 자기 자신에게로 향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좀 더 처참하고 좀 더 잔인하게 폭력을 휘두른다. 마치 가장 작은 자기 자신을 한없이 크게 만들려는 듯하다. 그러나 그것뿐이다.

일부 고시원의 극단적인 상황만을 놓고 범죄를 일반화하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올 수도 있다. 그렇다면 극단적이지 않다고 여기는 주거공간은 이보다 더 낫다고 할 수 있을까. 연립주택은 연립주택대로, 다가구주택은 다가구주택대로, 아파트는 아파트대로, 그 공간에서 숨죽이며 갇혀 산다. 마음껏 큰 소리 한 번 못 내고 뛰어다닐 공간도 별로 없다. 물론 그런 공간을 찾아가면 된다. 다만 그 공간으로 이동하기 위해서는 먹고살 생계 수단을 버려야만 가능할지도 모른다. 넓을 것 같은 공간 속에서 초라하게 쪼그라든 자아를 바라보며 시체처럼 경직된 자기 자신을 발견한다. 작디작은 존재마저 버려진다면 그 분노는 극단적인 방향으로 폭발한다.

증오범죄는 집단의 논리에 의존하는 범죄로서, 마치 길거리에서 흔들리는 광고 풍선과 같다. 바람 부는 대로 흔들거리지만 알맹이는 없다. 군중심리에 따라 폭력이 유발된다. 반면 분노범죄는 집단이 아닌 가장 작은 자아의 분열이다. 평소에는 예의 바르고 정의롭게 행동하는 사람일 수도 있다. 체크무늬 티셔츠와 끈 달린 구두를 신고 옷 단추는 늘 모두 채워져 있으며 머리는 늘 단정한 차림을 하고 있는 이웃. 꼭 필요한 말 이외에는 잘 하지도 않고 억지 주장을 관철시키려고 해 주변을 불편하게 만들지도 않는 이웃. 하지만 자신의 분노를 폭발시키면 마치 다른 사람을 본 듯 돌변한다. 이때 그 자아는 오히려 인간에 더 가까워진다. 이것이 분노범죄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