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들이기’ 넘어선 청와대의 ‘무대 때리기’
  • 김현일 대기자 (.)
  • 승인 2015.10.14 16:01
  • 호수 1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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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재 홍보특보 긴급 투입…친박의 일제 공세는 예정된 수순

총선 결과에 따라 정치 지형은 한순간 뒤바뀌기 일쑤다. 차기 대선 판도까지 달라진다. 민심 소재가 확실히 드러나면서 정국 풍향계가 어제와 전혀 다른 모습을 띠는 것이다. 4년 주기의 총선과 5년 주기의 대선 일정 탓에 지금의 선거 일정과 똑같은 상황이 일어난 게 바로 20년 전이다. 당시 김영삼(YS) 정부는 1996년의 15대 총선과 1997년의 15대 대선을 앞두고 있었다. 총선의 정치적 함의(含意)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지만, 역대 총선 중 특히 15대 총선은 여러모로 시사하는 바가 크다. 대선을 1년 8개월 앞두고 치러진 총선 결과에 따라 그다음 해의 대선 판도가 크게 영향을 받은 점 또한 그렇다.

지난 6월 올림픽체조경기장에서 열린 세계간호사대회에 참석한 박근혜 대통령과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 서먹한 표정은 ‘불편함’이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님을 짐작하게 해준다. ⓒ 연합뉴스

20년 전의 15대 총선·대선, 지금의 데자뷰

1996년 4월 실시된 15대 총선은 지도자의 오만·독선과 정당의 내분·갈등은 곧 자멸임을 여지없이 증명해준 선거였다. 당시 대통령이던 YS는 TK(대구·경북) 유권자가 등을 돌림으로써 선거 전 갖고 있던 170석에서 다수 의석을 잃고 139석을 얻는 데 그쳤다. 그나마도 완패할 것으로 예상했던 서울에서 27석이나 건진 덕에 참패는 면했다. YS의 거듭된 패착에 힘입어 정계에 복귀한 김대중(DJ) 총재의 새정치국민회의는 당초 100석 이상을 장담했으나, 79석에 머물렀다. 서울에서 의외로 18석만을 간신히 챙기는 데 그친 탓이었다. 반면 YS와 결별한 김종필(JP) 총재의 자민련은 충청권 싹쓸이에다 TK에서의 선전(善戰)으로 50석을 얻는 쾌거를 이뤄냈다. 각 정파 리더들의 무리수와 아집이 겹쳐 이변만 양산한 뒤죽박죽 선거였다.

15대 총선 결과로 DJ는 독자적으로는 큰일을 도모하기 어렵다는 한계를 절감하고 정치 성향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할 것 같은 JP와의 제휴를 관철해낸다. 그리고 결국 1년 8개월 후에 치러진 제15대 대선에서 승자가 됐다. JP를 내친 YS는 자신이 가장 염려하던 DJ의 대통령 취임을 감수해야 했다.

‘DJ 대통령 당선’의 다른 표현인 ‘이회창 낙선’은 절대적으로 유리한 정치 상황도 ‘대통령과 대선 후보의 반목’ 앞에선 무의미함을 웅변해줬다. YS 자신은 대선 후보 당시 ‘현재 권력’(노태우 대통령)을 ‘탈당 불사’ 카드로 압박하며 대권을 쟁취했지만, 정권 재창출에는 실패했다. 당 대표였던 YS의 치받기에 진노한 노 대통령이 청와대 휴게실로 들어가 1시간 넘게 YS와 최고위원 JP를 외면했던 진풍경도 당시의 일화다.

이랬던 YS는 그 자신도 ‘후계자(이회창)’로부터 매우 유사한 상황을 맞는다. 내심 후계자로 낙점했던 인물(이인제) 대신에 기피했던 인물을 마지못해 후계자로 삼은 것이나, 이후의 치받힘 등은 판박이다. YS는 이회창 전 총리를 예뻐해서가 아니라 임기제 감사원장에서 빼내기 위해 국무총리에 임명했다가 국가안보회의 주재권을 요구하는 데 발끈, 그를 내쳤다. 이후 여당의 지지율이 추락하자 그를 당에 끌어들이고 당 대표에 임명했지만, 결국 그에 의해 당에서 축출되는 수모를 당하는 등 임기 후반기 내내 ‘2인자’와 갈등을 빚었다.

YS나 DJ 시절의 정당은 실은 공당(公黨)이 아니라 사당(私黨)이었다. 지금의 정당과는 비교하기 어렵고, 국민 정서도 다르다.  따라서 오늘날에는 참고할 게 없다고 도외시 할 수도 있으나, 꼭 그렇게 볼 것만도 아니다. 내분, 특히 명분 없는 권력다툼은 공멸이라는 결과는 역대를 관통하는 철칙이다. 그럼에도 이를 거스르는 정치가 지금 한창이다. 여야가 한결같다. 청와대와 당 대표가 사사건건 부딪치는 여권이나, 분당 소리가 공공연한 새정치연합의 행태는 지켜보는 모두를 아연케 한다. 특히 야당의 경우는 생리·구조상 그렇다 치더라도 여권 내부의 모습은 황당하기까지 하다.

‘대통령 호위무사’로 맹활약 중인 청와대 김경재 홍보특보(왼쪽)와 정부특보를 겸하고 있는 윤상현 새누리당 의원. ⓒ 시사저널 이종현

무대, ‘항전’보단 인내하며 반전 기다리는 전략

청와대와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 간 갈등 양상이 점입가경이다. 양측 내부의 긴박한 움직임과 공방 수준은 상상을 뛰어넘는다. 한집안에 흔히 있는 그런 다툼이 아니다. 지난 7월 유승민 원내대표의 하차 시비로 당·청 간 긴장이 고조됐을 때까지도 청와대의 ‘무대(김 대표) 길들이기’라는 인식이 대체적이었다. 현재 권력(박근혜 대통령)의 있을 수 있는 불만 표시와 경고 정도로 읽혔다. 그러나 ‘유승민’을 향한 박 대통령의 ‘배신의 정치’ 성토 발언 이후 청와대와 친박 진영의 태도는 길들이기 ‘그 이상의 무엇’이라는 감을 느끼게 하기에 충분하다. 무엇보다 ‘대(對)무대’ 파상공세는 치밀하게 짜인 계획에 따라 전개되는 양상이다. 청와대 공격 라인 중심에는 김경재 홍보특보와 현기환 정무수석이, 새누리당에서는 서청원 최고위원의 지휘 아래 윤상현 의원이 전위대로 나서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특유의 입담과 논리로 대통령의 신임을 받는 김 특보는 추석 연휴 기간 지방에 체재하던 중 청와대의 긴급 연락을 받고 달려와 연일 TV에 출연, 공세를 이어가고 있다. 이른바 고공전(高空戰)의 선봉인데, 김 특보의 투입 과정만 봐도 청와대와 친박 핵심들의 김 대표에 대한 작금의 공세가 ‘기획’의 산물임이 감지된다. 친박 핵심들이 김 대표의 영남 독식을 막기 위해 직능·지방 조직에 본격적으로 공을 들이고 충청권으로 촉수를 넓혀가는 일련의 행보들도 기획의 연장선상이다.

최근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의 부각도 마찬가지다. 반 총장이 뉴욕을 방문한 박 대통령을 만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결코 의례적인 것으로 비춰지지 않게’ 한 발표나 설명은 주목할 만하다. 다수의 각국 원수들이 어울리는 공식 석상이 대부분이었음에도 굳이 ‘7차례’를 강조하는 등의 ‘조치’는 지난해 초 친박 의원들이 반 총장의 대선 후보 가능성을 공개리에 토론한 포럼만큼이나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김 대표도 청와대와 친박의 의도를 확실히 간파한 듯하다. 그의 “더 이상 당 대표를 흔들면 참지 않겠다”는 9월30일 의원총회 언명에는 ‘더는 밀릴 수 없다’는 절박감이 서려 있다. 문제는 김 대표가 이렇게 정색했음에도 공세가 멈추지 않았다는 점이다. 오히려 관망 자세를 취해온 서청원 최고위원까지 김 대표의 오픈프라이머리 관련 책임 문제를 따지면서 확전 양상을 띠다가 지금 잠시 멈칫한 상태다. 국사교과서 문제가 여야 대결 현안으로 떠오르면서 소강상태로 접어든 것이다. 하지만 재연은 시간문제일 게 빤하다.

이 같은 청와대와 친박의 일제 공세에 대한 ‘무대’ 쪽 대응은 ‘항전’보다는 인내하며 반전을 기다린다는 전략인 듯싶다. 20년 전 이회창 전 총리가 대통령 YS에게 맞섰다가 대선에서 패배한 점을 곱씹는 듯하다. 총선을 목전에 둔 상태에서, 대표 임기가 내년 6월까지인 무대에게 그 이상의 독수(毒手)는 어려울 것이라고 판단한다. 그리고 총선을 성공리에 마치면 ‘새로운 무대’ 즉, 미래 권력이 힘을 받는 국면이 조성되리라는 기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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